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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얀굴뚝새243
뽀얀굴뚝새24323.08.19

고종 때 임오군란이 발생한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요?

고종 즉위 1882년에 임오군란이 발생하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이 정변을 계기로 흥선대원군이 다시 집권을 하였다고 배운 바 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라고 하던데,

이와 같은 임오군란이 일어난 원인이 궁금합니다.

이해하기 쉽게 간단 명료하게 설명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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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오군란은 1882년 신신 군대와의 차별에 분노한 구식 군인들이 일으킨 난 입니다.

    조선 후기 신식 군인은 좋은 대우를 받은 반면 구식 군인은 1년 이상 쌀 배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던 중 구식 군인에게 겨와 모래가 섞인 쌀을 지급하려 하자 분노한 구식 군인들이 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82년(고종19년) 6월9일 훈국병들의 군료분쟁에서 발단해 고종 친정이후 실각한 대원군이 다시 집권하게 된 정변입니다. 1882년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군인들의 13개월 동안 체불된 임금을 정부가 저급불량 쌀로 지급하여 일으난 일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파들이 다시 득세하여 중전민씨와 외척들의 척결 및 비리척결 일본과 서양세력을 배척운동으로 전개되었으나 중전민씨를 놓친데다 청나라가 개입하면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876년(고종 13)에 맺어진 한 · 일수호조약(일명 강화도조약)으로 인해 대원군이 취한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의 대립이 날카롭게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왕의 친정으로 정권을 내놓은 대원군은 척족인 민씨일파를 내치고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고 있는 중이었다.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別技軍)이 급료와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는 데 비해 구식군대인 무위영(武衛營) · 장어영(壯禦營) 2영의 군졸들은 13달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다. 그러던 차에 겨우 한달치의 급료를 받게 되었으나, 그것마저 선혜청(宣惠廳) 고지기의 농간으로 말수가 턱없이 부족한데다 모래가 반 넘어 섞여 있었다. 이에 격분한 구식군졸들이 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당상(堂上) 민겸호(閔謙鎬)의 집으로 몰려가 저택을 파괴하고 폭동을 일으켰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난병들은 대원군에게 진정하기 위해 운현궁(雲峴宮)으로 몰려와 애소했다. 대원군은 겉으로는 난병을 달랬지만, 한편으로는 심복인 허욱을 시켜 그들을 지휘케 했다. 그리하여 군민의 불평은 대원군과 연결되어 민씨 및 일본 세력의 배척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군민들은 별기군 병영으로 몰려가 일본인 교련관 호리모토(掘本禮造) 공병소위를 죽이고, 민중과 합세하여 일본 공사관(서대문 밖 청수관)을 포위, 불을 지르고 일본순사 등 13명의 일인을 살해했다. 그러나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 등 공관원들은 모두 인천으로 도망쳐서 영국 배의 도움으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더욱 강력해진 군민은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영돈령부사 이최응(李最應) 등을 살해하고,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 돈화문 안으로 난입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궁녀의 옷으로 변장한 후 궁궐을 탈출, 충주 장호원(長湖院)의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했다. 사태가 위급함을 느낀 고종은 전권을 대원군에게 맡겨 반란을 수습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대원군을 불러들였다. 이리하여 왕명으로 정권을 손에 넣은 대원군은 반란을 진정시키고 군제를 개편하는 등 군란의 뒷수습에 나섰지만, 민씨일파의 청원을 받아들인 청나라가 재빨리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그의 재집권은 단명에 그치고 말았다.

    청나라는 이 난의 책임을 물어 대원군을 톈진(天津)으로 납치해갔으며, 일본은 조선정부에 강력한 위협을 가해 주모자 처벌과 손해 배상을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조약을 맺게 했다. 군변으로 시작된 이 난은 결국 대외적으로는 청나라와 일본의 조선에 대한 권한을 확대시켜주는 결과가 되었고, 대내적으로는 개화세력과 보수세력의 갈등을 노출시켜 갑신정변의 바탕을 마련해주었다.

    출처 : 한국근현대사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