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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germaan
rogermaan23.05.16

조선시대 그림을 그리는 화가 의 사회적 지위는 어떠했나요

현대 사회에서 화가는 예술가 다소 높은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고 있는데요 조선시대 사회에서 그림을 그린 화가는 어떠한 사회적 지위와 인정을 받았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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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16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도화서는 대표자인 제조(提調) 1인, 제조를 보좌하면서 실질적인 책임을 맡은 별제(別提) 2인, 그리고 실무를 담당하는 화원(畵員) 20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제조는 그림에 조예가 깊은 종1품이나 종2품 당상관이 겸직하였으며, 별제는 종6품 경관직(京官職)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원(畵員)의 선발과 승진을 실질적으로 담당했습니다. 그러나 화원은 20인 중 원칙적으로 종6품부터 8품까지 1명, 9품의 2명을 합하여 5명만 실직을 받을 수 있었고, 임기 만료 후 특별히 계속 근무하는 사람의 정원 역시 3명으로 한정되었으므로, 실직이 없는 화원들은 작업이 있을 때만 불려와 일당을 지급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도화서에서 처리해야 할 업무량이 상당히 과중했던 것에 비하여, 처우는 상대적으로 열악하였습니다.


    화원 선발과 승진의 방법은 취재(取才)였습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죽화(竹畵)를 비롯하여 산수(山水)⋅인물(人物)⋅영모(翎毛)⋅화초(花草) 등의 화목(畵目)이 지정되어 있으며, 응시자는 이 중 두 가지를 택하여 응시하였습니다. 또 전문적인 화원을 양성하기 위해 화학생도(畵學生徒)를 운영했는데, 이는 그림에 소질이 있는 소년을 뽑아서 도화서에서 전문적인 교육을 거쳐 화원으로 양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조선 후기 그림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숙종대부터 도화서 화원을 증원하고 처우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실시하여 정조대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할 때는 화원의 정원을 20명에서 30명으로 확대하였습니다. 정조는 규장각을 왕정의 핵심 기구로 만든 후 규장각에서 펴내는 다양한 서책에 뛰어난 도화서 화원들을 임시로 차출하여 그림을 그리게 하고 우대하는 정책을 폈으며, 이 정책은 고종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도화서는 이후 갑오개혁을 전후로 폐지될 때까지 조선 미술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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