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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어항상영후니
기대어항상영후니23.08.18

독일은 2차대전에 대한 책임을 어떻게 졌는지 궁금합니다.

그렇게도 전세계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슬픔과 고통을 안겨주었던 세계 2차대전. 이 전쟁의 원흉인 독일. 그들은 전쟁의 책임을 전쟁 후 다 이행했나요?다른 국가들에게 전쟁에 대한 어떠한 보상을 해주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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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독일의 배상문제는 흐지부지되었으며, 독일은 배상은커녕 미국의 대소봉쇄 전진기지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독일 경제 부흥(흔히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의 원동력 가운데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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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독일제국의 침략으로 피해를 입은 국가들에게 사죄의 뜻을 전하고 금전적인 보상을 해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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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독일은 2차 세계 대전의 책임을 다음과 같이 졌습니다.


    나치의 전쟁 범죄에 대한 처벌: 1945년 11월부터 1946년 10월까지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나치의 주요 인사들은 전쟁 범죄, 인도에 반하는 범죄, 평화 파괴 죄 등으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교수형, 종신형, 징역형 등 다양한 형벌을 선고받았습니다.

    영토의 손실: 독일은 2차 세계 대전의 패전으로 인해 영토를 많이 잃었습니다. 동쪽으로는 폴란드와 소련에, 서쪽으로는 프랑스와 벨기에에 영토를 할양했습니다. 또한, 베를린은 4개국으로 분할되었습니다.

    재정상의 부담: 독일은 2차 세계 대전의 피해에 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이 배상금은 총 1320억 마르크에 달했습니다. 이 배상금은 독일의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정치적 변화: 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은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되었습니다. 또한, 독일은 유럽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독일은 유럽연합의 창립 멤버국 중 하나이며, 유럽연합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독일은 2차 세계 대전의 책임을 지고, 민주적인 국가로 재건되었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아요 & 추천 부탁드려요 ~좋은 하루 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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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쟁 후 파리에서 연합국 배상위원회가 설립, 배상이 확인 되느 것은 소련에 51년 1월 ~53년 말까지 6억 1400만불을 지불하고 670여개의 기업을 해체해 가져갔고 미국과 영국은 독일 군수산업 해체와 해외 자산을 압류했습니다.

    독일이 1945년부터 1953년까지 각국에 지불한 총액의 가치는 1680억 달러, 1953년 이후 이스라엘에 1965년까지 34억 5000만달러, 유럽 국가에 1960~1973년까지 11억 8600만 달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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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독일은 우선 막대한 전쟁 배상금 을 물게 됩니다. 워낙 많은 금액이라서 전쟁후 약 70년에 걸쳐서 갚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독일 총리를 비롯한 독일 공식 언론등은 2차 대전 피해 당사국들에게 참회하고 용서를 빌기도 했습니다. 아프리카 국가들에게는 별도로 배상금을 지급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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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순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EAC는 "독일 점령지역 및 대베를린 행정에 관한 의정서"[4]에 1944년 9월 12일 가서명하였으며, "독일 통제기구 협정"에 대해서도 동년 11월 14일 의결한다. 전자의 의정서는 점령지간 경계선을 결정하고, 베를린에 4대국 공동점령지구(동베를린 및 서베를린으로 갈리게 된다)라는 특수한 지위를 부여한다. 후자의 협정에서는 연합국 통제위원회(이하 "통제위")"를 설치하기로 합의한 협정이다. 통제위는 전 독일에 대한 통일적이고 사무를 관장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조정불가능한 반대에 부딪힐 경우엔 각 군사정부사령관은 자국 정부 지시에 따라 독자 행동을 할 수 있는 권한을 아울러 부여받았다.


    독일이 항복하고 몇 달되지 않아, 점령지역이 제각기 흩어진 사태 발전의 법적 근거는 바로 이 조항이었으며, 결정적인 문제는 배상문제였다. 배상문제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나라는 역시 소련이었다. 소련은 1945년 1월에 전쟁으로 파괴된 서부 공업지대에 대한 복구를 위해 미국에 60억달러의 차관을 요청했다가 거절당하자, 독일에 대한 배상요구로 이 수요를 충당하기로 했다.


    얄타 회담에서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배상위원회가 설치되었고, 배상총액과 분배의 해결방안에 대하여 여러 가지 제안들을 검토하게 되었다. 그러나, "검토"는 했으되, 명확하게 결정된 것은 없었다. 소련의 과도하게 보이는 요구(총 100억달러 요구)와 미국의 반대때문이었는데, 배상문제가 전독일적 차원에서 해결될 것인지, 아니면 각 점령지구내에서 알아서 해결할 것인지도 결정하지 못했다.


    한편, 트루만, 처칠, 스탈린 등은 점령기간동안 독일을 "경제적 통일체"로 다루며 독일중앙정부는 "당분간" 구성하지 않으나, "재정/운송/교통/무역/공업"의 분야를 다룰 "몇 개의 중앙행정기구"를 설치할 것에 합의하였다. 물론 이 "몇 개의 중앙행정기구"는 통제위의 감시를 받도록 규정했다. 이것은 소련의 독일정책에서 "全獨逸(gesamtdeutsche)" 입장과 연관되는 것이며, 소련의 배상요구와도 관련있었다[5]


    배상위원회는 5월 이래 배상문제에 대해 아무런 합의를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이 주로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소련은 배상위원회의 합의여부에 상관없이 자신들이 "해방"한 동구 국가들 내의 독일 자산에 대한 압류 처분과 독일내 소련 점령지구에서 각종 물자 및 산업시설을 소련으로 운송하기 시작했다. 이 운송작전은 1954년에야 끝난다.


    스탈린은 또 루르 공업 지대를 4대국 공동관할구역으로 지정하자고 제안했으나, 점점 노골화하는 소련의 팽창주의적 정책에 신경을 곤두세우던 서방진영은 그의 대담한 제안을 거절한다. 스탈린의 제안은 서유럽의 중심지역에 소련의 영향력을 부식시키는 것으로, 서방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배상문제는 이렇게 아무런 합의를 보지 못한 채 시간만 축냈으며, 그 사이에 동서 양 진영 사이에서는 냉전이 시작되었다. 서방 점령지구들은 점차 하나의 Bloc을 형성하기 시작했고, 소련 점령지구도 똑같은 수순을 밟았다. 트루만은 1947년 그리스와 터키 문제에 대한 개입을 계기로 이른바 "트루만 독트린"을 발표했고, 마샬 플랜이 발표되었다. 마샬 플랜에는 독일과 동유럽도 포함되었으며, 소련은 서방의 영향력이 침투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거부한 채 코메콘을 결성한다.


    이 와중에서 독일의 배상문제는 흐지부지되었으며, 독일은 배상은커녕 미국의 대소봉쇄 전진기지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미국으로부터 많은 원조를 받게 되었다. 이것이 독일 경제 부흥(흔히 "라인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의 원동력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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