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나선정벌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조선시대 나선정벌이 있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나선정벌은 어떤나라와 벌인 것인가요?
어떠한 이유때문에 일어난 사건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효종 때 조선이 청나라를 도와 러시아와 싸운 사건을 말합니다. ‘나선’은 러시아 사람들이란 뜻이며 나선 정벌은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고 조선군은 러시아 군과 싸워 승리한 뒤 돌아왔습니다. 러시아와 청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데 그동안 러시아는 국경 지대인 우랄 산맥을 넘어 헤이룽 강 부근을 왔다 갔다 하며 청의 모피나 가죽 등을 자주 약탈했으며 러시아는 모피를 유럽에 팔아 큰 돈을 벌어 들였습니다. 나중에는 청의 땅에 대놓고 요새를 쌓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집하는 바람에 부근의 청 주민들과 충돌이 생길 정도였지요. 3년 동안 청군은 러시아군을 공격해 내쫓으려고 했지만 번번이 패하기만 했고 결국 참다못한 청은 만주와 가까운 조선에 지원병을 요청을 하게 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효종(봉림대군)은 북벌을 계획하여 군사를 훈런시켜 오던 중 청황제로부터 파병을 요청받게 됩니다. 병지호란으로 소현세자와 세자빈과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던 효종은 소현세자 사후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비밀리에 북벌을 계획하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나선은 러시아를 일컫는 이름으로 러시아의 남하정책으로 골머리를 앓던 청황제가 도움을 요청한 것입니다. 효종은 두 차례의 나선정벌에 혁혁한 공을 세운 포수들에게 큰 상도 못내리고 치하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긴했으나 그동안 준비해왔던 전력을 시험해보는 계기가 된 것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청과 러시아의 국경 분쟁 과정에서 효종 때 청의 요청으로 파견되어 러시아를 공격한 사건을 말합니다. 1차는 1654년 조총군사 100명과 기고수 50여명을 출정하여 영고탑 일대에서 러시아군을 정벌하였습니다. 2차는 1658년 조총군 200명과 초관, 기고수 60명이 출정하여 영고탑과 흑룡강 일대에서 러시아군을 정벌하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나선정벌은 조선 효종 때 조선이 청의
요청으로 러시아를 공격한 사건으로
이들은 흑룡강(黑龍江)주2 방면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어서, 1651년(효종 2) 흑룡강
우안(右岸)의 알바진(雅克薩) 하구에 성을
쌓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집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면서 부근의 수렵민들과
분쟁이 생기고 청나라 군사와 충돌하게
된 사건입니다.러시아 정벌은 효종의 즉위 후부터 준비해왔던 북벌계획을 간접적으로
실현한 결과물이며, 이 때 비록 적은 수의
군사를 보냈으나 큰 전과를 올리게 된 것은
당시 사격술과 전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나선정벌은 조선 효종 때 조선이 청나라를 도와 러시아와 싸운 사건으로 나선은 러시아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들은 흑룡강 방면의 풍부한 자원을 탐내어 1651년 흑룡강 우안의 알바진 하구에 성을 쌓고 그곳을 근거지로 삼아 모피를 수집하는 등 활동을 전개해 부근의 수렵민들과 분쟁이 생기고 청나라 군사와 충돌하게 됩니다.
이듬해 러시아인들이 다시 오소리강 하구에 내려가 성을 쌓고 송화강 방면으로 활동 범위를 넓히는데 이에 청나라에서는 영고탑에 있는 군사를 보내 공격, 축출을 시도 , 그러나 구직 장비의 청군으로서는 총포를 가진 러시아군을 당하지 못해 번번히 패하게 됩니다.
이에 청나라에서는 조선 조총군의 위력을 잘 알았으므로 1654년 2월 청나라 사신 한거원을 보내 조총군사 100명을 뽑아 회령을 경유, 3월 10일까지 영고탑에 보내주도록 요구합니다.
조선 정부에서는 영의정 정태화의 의견에 따라 함경도병마우후 변급에게 조총군 100명과 초관, 기고수 등 50여명을 거느리고 출정하도록 했고, 그 해 4월 영고탑에 도착한 조선 조총군은 청나라 군사와 합류, 흑룡강 방면으로 떠났으며 20일 왈가 지방에 배를 타고 후통강으로 내려갑니다.
28일 흑룡강으로 거슬러 올라오는 러시아군을 만난 조선 조총군들은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적군의 기세를 꺾고 계속 추격, 적군은 7일 만에 도망, 조선 군사는 전승을 거두고 5월 16일 회군해 6월에 본국으로 개선하였느데 이것이 제 1차 정벌이었습니다.
그 뒤에도 러시아군이 흑룡강 방면에서 계속 활동하고 이에 대한 청나라 군사의 출정이 자주 실패로 돌아갔으며 1658년 3월 청나라에서 다시 사신을 보내 조선 조총군의 파견을 요청, 이에 혜산진첨사 신류를 대장으로 삼아 조총군 200명과 초관, 기고수 등 60여명을 거느리고 정벌에 나섰습니다.
조선 군사들은 5월 영고탑에 들어가 청나라 군사와 합류, 흑룡강에 나아갔고 6월 송화강과 흑룡강이 합류하는 곳에서 러시아 군사를 만납니다.
러시아 측에서 큰 배 10여척에 군사를 싣고 당당한 기세로 공격하고 육상에서도 적군이 공격을 해오자 청나라 군사는 나아가지 못하나 조선 군사가 나아가 화전으로 적선을 불태우자 흩어지게 됩니다.
이 전투로 흑룡강 방면에서 활동하던 러시아 군사의 주력이 거의 섬멸, 조선 측에도 8명이 전사하고 25명이 부상, 이들은 청나라의 요청으로 얼마 동안 송화강 방면에 머무르다 그 해 가을 영고탑을 거쳐 개선, 이것이 제 2차 정벌입니다.
2차에 걸친 러시아 정벌은 효종의 즉위 후부터 준비해왔던 북벌계획을 간접적으로 실현한 결과로 이때 비록 적은 수의 군사를 보냈으나 큰 전과를 올리게 된 것은 당시 사격술과 전술이 뛰어났음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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