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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오깨무르프423
모리오깨무르프42323.08.27

일본으로 납치되어간 도자기 기술자들의 생활여건은 괜찮았나요?

조선시대 일제는 우리나라의 도자기에 엄청 관심이 많고 욕심을 부렸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특히 임진왜란,병자호란을 거쳐가면서 다수의 도자기공들을 잡아갔다는데요.

이들의 근무여건이나 생활여건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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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27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일반 조선인이 노예화되었던 것과는 달리 도공들에 대한 예우는 좋았다고 합니다.

    다도 문화가 발달하여 훌륭한 도자기를 얻는 것에 혈안이 되어 있던 각 다이묘들은 이들을 장인으로, 솜씨 좋은 기술자는 사무라이 수준으로 후하게 대접해줬기 때문입니다. 그걸로 끝이 아니라 아예 뛰어난 도공에게 자기 딸을 내주며 사위로 삼아 친인척을 만들어버린 경우까지 있었습니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령이 내려져 다이묘의 비호를 받지 못하게 된 이후에도 수 세기간 구축한 세력으로 독자적인 장인 가문을 만들어 지역에서 대접받으며 계속 대를 이을 수 있었습니다. 이삼평 등 도공들 중에서는 이러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대에 와서도 일본 전역에 조선 도공의 후예로 자처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한국 언론에도 소개된 사람으로는 심수관이 있습니다.

    다만 도공이라고 해서 모두 좋은 취급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끌고 간 도공들 중에서 재주가 없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밥을 주지 않아서 굶겨죽였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또한 기술이 새어나갈까봐 조선인 도공들이 사는 마을은 엄격하게 감시했고 혼인도 다른 마을과 못하게 막았다고 하였습니다.일본에서 굶어죽은 조선인 도공들 그 외에도 두부 장인 아키츠키 타네노부 등이 일본에 정착하였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솜씨 좋은 기술자는 사무라이 수준으로 후하게 대접했으며 뛰어난 도공에게 자기 딸을 내주며 사위로 삼아 친인척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메이지 유신 이후 폐번령이 내려져 다이묘의 비호를 받지 못하게 된 이후에도 수 세기간 구축한 세력으로 독자적인 장인 가문을 만들어 지역에서 대접받으며 대를 이을수 있었습니다.

    다만 도공이라 해서 모두 좋은 취급을 받은 것은 아니었는데, 끌고 간 도공 중 재주가 없는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밥을 주지 않아 굶겨죽였다는 이야기가 있고, 기술이 새어나갈까봐 조선인 도공들이 사는 마을은 엄격하게 감시, 혼인도 다른 마을과 못하게 막았다고 합니다.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많은 조선인들을 해치고 국토를 파괴한 것은 물론,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하고 여러 분야에서 솜씨 좋은 장인들을 붙잡아갔다. 특히 조선의 도공들은 임진왜란 중에 대규모로 일본에 끌려갔다.


    당시 일본은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이 떨어져 조선처럼 아름다운 자기를 만들어 내지 못했는데, 혼란스러운 전쟁을 이용해 솜씨 좋은 조선의 도공들을 납치해 간 것이다. 이삼평도 임진왜란 때 끌려간 도공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삼평은 함께 끌려간 도공들을 이끌고 일본의 아리타에 가마를 만든 뒤 처음으로 백자를 구워 냈다.


    이 도자기는 ‘아리타 도기’라는 이름으로 일본 곳곳에 퍼져 나갔고, 아리타는 일본의 도자기 중심지가 되었다.


    이후 이삼평은 다른 조선인 도공들과 함께 이곳에서 품질 좋은 도자기를 생산하고 기술을 개발하다가 1656년에 죽었다. 죽은 후에 이곳에서는 이삼평을 도조(도자기의 시조)로 떠받들고 있다.

    임진왜란 때 납치된 도공들의 숫자는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일본은 이들이 가진 기술을 바탕으로 도자기 산업을 발전시켰고, 17세기 중엽 이후에는 유럽에까지 수출해 ‘일본은 도자기의 나라’라는 명성을 얻었다.


    반면 솜씨 좋은 대부분의 도공을 빼앗긴 조선은 점점 도자기 문화가 후퇴했다.

    출처 : 한국사 사전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