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의 배경과 전개, 결과 등이 궁금합니다.
민비 일당은 구식 군대와 신식 군대를 왜 차별했을까요? 군란 일으킨 사람들이 궁궐에 침입하여 민씨 정권 요인을 살해하였고요. 대원군이 과연 다시 재기했는지와 결과로 맺은 조약 등이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오군란의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군란의 배경을 단지 민씨척족정권(閔氏戚族政權)에 대한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守舊派)의 정쟁(政爭)으로만 볼 수는 없다.
고종을 비롯한 민씨척족정권이 개화정책을 추진해 일본과 구미제국과의 교섭통상관계가 이루어지면서 개화파와 수구파의 반목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개화파주1 관료가 제도 개혁에 따라 대거 등장하자 수구파주2의 반발이 격화되었다.
특히, 5영(營)을 폐지한 후 무위(武衛) · 장어(壯禦)의 2영을 설치하고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는 등 군제 개혁이 단행되자 구 5영소속 군병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1881년 전개된 수구파의 위정척사론주3과 이재선(李載先) · 안기영(安驥永) 등의 토왜반정음모사건(討倭反正陰謀事件)을 계기로, 민씨척족정권은 대원군파와 특히 남인계열의 수구파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함으로써 지배층의 분열은 극도에 달해 있었다.
이 밖에도 민씨척족정권의 인사행정의 문란, 매관매직, 관료층의 부패 및 국고의 낭비, 일본의 경제 침략으로 인한 불만 등을 군란의 배경으로 들 수 있다.
임오군란이 일어나기 전에도 수 차에 걸친 군병들의 반항이 있었다. 1863년(철종 14)의 금위영 소속 군병의 소요, 1877년 8월의 훈국병 소요 등은 모두 군료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임오군란이 일어난 직접적인 원인도 군료 문제에 있었다.
군제 개혁 후 구 5영 소속 군병의 대부분은 실직하였다. 또 무위영과 장어영으로 개편된 군병이라 할지라도 신설된 별기군에 비해 열악한 대우에 처해 있었다.
더욱이 이들 구 5영소속의 군병들은 13개월이나 군료를 받지 못하고 있어 불만이 절정에 달해 있었다. 특히, 그들은 군료 관리인 선혜청당상 민겸호(閔謙鎬)와 전 당상이었던 경기관찰사 김보현(金輔鉉)에게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임오군란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임오군란은 1882년(고종 19) 7월 19일부터(양력, 이하 양력 표시) 7월 24일까지 서울의 하급군관들과 도시빈민들이 개항 이후 시행된 개화정책과 집권세력에 저항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는 19세기 말에 새로운 국제질서를 모색하고 있었다.
-출처: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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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년 맺어진 한일수호조약으로 인해 대원군이 취한 쇄국정책이 무너지고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이 일어나게 되며 이 가운데 왕의 친정으로 정권을 내놓은 대원군은 척족인 민씨일파를 내치고 다시 집권할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습니다.
신식군대를 양성하는 별기군이 급료과 보급에서 좋은 대우를 받은 데 비해 구식군대인 무위영, 장어영 2영의 군졸들은 13달 동안 봉급미를 받지 못해 불만이 높았고 그러던 차 겨우 한달치 급료를 받게 되나 선혜청 고지기의 농간으로 말수가 턱없이 부족하고 모래가 반 넘어 섞여 있어 이에 격분한 구식군졸들이 고지기를 때려 부상을 입히고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으로 몰려가 폭동을 일으킵니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난병들은 대원군에게 진정하기 위해 운현궁으로 몰려와 애소하고 대원군은 겉으로는 달랬지만 한편으로는 심복인 허욱을 시켜 그들을 지휘케합니다. 그리하여 군민의 불평은 대원군과 연결되어 민씨 및 일본 세력의 배척운동으로 확대, 군민들은 별기군 병영으로 몰려가 일본인 교련관 호리모토 공병소위를 죽이고 민중과 합세해 일본 공사관을 포위, 불을 지르고 일본순사 등 13명의 일인을 살해하나 하나부사 공사 등 공관원들은 모두 인천으로 도망쳐 영국 배의 도움으로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이튿날 더욱 강력해진 군민은 대원군의 밀명에 따라 영돈령부사 이최응 등을 살해하고 명성활후를 제거하기 위해 창덕궁 돈화문 안으로 난입하나 명성황후는 궁녀의 옷으로 변장 후 궁궐을 탈출, 충주 장호원의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합니다.
사태가 위급함을 느낀 고종은 전권을 대원군에게 맡겨 반란을 수습할 수밖에 없다 생각하고 대원군을 불러들였고 이리하여 왕명으로 정권을 손에 넣은 대원군은 반란을 진정시키고 군제를 개편하는 등 군란의 뒷수습에 나섰지만 민씨 일파의 청원을 받아들인 청나라가 재빨리 군대를 파견하여 그의 재집권은 단명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청나라는 이 난의 책임을 물러 대원군을 톈진으로 납치해갔고 일본은 조선정부에 강력한 위협을 가해 주모자 처벌과 손해배상을 내용으로 하는 제물포조약을 맺게 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군란은 수습되었으나 그 결과는 더욱 참담했다. 임오군란의 결과로 청의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었으며 또한 청은 재정(마젠창),외교(묄렌도르프) 고문을 각 조선에 파견하여 내정간섭까지 하게 되고 조.청 상민 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해 조선의 경제까지 침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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