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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가오리188
즐거운가오리18823.06.01

백제 부흥운동시 왕자 풍에 대해 궁금합니다

백제 부흥운동시 복신과 도침은 주류성에서, 흑치상지는 임존성에서 군사를 일으켰고 이때 일본에서 왕자 풍을 데려와 왕으로 추대했다고 하는데

왕자 풍은 몰락한 백제 왕족이 일본에 건너가 있던 건가요? 왕자 풍은 어느 나라 사람이고

백제 사람이라면 왜 일본에 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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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6.0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제가 멸망한 뒤 660년에서 663년까지 왕족·군인 등이 중심이 되어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던 부흥운동.

    *역사적 배경

    660년 신라 김유신(金庾信)의 5만군은 육로로,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의 10여만 군사는 해로를 통해 각각 백제를 공격해 왔다.

    나당연합군이 백제의 수도 사비성(泗沘城: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으로 쳐들어오자, 백제의자왕(義慈王, 641∼660)은 태자 효(孝)와 함께 웅진성(熊津城: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으로 피난하고, 제2왕자 태(泰)가 남아서 사비성을 고수했으나 전사자 1만여 인을 내고 패하였다.

    나당연합군은 이어 웅진성을 공격, 함락시킨 뒤 당군은 왕과 왕자를 비롯해 정부고관 90여 인, 군인 약 2만 인을 포로로 삼아 해로를 통해 귀환하고, 신라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 654∼661)도 이 해 10월에 회군하였다. 백제 영토 안에는 당군 1만인과 신라군 7천인이 남아서 지켰으며, 당나라는 백제 영토 내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어 군정(軍政)을 실시하였다.

    백제부흥군 역시 일본으로부터의 지원군이 도착하지 않아 고전을 하고 있었다. 이듬해인 662년 5월이 되어서야 왕자 풍과 함께 170척의 병력과 무기·군량 등을 실은 일본 지원군이 도착하였다. 이에 용기를 얻은 복신은 다시 금강 동쪽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기세를 크게 떨쳤다. 662년 말 복신과 왕자 풍은 주류성에서 피성(避城)으로 본영을 옮겼다가 663년 2월 주류성으로 되돌아왔다.

    이 무렵 복신은 도침과 의견이 엇갈려 도침을 살해하였다. 두 사람은 백제부흥운동의 초창기부터 힘을 합쳐온 동지들로서 도침은 영차장군(領車將軍), 복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으로 칭하면서 일해 왔었다. 도침이 살해됨으로써 부흥운동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당나라는 손인사(孫仁師)에게 7천의 병력을 주어 백제부흥군을 치게 했고, 신라 역시 출병하였다.

    이러한 위기에 복신과 왕자 풍 사이에 다시 불화가 일어나 풍은 복신을 살해하였다. 백제부흥운동의 주역인 복신이 죽고 나당연합군이 부흥운동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공격하자, 왕자 풍은 고구려로 도망가고 일본 구원군은 백강에서 크게 패했다. 이로써 백제가 멸망한 660년부터 663년 9월에 걸쳐 일어났던 백제부흥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백제부흥운동의 실패 원인은 크게 3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부흥운동군 내부의 다툼으로 인한 세력약화이다. 복신이 도참을 살해한 이후, 다시 부여풍과 복신의 주도권 갈등이 이어졌다. 결국 663년부여풍이 복신 마저 처형하게 됨으로써 부흥군내부의 갈등이 증폭되었다. 이에 따라 일부는 당에 투항하고 또 다른 일부는 부여풍에게 합류를 거부하게 됨으로써 백제부흥군은 급속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고구려와 왜의 지원이 실패로 돌아간 점이다. 고구려는 당과의 전쟁으로 인한 백제를 직접적으로 지원해 주기 어려웠다. 그나마 파견됐던 지원군 역시 손인사(孫仁師)의 당군에게 궤멸되었다. 왜의 지원은 주지하다시피 백강전투에서 전멸함으로써 더 이상의 지원은 불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셋째로는 경제적 기반의 상실이다. 부흥군은 초기 백제 남부 평양지대의 농업생산을 바탕으로 물자를 원활히 공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지역이 신라에게 넘어가고 왜로부터의 군량지원도 끊기게 되자 부흥군의 물자부족은 급속히 확산되었고 이것이 지속적인 부흥운동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제부흥운동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보니 '왕자 풍'은 4세기 말 백제 말기에 벌어진 일이며, 일본의 신라계 왕권가들이 백제의 왕위 계승자나 귀족들을 방출하여 일본에 거주시키는 일을 말합니다. 이는 일본에서 백제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였습니다.

    '왕자 풍'으로 인해 백제의 왕족과 귀족들은 일본에 많이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일본에서 신라계 권력자와 결혼하거나, 일본의 권력자들과 연계하여 백제에 대한 침략을 준비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왕자 풍'은 백제의 몰락과 일본의 대국주의적인 의도로 이루어진 일련의 사건으로 볼 수 있습니다. '왕자 풍'으로 인해 백제의 권력이 약화되고, 일본의 관심도 백제로 이동하게 되어 일본의 백제 침략이 가속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습니다. 참고하셔서 도움 되셨길 바래요 ^^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부여풍은 백제 사람이며 의자왕의 아들로 왜와의 우호관계를 위해 파견되어 체류하다가 660년 백제가 멸망하자 우호관계를 유지 하던 왜로 도망가서 텐지 천황과 보황녀가 지원해준 왜군을 대동하고 귀국, 복신이 이끄는 부흥군에 의해 백제왕으로 추대되었으나, 663년 백강 전투에서 부흥군이 나·당 연합군에게 패배하였던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