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고갱은 인종차별주의자였나요?
폴 고갱의 말년의 삶을 보면 타히티에서 살았는데, 생계를 위해 지역신문에 논설을 게재했다고 해요. 그 논설 내용이 중국인 이민자들에 대한 독설이었다던데, 인종차별로서 말을 한것인지 당시 일부 부도덕한 중국인을 비평한 것인지 알고싶어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작품 자체보다 타히티에서 타계한 은둔 예술가로 대중의 관심 끌어
고갱의 말년은 조용한 은둔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계를 위해 그 지역의 신문에 발표한 논설에는 중국인 이민자들을 향한 인종차별적인 독설이 가득했다. 원시의 순수함을 동경하던 고갱이었지만, 식민지의 백인으로서의 고정관념을 떨치기는 어려웠던 까닭이다. 1901년, 고갱은 타히티를 떠나 거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문명화된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 섬으로 거처를 옮기지만, 식민지의 백인 관료와 선교사의 전횡을 목도하고 이를 고발하여 법정 다툼을 벌이다 패소하고 만다. 이후 건강 악화로 한 달 넘게 병상에 누워 있던 고갱은 1903년 5월 8일에 마침내 사망한다.
데이비드 스위트먼은 고갱이 대중적인 성공보다도 동료 화가들의 인정을 바랐지만 평생 그 소원을 이루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수집가 출신의 배부른 아마추어 화가 정도로 치부했던 것이다. 작품 자체보다도 극적인 생애 때문에 오히려 더 주목 받는 반 고흐와 마찬가지로, 고갱 역시 작품 자체보다도 오히려 타히티에서 사망한 은둔 예술가라는 전설이 널리 퍼지면서 대중의 관심을 끈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고갱의 그림에 나타난 강렬한 색채와 자유로운 형태는 인상주의를 탈피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훗날 야수파와 표현주의, 그리고 추상예술의 대두에 선구 역할을 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폴 고갱 [Paul Gauguin] - 프랑스의 후기인상파 화가 (인물세계사, 박중서)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타이티는 고갱의 안식처이자 동경의 대상이었고 작품의 영감과 쾌락을 주는 곳이었으나 파리생활에 익숙했던 그가 평생 살만한 곳은 아니었으며 그는 타이티 생활 몇달만에 고독과 향수를 느끼며 돈도 떨어져 다시 프랑스로 돌아갑니다.
2년 여의 타이티 생활 동안 그린 그림들이 파리의 미술계에 충분한 반응을 일으킬것이라 예상하나 현실은 녹녹치 않았고, 제목에 붙은 타이티어를 보고 평론가들은 유치한 것이라 비난까지 합니다.
인도와 말레이 혼혈 여성 안나 라 자바네즈를 모델 겸 애인으로 삼아 새로운 창작욕구를 불태우나 이 여성과도 여러 문제로 관계가 파탄나고 전시회 등의 실패로 좌절을 느끼며 다시 타이티로 돌아갑니다.
다시 돌아간 타이티 생활은 궁핍, 좌충우돌이었으니 정치싸움에 끼어들어 타이티에 건너온 중국인들을 비난하는 글을 기고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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