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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angel
Youangel23.12.12

백제의 멸망은 어떻게 된건지 알수있을까요?

안녕하세요 백제의 의자왕은 나름 신라와의 전투에서 이기고 대야성도 점령하는등 기세가 좋았던것으로 아는데요 어떻게 해서 무너졌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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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제의 멸망 원인은 첫째 나당 동맹으로 인한 군사력 비대칭입니다. 백제가 대야성 전투 등으로 신라를 궁지에 몰아 넣어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신라는 당나라와 동맹군을 결성하게 합니다. 두번째로는 의자왕의 방만하고, 안일한 국가 운영입니다. 물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김부식의 주관이 개입되었다고 하더라도 의자왕에는 성충과 흥수와 같은 유능한 신하의 충언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탓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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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박세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의자왕이 아버지 무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고, 642년에 신라의 대야성을 공격하여 무너뜨리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의자왕의 정치가 악화되기 시작한것은 655년 부터였습니다. 태자궁을 화려하고 사치스럽게 지은 것을 시작으로, 656년 3월에는 궁인과 더불어 밤낮으로 음란스러운 잔치를 매일 벌이고, 이를 비판한 좌평 성충을 옥에 가둬버리기까지 합니다. 이후 귀족들의 인심을 잃는 정책들을 펴다가 결국 나당 연합군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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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명훈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공격

    나·제 동맹이 깨지고 한강 유역을 신라에 빼앗긴 백제는 국력을 키우는 데 온 힘을 쏟았어요. 그러다가 제30대 무왕 때에 이르러서 잃어버린 땅을 되찾기 위해 신라를 공격하지요.

    무왕의 뒤를 이은 의자왕 또한 신라의 서쪽 지방을 공격하여 40여 개의 성을 빼앗고, 신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대야성(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까지 점령했어요. 또한 당성(경기도 화성에 있는 산성)도 점령해 신라가 힘겹게 마련한 당나라와의 통로를 막아 버렸어요.

    나아가 백제는 고구려와 사이좋게 지내면서 신라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어요. 결국 신라는 살아남기 위해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었어요. 신라와 당나라는 연합군을 결성(結成)하게 되는데, 이를 ‘나·당 연합군’이라고 해요. 나·당 연합군은 힘센 고구려보다 백제를 먼저 공격하기로 했어요.

    당나라가 신라와 손을 잡은 까닭은 한반도 전체를 차지할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당나라 장군 소정방이 총사령관이 되고, 신라의 김인문이 부사령관이 되어 백제를 향해 쳐들어갔지요. 의자왕은 의직에게 2만 명의 군사를 주어 백강(지금의 금강 하류 지역)에서 당나라 군사를 막게 하고, 계백 장군에게는 5천 명의 군사를 주어 신라 군사를 막게 했어요.

    계백은 전쟁터로 떠나기 전에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들러 아내와 자식들을 불렀어요.

    “당나라군과 신라군이 공격해 오고 있다.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끝까지 싸울 것이다. 그러나 나라가 망하면 신라나 당나라의 종이 될 것이다. 어찌하겠느냐?”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백제인으로 죽음을 택하겠습니다. 아버님의 칼에 죽게 해 주시옵소서.”

    계백은 눈물을 흘리며 가족을 차례로 베고 싸움터로 나갔어요. 계백과 백제군은 신라보다 먼저 황산벌에 도착했어요. 계백은 병사들을 세 부대로 나누어 험한 언덕을 골라 배치했어요. 그리고 비장한 목소리로 병사들에게 말했어요.

    “신라군은 5만이지만 우리 백제군은 5천에 불과하다. 하지만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운다면 반드시 백제군이 이길 것이다. 살아서 돌아갈 생각을 버리고 나와 더불어 죽을 결심으로 적을 쳐부수도록 하자.”

    병사들은 계백 장군이 사랑하는 가족을 죽이고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병사들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계백 장군과 함께 끝까지 싸우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했어요.

    2. 계백 장군과 5천 결사대

    이윽고 김유신이 거느린 신라의 5만 군사가 탄현을 넘어 황산벌에 도착했어요. 김유신은 황산벌에서 믿을 수 없는 소식을 들었어요. 먼저 도착해 있던 품일 장군이 수차례 백제를 공격했지만 매번 패했다는 것이었어요.

    품일 장군은 백제군을 가볍게 보고 덤벼들었으나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싸우는 백제군을 당해 낼 수 없었던 거예요.

    “성급하게 공격하지 않는 것이 좋겠소.”
    김유신은 새로운 작전을 짜서 백제군을 공격하기로 했어요.

    다음 날 김유신은 기습 작전을 썼어요. 하지만 백제의 진(陣)을 뚫지 못한 채 돌아왔어요. 그 다음 날, 김유신은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백제군을 일제히 공격했어요. 처음에는 신라군이 이기는 듯했지만 갑자기 백제군이 반격을 해 와서 신라군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후퇴하고 말았어요.

    “왜 신라는 5만의 대군으로 5천의 백제군을 이기지 못하는가?”

    신라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어요. 하지만 수차례 신라의 공격을 막아 낸 백제 진영도 부상당한 병사들이 넘쳐났어요.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워야 한다는 결심만으로 버티고 있었지요.

    그러던 어느 날, 신라 진영에서 둥둥둥 북소리가 울리더니 어린 병사 하나가 백제 진영으로 돌격해 왔어요. 품일 장군의 아들 관창이었어요. 관창은 백제군을 상대로 용감히 싸웠지만 곧 사로잡히고 말았지요.

    계백은 어린 관창을 살려 보냈지만 관창은 계속해서 돌격해 왔어요. 계백은 어쩔 수 없이 관창의 목을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 돌려보냈어요. 목숨을 버리고 싸운 관창의 용기에 신라군들은 다시 힘을 얻었어요.

    “백제군을 무찌르자! 관창의 원수를 갚자!”

    백제군도 질세라 큰 소리로 외쳤어요.

    “끝까지 싸워 마지막 충성을 다하자!”

    백제군은 죽을 힘을 다해 싸웠지만 끊임없이 밀려오는 신라군에게는 어쩔 수 없었어요. 결국 계백과 5천의 백제군은 황산벌에서 전멸(全滅)하고 말았지요.

    나·당 연합군은 백제의 도읍인 사비성을 공격하여 함락시켰어요. 웅진성으로 피해 있던 의자왕은 이 소식을 듣고 나·당 연합군에 항복했다고 알려졌어요.

    (잠깐! 예식진 일가족 무덤이 2012년 당나라 서울인 지금의 중국 산시성 시안에서 발견되었는데, 해당 묘지명에 따르면 부하 장군이었던 예식 장군이 의자왕을 당 군에게 바치고 항복하게 한 것으로 적혀있어 갑작스런 의자왕의 항복에 대한 의문이 풀렸답니다.)

    의자왕을 비롯해 왕자, 왕족들, 백제의 백성들은 포로가 되어 당나라로 끌려갔어요.

    이로써 백제는 700여 년 만에 망하고 만 거예요. 그러나 백제의 백성들과 남은 군사들이 복신 장군을 중심으로 백제 부흥(復興)군으로 다시 일어섰지요.

    백제는 멸망 후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이 왕자 풍을 왕으로 받들고 주류성과 임존성을 중심으로 부흥 운동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말아요.

    복신은 일본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한편 일본에 가 있던 의자왕의 아들 풍 왕자를 왕으로 받들고 백제 왕조의 부흥을 선언(宣言)했어요. 백제 부흥군이 조금씩 백제의 영토를 되찾아 나가자, 위기를 느낀 신라는 다시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어요.

    하지만 백제 부흥군을 지휘하던 풍 왕자와 복신 사이가 갈라졌어요. 결국 왕자 풍은 복신을 죽이고 백제 부흥군을 이끌었어요.

    지도층의 분열로 백제 부흥군의 힘은 매우 약해졌어요. 왕자 풍은 일본에서 백제를 위해 보내 준 수백 척의 배와 군사들을 이끌고 백강에서 싸움을 벌였지만 끝내 지고 말았어요.

    백제 부흥군은 뿔뿔이 흩어지고 부흥 운동은 끝내 실패로 돌아갔지요. 의자왕의 항복 이후 4년 동안 계속된 백제 부흥군의 싸움도 막을 내리고 백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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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제는 자주적으로 신라와의 전쟁에 휘말렸고, 660년 발생한 부여성 전투에서 백제는 대패, 이는 백제의 약화를 야기하게 됩니다.

    7세기 중반 중앙아시아 출신의 거란족이 한반도로 침입해 백제 지역도 영향을 받게 되는데 660년 부여성 전투 이후 거란의 침입이 계속되면서 백제에 대한 압력이 증가합니다.

    918년 고려가 설립되면서 백제는 고려에 흡수, 고려가 세력을 확장하면서 백제의 영토와 정치적 독립이 사라지게 되었고 7세기 중반부터 8세기 초까지 정치적인 불안정과 내부 분열에 시달립니다.

    왕실간의 분쟁과 불안정한 통치는 국가를 약화시키고 막대한 외부 압력에 허약하게 만들었으니 이런 다양한 복합적인 이유로 백제는 멸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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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백제와 같은 경우에는 당나라의 지원을 받는

    신라에 의하여 멸망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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