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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람찬텐렉63
보람찬텐렉6323.03.29

미국의 독립전쟁과 건국의 역사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미국의 독립전쟁과 건국의 역사에 대해서 알고싶어요. 혹시나 분량이 많다면 가능한 선까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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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광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미국 독립 전쟁은 1775년에서 1783년 사이에 벌어진 독립을 위한 전쟁으로, 북미에 있는 13개의 영국 식민지가 영국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운 독립 정부를 설립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전쟁은 1775년 4월 렉싱턴과 콩코드의 전투로 시작되었고, 그 후 몇 년 동안 수많은 다른 전투와 교전들로 계속되었습니다.

    각 식민지의 대표들의 모임인 대륙회의는 대륙군을 설립하고 조지 워싱턴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군대는 자원 부족, 부족한 훈련을 받은 군인, 그리고 외국의 원조를 받는 어려움을 포함하여 많은 도전에 직면했습니다.

    이러한 도전에도 불구하고, 대륙군은 1777년 사라토가 전투에서 중요한 승리를 얻을 수 있었고, 이것은 프랑스인들이 미국인들에게 지원을 제공하도록 설득했습니다. 이 지원은 전쟁에서 미국인들의 궁극적인 승리에 결정적인 것으로 증명되었습니다.

    1783년, 공식적으로 전쟁을 끝내고 미국의 독립을 인정하면서, 파리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새로운 국가는 연합 규약에 따라 정부를 수립했고, 그것은 효과가 없음이 증명되었고, 1787년 미국 헌법이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헌법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의 세 부서 사이에 힘의 균형을 갖춘 연방 정부 시스템을 확립했습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은 1789년부터 1797년까지 재임한 조지 워싱턴이었습니다.

    미국의 초창기는 아메리카 원주민들과의 갈등, 영국과 다른 유럽 강대국들과의 지속적인 긴장, 노예제도와 국가의 권리와 같은 문제들에 대한 투쟁을 포함한 많은 도전들로 특징지어졌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는 계속 성장하고 확장했고, 결국 세계적인 초강대국이 되었고 기술, 과학, 그리고 문화의 많은 분야에서 리더가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식민지와 본국 간의 갈등에 있었습니다.

    본래 영국과 북미 식민지의 사이는 그렇게 나쁜 편은 아니었습니다.

    북미 식민지는 영국이 국가적 차원에서 식민지 개척을 했던 19세기와는 양상이 달랐습니다.

    인도 제국이나 아프리카 같은 이민족에 대한 정치적 점령에서 비롯한 식민지라기보다는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처럼 자국민이 본토의 연장선 개념으로 개척한 자치령과 유사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중상주의 정책을 보조하기 위해 제정된 항해법이 점차 확대되는 식민지였던 미국의 경제에 족쇄로 작용하자, 미국의 식자층과 상인층을 바탕으로 반영감정과 혁명의 씨앗이 파종되었고, 1761년에는 이러한 경제권 제약에 대한 소송까지 일어날 정도였습니다.


    독립전쟁의 시작은 보스턴이 있는 매사추세츠 주에서 시작되었다. 보스턴 사람들은 영국의 매사추세츠 주 자치령 폐기에 격분했고 영국군에게서 스스로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면서 각지에서 민병대가 우후죽순으로 결성되기 시작했습니다.

    보스턴의 영국 주둔군 지휘관인 토머스 게이지 장군(General Thomas Gage)은 병력이 너무 적어 증원 부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

    습니다., 그는 영국 군대가 보이기도 전에 식민지인은 재빨리 도망쳐버릴 것이라는 신중하지 못한 관리들의 충고를 받아 들이지 않았습니다.그는 민병대가 보스턴에서 18마일 떨어진 콩코드(Concord)에 많은 양의 탄약을 저장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행동하기로 결정했으며, 1775년 4월 18일 밤 1,000명 규모의 병력을 렉싱턴으로 파견했습니다.

    파견해 콩코드에 있는 민병대의 무기창고를 제압하고 민병대를 무장 해제시키도록 지시했습니다.

    독립파에 속했던 폴 리비어는 영국군의 움직임을 알고서는 말을 타고 한 손에는 등불을 든 채로 렉싱턴으로 가서 영국군이 쳐들어온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이에 렉싱턴의 민병대 77명이 소집되어 영국군을 기다렸습니다.

    4월 19일 아침, 영국군이 렉싱턴의 초지에 이르러 민병대와의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실상 이 렉싱턴에서의 교전이 독립전쟁의 시작으로 간주된다(렉싱턴-콩코드 전투). 영국군은 렉싱턴을 지나 콩코드 근처 노스브릿지에서 민병대와 전투를 벌였지만 민병대에게 밀려 보스턴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퇴각하는 영국군을 각지에서 몰려들어온 민병대들이 공격했고 영국군은 궤멸직전에 보스턴 시내에서 지원군을 보내 겨우 보스턴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민병대들은 이제 보스턴 시내를 탈환하려는 구상을 하기에 이르렀다(보스턴 포위전). 대륙의회도 결국 싸움을 피할 수 없음을 깨닫고 조지 워싱턴을 대륙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보스턴을 포위하고 있는 민병대들을 규합하게 했습니다.

    영국도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깨닫고 윌리엄 하우가 이끄는 4500명의 원군을 파병했습니다.

    1775년 7월, 조지 워싱턴이 보스턴에 도착했다. 보스턴을 포위하고 있는 민병대들은 애국심과 총만 있던 오합지졸들이었고 워싱턴은 이런 오합지졸들을 이끌고 최강 전력인 영국군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었다. 비록 우발적으로 동원된 민병대의 특성상 무기, 탄약, 식량 등의 보급 문제와, 그리고 가장 중요한 대포의 부족, 또한 치열한 시가전에서 발생할 여러 불확실성 때문에 조지 워싱턴은 보스턴 진격을 포기했지만, 민병대가 규율이나 전투 경험이 부족하긴 해도 애국심으로 강화된 수적우세가 영국군의 숙련과 규율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을 렉싱턴-콩코드 전투에서 증명했기 때문에 영국군 역시 보스턴에서 치고 나올 생각은 감히 하지 못했다. 결국 지루한 장기 대치 끝에, 영국군에 대한 도발로 일어난 벙커힐 전투 후 영국은 보스턴 포기를 저울질하기 시작했고, 학수 고대하던 대포를 확보한 대륙군이 다시 한 번 도체스터 고지에서 대포를 이용하여 도발하자 영국은 마침내 보스턴을 포기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양측 사령관의 암묵적인 신사 협정에 따라 영국군이 함대를 이용해 해상으로 철수한 후 대륙군이 진입하여 보스턴을 해방시켰습니다.

    대륙회의가 대륙군을 조직해 영국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이제는 돌이킬 수 없으니 정식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해야한다는 얘기가 회의 내에서도 나오기 시작했고 이에 불을 붙인 것이 1776년 1월 토머스 페인이 발표한 상식이라는 책이었다. 미국 독립의 정당성을 설파한 상식은 베스트셀러가 되며 13개 식민지에서 독립 여론을 불붙였고 이에 대륙회의는 격렬한 논의 끝에 1776년 7월 2일 미국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7월 4일 발표하면서 마침내 13개 식민지는 정식으로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1783년 파리 조약으로 미국은 독립을 인정받았으며, 1787년 필라델피아 대표 회의에서 미국 헌법이 규정되었다. 한편 미국은 '영국 국왕을 대체할 통치자'를 요구했고, 그 결과 투표로 인한 선출로 그 사람이 뽑혔다. 이 사람이 바로 세계 최초의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