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본관 전주(全州). 자 봉조(鳳朝/鳳藻). 호 영재(寧齋). 인천 강화 출생. 가학인 양명학을 계승하였으며, 강위(姜瑋)에게서 배우기도 하고, 김택영(金澤榮) ·황현(黃玹)과 가까웠다. 1866년(고종 3)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15세의 어린 나이로 인해 등용이 연기되어 1870년에 홍문관에 들어갔다. 1874년 서장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75년 충청도 암행어사로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을 탄핵했다가 벽동에서 유배생활을 한 후 벼슬을 포기하였다. 고종의 간곡한 부름으로 1880년과 1893년에 어사로 나가 관인의 비리를 엄하게 조사하고 민폐를 해결하여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1890년에 한성부소윤, 1891년에 승지에 나아갔지만 관인 생활은 많지 않았다. 특히 1894년 갑오개혁 이후로 관직에 나아가지 않다가 고종의 노여움을 사 고군산도에 2개월 동안 유배되기도 하였다.
병인양요 때 조부인 이조판서 이시원(李是遠)의 자결을 목도하였으며 서양과 일본의 침략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1890년에 한성부소윤으로서 국가의 부동산을 외국인에게 넘기지 말 것을 건의한 것이 한 예이다. 양명학자로서 심학(心學)의 의미를 강조하여 정치 ·경제도 그것에 기반을 두고 허명(虛名)을 배격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웃나라에서 부강을 구하는 비주체적 개화를 극력 반대하였다.
문학적으로 김택영에 의해 여한9대가(麗韓九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혔는데, 권력에 비판적이었으며 민생의 실상과 어려움을 많이 다루었다. 저서로 문집 《명미당집(明美堂集)》과 조선 중기 이후의 붕당을 개관하고 평가한 《당의통략(黨議通略)》이 있다.
출처 :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