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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문어80
조용한문어8023.05.18

조선과 명나라의 조공에 관해 궁금한게 있습니다.

조선에서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면 명나라에서는 대국의 면모를 보여주기 위해 몇배의 하사품을 줬다고 하는

커뮤니티 글을 봤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사실이면 왜 드라마에서는 조공 때문에 힘들어하는 장면들이 나왔는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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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잡습니다. 이렇게 조공을 하고 사대를 하는 것이 약소국에게 불리하기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조선은 오히려 명나라가 3년에 한 번만 오라는데도 1년에 세 번 가겠다고 주장할 정도로, 중국 진시황 때부터 시작된 중국과의 사대외교로 많은 실속들을 챙겼다고 합니다. 심지어 함경도 관찰사가 명나라 사신의 조공요구를 거절하기도 할 정도로 중국이 강할 때는 수그리고, 중국이 약할 때는 배짱부리는 식의 사대외교로 실리를 취했다는 것이지요. 물론 사대외교가 언제나 유리하지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물론 아주 악날한 황제 예를 들어 명나라의 흥무제나 영락제, 선덕제 등처럼 엄청난 양의 조공을 요구하거나 처녀들을 요구해 조선을 파탄과 비탄에 빠지게 한 중국의 황제들도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이를 부각해 드라마를 만든 것 같습니다.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8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국내외 다수의 학자들은 조공제도가 동아시아의 보편적 외교 질서라고 단정할 수 없다 해도, 조선-명 · 청 관계는 조공제도의 ‘이상적인 모델’이었다고 말한다. 조공체제의 ‘원칙’이 가장 잘 지켜졌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조선의 특수성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조선-중국 관계의 특징은 13세기 몽골의 동아시아 지역 정복이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몽골제국의 확장은 역사상 이례적인 것으로, 몽골은 의례적인 성격이 강하였던 조공을 지배 관계로 운영하였다. 고려-원 관계를 통해 중국과의 관계가 국가 존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강렬하게 경험한 고려인들은 고려 말 중국 대륙에 새롭게 떠오른 강국 명나라와의 관계도 중시하였다.

    고려 말에 정몽주는 모두가 가기 꺼려하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고, 정도전은 정몽주가 명나라에 다녀온 덕분에 고려 백성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고려 말~조선 초 관료들은 조공을 통해 국가안보를 지키고자 하였다. 그렇기에 중국으로 가는 조선 사행의 핵심 임무도 외교 문서 전달, 명나라의 정국 동향 파악 및 군사 동향 정보 수집이었다.

    원나라 이후 한중 관계가 변화한 또 하나의 주요 원인은 원나라 이후 중국의 수도가 조선과 매우 가까운 북경(北京)에 자리 잡았다는 사실이다. 북경의 위치는 조선에게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중국 입장에서도 조선이 지정학적으로 중요해진 계기가 되었다. 명나라는 몽골과 여진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과의 관계 조율이 필요하였다. 원제국 이후 이러한 2가지 변화는 한중 관계에서 양국 모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명나라가 초기에 조공 방식을 정립해 나갈 때, 고려와 몽골제국의 관계에서 시행되었던 전례들이 대거 참조되었는 점이다. 고려가 명나라에 조공 원칙에 대해 먼저 질문을 던지고 모범 답안까지 알려주었던 덕분이었다. 명 질서가 구현되기까지 다양한 제도와 관행은 명나라 혼자 구상한 것이 아니라 고려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되고 구체화되었다는 점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조선은 이렇게 구성된 조공 의례를 준수하였다.

    당시 여러 외국 사신들은 명나라에 조공하러 와서 상인(商人)처럼 물건 값 흥정에 열을 올려, 명나라 관료들의 공분을 샀다. 반면 조선은 수면 아래에서는 명나라 정국 동향에 대한 정보 수집에 철저하면서도, 조공 의례를 준수하며 품위와 예의를 갖추었다. 명나라는 그런 조선을 ‘예의의 나라〔예의지국(禮義之國)〕’라 부르며 외교적으로 다른 나라에 비해 우대하였다. ‘예의지국’이라는 국가 위상으로 외교적 우대를 받자, 조선은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에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조선은 명대 조공 질서를 외교 전략으로 충분히 활용하였던 나라였다.

    한편 청나라 시기의 조공 관계를 ‘모범적’이라고 보는 데에는 회의적인 시선이 강하다. 조선은 반청(反淸) 인식이 강하였고, 조공국이 수행하는 연호(年號) · 시호(諡號) · 역법(曆法) · 인장(印章) 등의 사용에서 결코 공순한 조공국의 태도를 견지하지 않았다. 물론 강국 청나라와의 안정된 관계를 위하여 사행 파견 등의 각종 절차에서 조공국의 의식을 따랐지만, 청나라에 대한 조공은 피상적인 것이었다는 연구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조공을 동아시아 전체의 보편적 외교 질서로 보기는 어렵지만, 한반도 나라들과 중국과의 외교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개념이 될 수 있다. 당시의 양국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중국과 만나는 조공의 의전을 인지하며, 국제질서의 전체 흐름과 각국의 내부 상황을 유기적으로 연관시켜 이해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조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