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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왜 연개소문 사후 급격히 무너진걸까요?

역사공부를 하다보면 고구려의 힘은 정말 강했던걸로 알려져있는데요

연개소문이 죽고나서부터 고구려가 급격히 무너져보입니다.

그렇게 강했던 국가가 한사람이 사라졌다고 무너질 수 있는건가요? 왜 그렇게 급격히 무너진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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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답변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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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간여행자75
    시간여행자75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구려는 엄밀하게 말하면 부족국가입니다.

    중앙집권적 체계가 있었지만, 각 가문을 지역의 책임으로 두고 운영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 5개의 연맹체였는데 계루부, 소노부, 관노부, 절노부, 순노부의 5부족이었고, 그 부족의 장을 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가들이 모여 국정을 논의하는 제도를 제가회의라고 했습니다. 원래 왕을 선정할 때 소노부에서 선출식으로 배출하였었으나 태조때부터는 계루부 고씨만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고정되었습니다. 그러다가 5부족제를 고국천왕 때 없애고, 5부제를 실시함으로써 왕이 있는 지역을 중부(계루부)를 중심으로 동(순노부), 서(절노부), 남(관노부), 북(소노부)으로 나누어 다스렸습니다. 왕위를 하나의 가문에서만 이어가는 중앙집권적 모양세를 갖추었지만, 5부제로 각 지역은 권력을 가진 가문이 책임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명칭이 방위로 바뀐 것은 중앙집권적 흔적이라고는 하나 고구려 말기에도 각 가문의 세력은 왕권을 위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가문이 연개소문이 속한 동부가문입니다. 연개소문은 동부대인 연태조의 자제로 연태조는 신선에 가깝다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의 대단히 명망있는 가문이었습니다. 이에 높은 벼슬과 권력을 가지고 있었고, 연개소문이 조의(무사집단) 출신이었기에 원래는 고구려의 수련집단(종교적 색채)이었으나 연개소문이 권력의 최상층에 오르고 난 후에 공식적으로 조의라는 이름을 감추고 선인은 최하위관등제에 위치하였으나, 조의는 동부가문의 사병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듯 힘을 가진 연개소문은 군부의 강경세력과 함께 중원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생각이 강했고, 온건파들이 당에 고개를 숙이고 평화만을 부르짓는 것과 극렬하게 대치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온건파였던 영류왕도 장년, 원로대신들과 짜고 연개소문을 제거하고자 하였고, 천리장성을 쌓는 것을 감독하라는 것을 빌미로 연개소문을 변방으로 보내 그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계략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계략을 눈치 챈 연개소문이 역으로 연관된 관료들을 모두 죽이고, 평양성으로 군사를 밀고 들어가 영류왕도 죽이게 되고, 새로이 보장왕을 옹립하게 됩니다. 이후 연개소문은 대막리지에 오르게 되고 그를 중심으로 한 고구려군은 당시 최강이었던 당과의 1, 2차 전쟁에서 모두 승리하였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도 나이가 들게 되었고 666년 사망하게 되었고, 그가 걱정하던 자신의 세 아들들의 반목에 의해 장자인 연남생이 당에 귀화하게 되고 역으로 그를 앞세워 신라와 함께 공격해왔고, 고구려 지도층의 내분이 격화되어 결국 그가 사망한 지 2년 뒤인 668년에 고구려는 안에서 먼저 허물어지고 속이 텅 비어버려 당과 신라의 공격에 무너지게 됩니다.

    연개소문은 왕의 시해한 역적이라는 손가락질도 받았지만, 대막리지인 군통수권자로서, 그리고 장군으로서의 지휘력, 전투력으로 볼 때 적군에게 사기를 떨어뜨릴 수 있는 두려움의 존재였던 것입니다. 연개소문이 살아생전 백제도, 신라도, 당도 고구려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함께 했던 장수들도 연개소문만큼이나 강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고, 그의 부하였던 검모잠이 보장왕의 아들 안승을 내세워 고구려부흥운동을 벌였으나 내분이 일어나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망명했습니다.

    다만 대중상과 그의 아들 대조영과 말갈족 걸사비우가 고구려유민과 말갈인을 중심으로 동모산에서 건국하고 진국이라 명하였고, 고구려를 계승했다고 하여 고려라고도 불리었다고 합니다 이후 당에서 대중상을 진국공으로 봉하였다고 중국측 사료에 있으나, 그것으로 중국의 영향력을 받는 속국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고, 진정한 국가체제를 갖추고 대조영이 태조가 된 이후로는 당에서 발해군왕이라고 책봉하면서 발해라고 불리었으나 대조영이 그 책봉을 받았다고 보기는 어렵고 당이 그 지역을 자신들의 권역이라고 넣고 싶어 대조영과 진국을 인정하면서 마음대로 책봉서를 보냈다는 것이 합당한 듯 합니다. 일본과의 국서에도 3대 문왕까지도 '고려의 왕 태흠무가 말한다'라고 썼고, 일본에서 파견한 사신도 고려사라고 한 것으로 보아 이후 국제적으로도 첫 국호는 고(구)려, 이후 해동성국 또는 대진국라고 혼용했던 것으로 보이고 당이 세력을 크게 가지고 있었으니 외교적으로 관계한 나라에서는 발해로 알려졌을 것이라 봅니다.

    어쩌면 무너진 고구려가 다시 대진국으로 거듭났고, 그 영토 역시 고구려 이상으로 확장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쓰는 황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으니 새로운 고구려가 탄생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듯 합니다.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구려는 강한 군사력을 가진 국가였으나 연개소문 사후 연개소문의 아들인 연남생과 연남건의 갈등으로 인한 내분으로 급격히 힘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굳건했던 성문도 손쉽게 열려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희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연개소문 사후 급격히 고구려의 정세가 나빠지고 마침내 멸망으로까지 이어진 것은 의문을 가지신 바와 같이 연개소문이라는 탁월한 지도자의 사망 하나만으로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우선, 고구려의 내부적 상황 자체가 좋지 않았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중국과의 오랜 전쟁으로 인해 국력이 많이 소진된 상태였습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고구려는 수,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는 했으나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토지 황폐화나 많은 인구가 피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또 군사력도 저하되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강력한 지도자가 있어도 중흥할 수 있을지 말지한 상황에서 연개소문의 죽음은 나라에 혼란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연개소문 사망 후 연개소문의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왕위다툼으로 인한 혼란이 일어나 국가적인 분열이 일어나게 됩니다. 즉 연개소문이 구축해 놓은 강력한 왕권이 흐트러지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왕위다툼에서 실각한 연남생이라는 인물은 결국 당나라로 가 도움을 요청하였고, 실제로 연남생은 이후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하는 과정에서 앞장서기까지 합니다.

    한편, 단순히 연남생의 말만 듣고 중국이 고구려를 침공을 한 것은 아닙니다. 대외정세 또한 고구려의 멸망에 중요하게 작용하였습니다. 이 즈음하여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연합으로 영토를 소실할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따라서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대항하기 위해 당나라에게 연합을 요청하였고, 당나라 역시 고구려를 계속 침공해 온 전적이 말해주듯 연합을 수락하고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침공할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이른바 나당연합이 결성된 뒤 나당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며, 마침내 평양성을 함락(668)시키며 고구려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답변이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