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공진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고려 거란 전쟁때 하공진 장군이 목숨을 걸고 고려를 지켰다는데 처음 듣는 인물이라서요 하공진 장군의 생애에 대해서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하공진(河拱辰)은 10세기 전반 고려 초기에 활약한 문신이자 외교관으로, 태조 왕건의 사촌동생이며 왕식렴의 외조카입니다.
1011년 요나라 성종이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략했을 때, 고려 현종은 직접 적장 소손녕을 찾아가 화친을 요청했습니다. 이때 소손녕은 80만 대군을 끌고 다시 올 것이니 그때는 항복하라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이에 현종은 대신들을 모아 논의했고, 대부분의 대신들은 항전을 주장했으나 예부시랑 최량과 좌사시랑 한언공이 화친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때 하공진이 스스로 나서 자신이 적진에 들어가 성종을 설득해보겠다고 자원하여 현종의 허락을 받았습니다.
하공진은 홀로 적진에 들어가 성종을 만나 설득하였고, 성종은 이를 받아들여 철군을 결정하였습니다. 이후에도 하공진은 양국 사이에서 여러 차례 사신으로 오가며 평화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으나,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키고 현종을 다시 왕위에 앉히자 요나라는 이를 구실로 1010년 2차 침입을 하였습니다.
2차 침입에서는 양규와 김숙흥 등의 장수들이 맞서 싸웠으나 대패하였고, 현종은 나주로 피난을 떠났습니다. 이때 하공진은 현종에게 자신이 적진에 들어가 시간을 끌테니 그 사이 황주 쪽으로 도망치라고 조언하였고, 그대로 실행하여 무사히 나주까지 당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하공진은 성종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으며, 성종은 그에게 개경으로 돌아가 현종을 사로잡아오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러나 하공진은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성종 앞에서 무릎을 꿇고 "두 나라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며 절개를 지켰습니다. 이에 분노한 성종은 하공진을 잡아죽이고 시신을 찢어서 저자거리에 내걸었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고려 조정에서는 하공진의 충성심을 기려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진공'이라 높여 부르며 제사를 지내주었습니다. 또한 현종은 1018년 요나라와의 전쟁을 마무리 지은 뒤 하공진의 아들에게 원보 벼슬을 내려 아버지의 공을 치하하였으며, 인종 역시 1126년 이자겸의 난을 진압한 후 하공진의 무덤에 제문을 지어 바쳤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윤지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010년 현종 원년에 동서 양계(東西兩界)를 지키면서 임의로 군대를 동원하여 동여진의 촌락을 치다가 패한 일이 드러나 유배를 당하였고, 그 해 거란이 목종의 시해를 빌미로, 고려에 또 다시 침입하자 유배에서 풀려나 요나라(거란)이 쳐들어오자 고영기(高英起)와 함께 군사 20여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피난 중이던 현종을 뒤따라가 양주에서 거란군의 철수 교섭을 자청하였습니다. 하공진은 현종의 사절로 요 성종을 만나서 현종의 친정과 더불어 스스로 볼모가 되는 조건으로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공을 세웠으며, 거란은 그에게 혼인을 제안했으나 이를 사양했습니다. 그러나 탈출을 시도하다 발각되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전주하씨의 시조로 994년 압강도구당사가 되고 1009년 중랑장을 거쳐 상서좌사낭중으로 강조의 정변에 가담, 그 뒤 동서양계를 지킬떄 동여진 부락에 진군했다가 패한 일로 1010년 섬으로 유배됩니다. 거란이 고려를 침범하자 풀려나와 호부원외랑 고영기와 함께 적진에 들어가 현종의 친조와 자신의 볼모를 조건으로 철병을 교섭, 성공했습니다.
거란에 잡혀간 뒤 겉으로는 충근하게 보임으로써 거란왕의 신임을 받게 되자 탈출을 목적으로 점검사로서 고려 방문길에 오르려하나 연경에서 양가의 처녀와 결혼시키는 등 출국을 방해받았습니다.
준마를 여러 필 준비, 탈출 기회를 엿보다 발각되어 친국을 당하며 회유를 받았으나 끝내 완강히 거절해 살해되었으며 고려 조정에서 상서공부시랑을 추증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강경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전기의 무신이자 목숨을 바쳐 현종과 멸망의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한 충신으로 진주 하씨 시랑공파(侍郞公派)의 시조이다.
1010년(현종 1)에 일찍이 동서계(東西界)에 있을 때 임의로 군대를 동원하여 동여진(東女眞)의 촌락을 치다가 패한 일이 드러나 유배당하였다. 그 해 요나라의 성종이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핑계로 고려에 침입하자 유배에서 풀려났다.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郎) 고영기(高英起)와 함께 군사 20여 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피난 중이던 현종을 뒤따라가 양주에서 요군의 철수교섭을 자청, 국왕의 사절로 요성종을 만나 '현종은 이미 남쪽 수천리[2] 밖으로 피했으니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오' 라고 요성종을 속여 거란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3]
고영기와 함께 요나라에 볼모로 잡혀 가 요성종에게 신임을 받았지만 고려로의 탈출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연경(燕京)으로 옮겨져 양가(良家)의 딸을 아내로 맞아 살면서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평소 저자에서 준마(駿馬)를 많이 사 고려로 가는 길에 배치하여 두고 귀국을 꾀하다가 탄로가 나 요성종의 국문을 받게 되었다.
요성종은 온갖 악형과 회유로 신하가 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심한 모욕적인 말로 응대하여 요성종을 크게 격분시킴으로써 살해된 뒤 간마저 꺼내져 씹히기까지 하였다.
문종이 후에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郎)으로 추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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