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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든 하나라도 배우자
언제 어디서든 하나라도 배우자23.07.17

발해는 어떻게 나라를 세우게 됩니까?

발해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난 후 건국된 국가인데요 어떻게 나라를 세웠는지 어떤 민족을 바탕으로 세웠는지 궁금합니다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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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사를 해본 결과 발해는 698년 고구려 유민 대조영이 요동반도에서 건국한 국가입니다. 대조영은 고구려의 장군 고연수의 아들로, 고구려가 멸망하자 요동반도에 남아 있던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발해를 세웠습니다. 발해는 고구려의 전통을 이어받아 강력한 국가로 발전하였으며, 한반도와 만주, 시베리아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습니다. 발해는 926년 거란의 침입으로 멸망하였으나, 고구려의 문화와 정신을 이어받아 한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낸 중요한 국가였습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주축으로 세워졌습니다. 고구려 유민들은 고구려의 전통적인 문화와 정치제도를 이어받아 발해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말갈족은 발해의 군사력을 주도하였으며, 발해의 영토 확장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이 서로 협력하여 강력한 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 하셔서 도움되시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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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698년 고구려 옛 수장인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합니다.

    대조영은 당나라에 의해 지금의 중국 랴오닝성 차오양에 해당하는 요서 지방의 영주에 강제로 옮겨가 살았고, 영주는 당나라가 동북쪽 이민족을 통제하던 거점 도시로, 주변 지역에 귀순해 오거나 강제로 끌려온 이민족이 많이 거주했습니다. 이러한 이민족은 고구려 유민을 비롯해 거란족, 해족, 말갈족 등이었습니다.

    당나라는 변경 이민족 지역에 기미주를 두고 지배했는데 요서와 요동지역에서는 나당전쟁 이후 기미 지배 체제가 제 기능을 못했고 682년 동굴궐 제국이 재건에 성공하자 동북지역 여러 민족의 반당 활동을 자극합니다. 693년 흑수말갈과 실위의 반란이 있었고 696년 요서에서 거란족을 중심으로 해족, 고구려 유민, 말갈족 등 여러 민족에 연대한 대규모의 반당 전쟁이 일어나 요동지역으로 확대되었습니다.ㅣ

    696년 5월 거란족 수장인 이진충과 손만영이 영주 도독의 가혹한 통치에 불만을 품고 반기를 들었고 이들은 유주와 허베이 지역을 공격해 당나라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이 반란에는 영주에 거주하던 대조영 집단도 참여했습니다.

    허베이 지역으로 남하하던 거란족 중심의 반당 세력은 이듬해 겨우 진압되나 요동지역의 반당 세력은 친당 세력을 압도하며 안동도호부가 있던 신성, 요동성, 마미성 등의 전투에서 상당한 세를 떨쳤으므로 당나라는 걸걸중상에게 진국공을 , 걸사비우에게 허국공을 주어 이들을 회유하려 합니다.

    그러나 걸사비우가 이를 거절하자 당나라에 투항했던 거란 장수 이해고가 측천무후의 명을 받아 걸사비우를 죽이고 이어 대조영 집단을 뒤쫓는데 이 무렵 걸걸중상도 사망, 대조영이 고구려와 말갈병을 이끌고 천문령을 넘어 추격해온 당나라 군대를 격파합니다. 이 전투에서 패한 이해고는 겨우 몸만 피해 돌아갔고 요서지역의 거란이 돌궐에 투항하며 길이 막히게 되자, 당은 더 이상 대조영 집단을 토벌할수 없었습니다.

    천문령 전투를 마지막으로 대조영은 걸사비우의 무리를 이끌고 고구려 멸망기부터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요동을 떠나 동쪽으로 가서 동모산을 건국, 대조영은 나라를 세우고 곧바로 돌궐과 신라에 사신을 보내 교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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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7.17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7세기 말에서 10세기 초에 걸쳐 중국의 동북(만주) 지방 동반부에서 소련의 연해주와 한반도 동북부에 걸쳐 있었던 나라 이름(699~926). 고구려(高句麗) 별부(別部) 출신의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 유민(遺民)과 말갈족들을 모아 옛고구려 땅인 동모산(東牟山:지금의 돈화현 오동성으로 추정)에서 진국(震國)이란 국호로 건국. 712년 당(唐)나라에서 대조영을 ‘발해군왕(渤海郡王)’으로 봉(封)하면서 발해로 불리게 되었음. 제2대 무왕(武王) 때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발해의 전성기는 선왕(宣王) 대인수(大仁秀)의 재위 기간(818~830)으로, 이때 발해는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렸음. 이 시기 강역은 ‘방오천리(方五千里)’로 동쪽은 동해, 북쪽은 송화강•흑룡강, 서쪽은 장춘•심양•압록강구, 남쪽은 함경도 용흥강 지역이었으며, 5경(京) 15부(府) 62주(州)의 지방 제도에 의해 다스려졌음. 당의 3성(省) 6부(部) 9시(寺) 제도와 유사한 3성(省) 6부(部) 1대(臺) 7시(寺) 1원(院) 1감(監)의 관제로 국정을 운영함.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으로 구성된 국가인 까닭에 발해에 대한 인식은 매우 다양하여 중국사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구려의 연장이라 하여 한국사의 범주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기도 함. 발해를 한국사의 범주로 파악했다고 볼 수 있는 저술로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帝王韻紀)≫, 유득공(柳得恭)의 ≪발해고(渤海考)≫, 한치윤(韓致奫)의 ≪해동역사(海東繹史)≫ 등이 있음. 한편, 안정복(安鼎福)의 ≪동사강목(東史綱目)≫이나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는 발해를 중시하였으나 한국사의 범주로 보지는 않았음.

    출처 : 한국고전용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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