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왕규의 난에 대해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고려시대 초기에 왕씨집안에서 왕규의 난이 일어난것으로 알고있는데요 왕규의난은 어떤배경에서 일어난것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혜종 때 왕규가 왕위쟁탈을 위해 일으킨 난으로 943년에 태조가 죽고 혜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왕권은 극도로 불안하였습니다. 혜종은 태자 때부터 강력한 호족출 신인 박술희의 지지와 후원을 받고 있었으나, 왕권을 노리는 적대세력은 많았고, 더 강력하였습니다. 왕규는 혜종의 후견세력인 박술희 세력을 제압 하고, 왕위를 탈취하기 위해 노골적인 행동을 취하였으며 혜종대의 정정불안과 왕위쟁탈전의 원인은 혜종의 세력기반이 미약한 데 있었습니다. 왕규는 광주를 기반으로 한 호족출신으로 태조를 섬겨 대광까지 되었습니다. 또한 두 딸을 태조의 제15·16비로 들였는데, 제16비는 광주원군을 낳았고 왕규는 강력한 호족으로, 왕실 의 외척으로서 태조 만년에는 막강한 실력자로 있었습니다. 그는 태조에게는 충성했으나, 혜종의 왕권은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고 혜종을 죽이고 외손자인 광주 원군을 세우고자 하였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2대 국왕 혜종(惠宗) 때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실의 외척 왕규(王規)가 자신의 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위에 등극시키기 위해 일으킨 반란으로 왕권이 미약한 데에서 발생했는데 왕규는 고려 초기 광주(廣州)의 대호족으로, 양근 함씨였으나 개국공신으로 왕씨 성을 하사받게 되었습니다. 결국 왕규가 난을 일으키자 왕식렴이 군대를 이끌고 개성에 들어와 정종을 호위하니 왕규는 감히 움직이지 못했는데 이에 왕식렴은 왕규를 붙잡아 갑곶(甲串)에 귀양 보냈다가 사람을 보내 죽여 버리고 그의 일당 3백여 명을 처형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진압해 즉위한 정종도 오래 가지 못하고 외척들에게 쫓겨 동생 에게 왕위를 넘기고 아들 경춘원군의 목숨을 유지케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광종은 즉위후 경춘원군을 자신의 자리를 노린다는 이유로 전격 처형, 고려 초기의 왕권 불안은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규의 난은 고려 2대 국왕 혜종 때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실의 외척인 왕규가 자신의 손자인 광주원군을 왕위에 올리기 위한 반란으로 왕권이 미약한데서 발생하였습니다. 왕규는 원래 광주의 대호족으로 양근 함씨였으나 개국공신으로 왕씨를 하사받았습니다. 자신의 두 딸을 태조에게 시집보내 15비와 16비가 되었고 16비 소생이 광주원군입니다. 왕규는 혜종을 두 차례나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혜종 사후 정종이 등극하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정종은 혜종 때부터 왕규를 의심하여 수비대장 왕식렴과 미리 연락을 해두었습니다. 왕규가 난을 일으키자 왕식렴은 왕규를 붙잡아 갑곶으로 귀양보냈다가 사람을 시켜 죽여버리고 300여명을 처형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정종도 오래가지 못하고 동생 소에게 자기 아들 경춘원군의 목숨을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광종은 자신의 자리를 노린다는 이우로 경춘원군을 처형하여 고려 초기 왕권 불안은 한동안 계속되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왕규의 난은 고려 2대 국왕 혜종(惠宗) 때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실의 외척 왕규(王規)가 자신의 손자인 광주원군(廣州院君)을 왕위에 등극시키기 위해 일으킨 반란으로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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