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왕이라 불렸던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중세시대 잉글랜드의 왕이었던 리처드 1세는 사자왕이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는데요.
리처드 1세가 사자왕이라 불린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생애의 대부분을 전쟁터에서 보냈으며 그 용맹함으로 인해 사자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잉글랜드의 헨리 2세와 아키텐의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1살 때 모후로부터 아키텐 영지를 물려받았고 1172년 푸아티에 공작이 되었습니다.
당시 부왕 헨리 2세에게는 리처드를 포함해 모두 네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막내 아들 존에 대한 편애가 지나친데다 프랑스 국왕과 왕비 엘레오노르의 선동으로 인해 부자 및 형제 사이에 불화가 있었습니다.
1183년 리처드의 가혹한 통치방식에 불만을 품은 가스코뉴 주민들이 폭동을 일으키자 형인 젊은 헨리와 동생인 제프리가 이에 가세해 몰아내려고 했고 6월 11일 맏형 젊은 헨리가 갑자기 죽자 반란군은 와해되어버렸고 리처드는 반란을 진압했을 뿐 아니라 명실 공히 다음 보위를 물려받을 후계자가 됩니다.
그럼에도 아버지 헨리 2세가 왕위를 계승하는 조건으로 아키텐을 존에게 양도하라고 명하자 이제 반항, 거절했고 그는 자신이 태어나 자라왔던 고향을 내줄 생각이 없었습니다.
일단 아버지와의 화해를 했지만 지배권을 둘러싼 불만은 계속 남아, 1188년 헨리 2세와 프랑스의 필리프 2세가 한창 싸우던 중 리처드는 아버지를 배반하고 필리프와 합세, 1189년 힘이 다한 부왕이 시농에서 병사하며 그는 새로운 왕으로 등극합니다.
그는 9월30일 재위하자마자 십자군 원정에 참가하기로 결정, 왕실 금고나 세금, 병역 부담금만으로는 원정 비용을 충당할수 없어 성, 영지, 관직 등을 매매해 십자군 원정을 위한 자금을 모은 후 병력을 모아 함선을 타고 잉글랜드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원정을 갑니다.
제3차 십자군은 베로니카, 신성 로마 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도 십자군 원정에 참가했지만 프리드리히 1세는 한발 앞서 출발했다가 킬리키아에서 익사, 필리프 2세와는 중간까지 동행했다가 시칠리아섬에서 합류합니다.
그는 필리프 2세의 여동생 아델과의 약혼을 일방적으로 취소, 나바라의 안초 6세의 딸 나바라의 베렝가리아와 약혼하나 서로 반목해 이후 개별행동을 취하게 됩니다.
시칠리아에서는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 탕크레디가 리처드의 누이이자 전왕 구기에르무 2세의 미망인인 조안나의 유산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은데다 그녀를 감금해버자 10월 4일 메시나를 기습 점령해 탄크레드를 굴복시켰습니다.
시칠리아 왕과 메시나 조약을 맺어 탄크레드는 조안나에게 그녀 몫의 유산과 자유를 되찾아주고 리처드는 탄크레드를 시칠리아의 국왕으로 인정, 리처드의 후계자를 조카인 브르타뉴 공작 아서로 명기해 탄크레드의 딸과 결혼시키도록했습니다.
키프로스에서 약혼녀인 베렝가리아와 합류할 예정이었지만 비잔티움 제국의 키프로스태수가 그녀를 사로잡아 그는 비잔티움 제국군과 전투를 벌여 키프로스를 점령후 1191년 5월 12일 베렝가리아와 결혼,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 아이는 없습니다.
6월8일 리처드는 필리프 2세와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5세와 연합해 아크레를 공략하지만 레오폴트 5세의 깃발을 찢어 그를 모욕해 레오폴트 5세는 이러한 처사에 화를 내며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차기 예루살렘 국왕을 물색하던 리처드는 옛 신하이기도 한 기 드 뤼지냥을 내세웠지만 필리프 2세는 티레 방어전에 큰 공을 세웠던 코라도 델 몬페라토 변경백을 내세워 역시 대립, 결국 코라도는 예루살렘의 왕으로 선출되지만 즉위 직전 암살되어 리처드와 필리프 두사람 모두 조카에 해당되는 샹파뉴 백작 앙리 2세가 예루살렘 공주 이사벨과 혼례를 올려 왕으로 즉위, 그는 왕위 경쟁에서 밀려난 뤼지냥의 기에게 키프로스를 주어 위로했습니다.
필리프 2세는 이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해 병이 났다는 핑계로 프랑스로 돌아가고 이때문에 결국 단독으로 아이유브왕조의 영웅 살라딘과 1년간 싸웠지만 끝내 예루살렘을 정복하지 못하고 1192년 9월 십자군의 아크레 소유권을 인정한다는 것과 비무장한 그리스도인 순례자의 예루살렘 방문을 허락한다는 조건 하에 3년간의 휴전조약을 맺습니다.
미리 귀환해 있던 필리프 2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와 결탁해 리처드의 동생 존의 왕위 찬탈을 지원, 그는 그 음모를 듣고 귀로를 서두르나 도중에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당하여 베네치아 부근 해변에 상륙합니다.
그는 변장을 한 채 신분을 위장해 육로를 통해 잉글랜드로 향했지만 1192년 12월 빈에서 오스트리아 공작에게 사로잡혀 뒤른슈타인성에 유폐, 이때 왕제 존은 리처드가 죽었다고 공표하고 왕위에 오르려 하지만 영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해 단념합니다.
1193년 그의 신병은 레오폴트 5세에게서 하인리히 6세에게로 양도, 하인리히로부터 필리프에게 넘겨버리겠다는 협박에 굴복해 그가 제시한 터무니 없는 조건을 모두 받아들여 15만 마르크라는 막대한 몸값을 지불함과 동시에 나라 전체를 신성로마제국에 양도했다가 봉토로서 되돌려 받았습니다.
존과 필리프는 리처드의 석방을 늦추기 위해 하인리히와 교섭하나 리처드와 하인리히 간에 교섭이 성립됨으로 그는 1194년 2월 풀려났고 이때 필리프 2세는 존에세 서신을 보내 조심하라 일러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석방된 후 잉글랜드로 돌아와 존을 굴복시켜 왕권을 회복하나 다시 캔터베리 재두교 휴버트 월터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고 필리프 2세와의 전쟁을 위해 프랑스로 가는데 이 시기 그는 노르망디 방위를 위해 중공의 선진 요새 구축 기술을 도립한 것으로 유명한 사나이 마 시로를 쌓았습니다.
1199년 리모주 자작령 샬뤼 성을 공격하던 중 석궁에 맞아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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