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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울곤잘
라울곤잘23.11.14

왕규의 난은 어떠한 사건 이였는지요?

고려 혜종 때 왕규의 난이 일어났다고 알고 있는데요.

이 왕규의 난은 어떠한 사건이였는지요?

어떠한 이유때문에 일어난 사건인지 답변 부탁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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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규의 난은 고려 2대 국왕 혜종 때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실의 외척 왕규가 자신의 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등극시키기 위해 일으킨 반란으로 왕권이 미약한 데에서 발생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규의 난은 고려 2대 국왕 혜종 때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실의 외척 왕규가 자신의 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등극시키기 위해 일으킨 반란입니다. 왕권이 미약한 데에서 발생하였으며, 고려 초기 광주의 대호족이었던 왕규는 양근 함씨였으나 개국공신으로 왕씨 성을 하사받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혜종 때 왕규가 왕위쟁탈을 위해 일으킨 난입니다.

    943년 태조가 죽고 혜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왕권은 불안했고 혜종은 태자때부터 강력한 호족 출신인 박술희의 지지와 후원을 받고 있었으나 왕권을 노리는 적대 세력이많고 강력했습니다.

    왕규는 혜쫑의 후견세력인 박술희 세력을 제압하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노골적인 행동을 취하는데 혜쫑대의 정정불안과 왕위쟁탈전의 원인은 혜종의 세력기반이 미약한 데 있었습니다.

    왕규는 광주를 기반으로 한 호족출신으로 태조를 섬겨 대광까지 되며 두 딸을 태조의 제 15,16비로 들였는데 16비는 광주원군을 낳습니다. 이처럼 왕규는 강력한 호족으로 왕실의 외척으로서 태조 만년에 강력한 실력자로 있었습니다.

    그는 태조에게 충성하나 혜종의 왕권은 인정하지 않았고 혜종을 죽이고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세우고자 합니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혜종 살해를 시도, 한번은 혜종의 침실에 자객을 잠입시켜 죽이려 했는데 마침 혜종이 잠에서 깨어 자객을 제압하면서 위기를 모면합니다.

    또 한번은 직접 무리를 이끌고 밤에 혜종의 침실을 급습했으나 혜종은 이미 다른 데로 거처를 옮긴 뒤었는데, 혜쫑은 최지몽이 무슨 변이 있을테니 거처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몰래 중광전으로 피한 것입니다.

    왕규의 세력이 혜종의 왕권을 압도하고 있던 상황에서 세력기반이 약한 혜종은 그를 문책하거나 응징하지 못했고 당시 혜종의 후견인으로서 왕규와 대립관계에 있던 박술희 역시 자신의 신변보호에 급급합니다.

    그리고 왕실 내에서도 혜종의 이복동생 요는 서경의 왕식렴 세력과 결탁, 왕위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이에 혜종은 주위에 항상 갑사들을 수행했고 암살 위협에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할수 없게 되며, 결국 왕규의 모역은 요와 결탁한 왕식렴의 서경 군사력의 개입으로 실패합니다.

    고려사는 요가 왕식렴세력과 결탁한 것은 왕규의 모역에 대비한 것으로 기록되나 이는 혜종의 왕권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닌 요의 왕위계승을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요는 945년 서경 왕식렴의 군사력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왕규를 갑곶에 귀양 보낸 뒤 사람을 보내어 죽였으며 그 무리 3백여명도 죽였으며 혜종의 후견세력인 박술희 살해, 그 책임을 왕규에게 전가합니다.

    박술희는 태조의 유명까지 받은 중신이었으므로 살해의 진상을 은폐할 필요가 있었기때문이며 요는 이처럼 왕위계승에 방해가 되는 적대세력을 일소한 뒤 왕위에 오릅니다.


  • 안녕하세요. 한정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943년에 고려의 태조가 죽고 혜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왕권은 극도로 불안하였다. 혜종은 태자 때부터 강력한 호족출신인 박술희(朴述熙)의 지지와 후원을 받고 있었으나, 왕권을 노리는 적대세력은 많았고, 더 강력하였다.


    왕규(王規)는 혜종의 후견세력인 박술희 세력을 제압하고, 왕위를 탈취하기 위해 노골적인 행동을 취하였다. 요컨대, 혜종대의 정정(政情)불안과 왕위쟁탈전의 원인은 혜종의 세력기반이 미약한 데 있었다.


    왕규는 광주(廣州)를 기반으로 한 호족출신으로 태조를 섬겨 대광(大匡)까지 되었다. 또한 두 딸을 태조의 제15·16비(妃)로 들였는데, 제16비는 광주원군(廣州院君)을 낳았다. 이처럼 왕규는 강력한 호족으로, 왕실의 외척으로서 태조 만년에는 막강한 실력자로 있었다.


    그는 태조에게는 충성했으나, 혜종의 왕권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따라서 혜종을 죽이고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세우고자 하였다.

    그는 두 차례에 걸쳐 혜종 살해를 시도하였다. 한번은 혜종의 침실에 자객을 잠입시켜 죽이려 했는데, 마침 혜종이 잠에서 깨어 자객을 한 주먹에 때려 죽여서 위기를 모면하였다.


    또, 한번은 직접 무리를 이끌고 밤에 혜종의 침실을 급습했으나 혜종은 이미 다른 데로 거처를 옮긴 뒤였다. 혜종은 최지몽(崔知夢)이 무슨 변이 있을 테니 거처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몰래 중광전(重光殿)으로 피한 것이다.


    왕규의 세력이 혜종의 왕권을 압도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세력기반이 약한 혜종은 그를 문책하거나 응징하지 못하였다. 당시 혜종의 후견인으로서 왕규와 대립관계에 있던 박술희 역시 자신의 신변보호에 급급하였다.


    그리고 왕실 내에서도 혜종의 이복동생 요(堯 : 뒤의 定宗)는 서경(西京)의 왕식렴(王式廉)세력과 결탁, 왕위를 노리고 있었다.


    이에 혜종은 주위에 항상 갑사(甲士)들을 수행시켰고, 암살 위협에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없었다. 혜종이 즉위 이래 병석에 눕게 된 것도 이러한 상황과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다.


    결국, 왕규의 모역(謀逆)은 요와 결탁한 왕식렴의 서경 군사력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만다. 『고려사』에는 요가 왕식렴 세력과 결탁한 것은 왕규의 모역에 대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혜종의 왕권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요의 왕위계승을 위한 포석이었던 것이다.


    요는 945년에 서경 왕식렴의 군사력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왕규를 갑곶(甲串)에 귀양보낸 뒤 사람을 보내어 죽였으며, 그 무리 3백여 명도 죽였다. 한편, 혜종의 후견세력인 박술희도 살해하고, 그 책임을 왕규에게 전가시켰다.


    박술희는 태조의 유명(遺命)까지 받은 중신(重臣)이었으므로 살해의 진상을 은폐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는 이처럼 왕위계승에 방해가 되는 적대세력을 일소한 뒤 왕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