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밝은큰고니27
밝은큰고니2724.02.02

고려시대의 양규에 대해서는 왜 잘 알려져 있지 않았나요?

고려거란전쟁에서 거란군에 맞서 고려를 지켜낸 양규 장군은 고려시대의 이순신이라고 일컬어질 만큼 용맹스런 활약을 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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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3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는 수차례의 외적의 침입으로 역사서들이 약탈당하거나 소실되어 역사연구에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양규장군은 거란 요나라 성종이 강조정변을 빌미로 40만 대군이 쳐들어 왔을 때 홍화진에서 막아서 거란군이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결국 거란은 20만 대군을 우회시켜 개경으로 진격하도록 하였습니다. 개경에 현종은 강감찬의 작전상 후퇴 의견을 받아들여 몽진을 떠난 뒤였습니다. 거란은 현종의 입조를 조건으로 군사를 물리게 되는데 고려의 민간인들을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양규장군은 거란군은 상대로 연전연승하면서 1만 여명이 넘는 고려 포로들을 구해냈으나 대규모의 거란군을 감당하지 못해 결국 전사하고 말았습니다.


  • 안녕하세요. 양미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아무래도 고려시대였고 역사적 기록 등이

    정확하게 기록되지 않으며 미비한 등 하기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규에 대한 높은 평가는 어려운 상황에서 굴하지 않고 꿋꿋이 싸워 적은 수의 군대로 좋은 성과를 내고 전투의 승리에 큰 역할을 했기에 합당하지만 비교적 덜 알려진 이유는 강감찬 장군이 비교적 당시 유명 했기 때문 이라고 보여 집니다. 특히 그는 고립된 군대를 이끌며 약 한 달 동안 거란군과 7번 싸워 수많은 거란군을 죽이고, 다량의 무기를 역으로 거두었으며, 포로가 된 백성 3만여명을 되찾았아 그야말로 영웅적인 면모를 보였는데 이처럼 거란의 제2차 침략에서 고려가 승리를 거두는 데 큰 공을 세운 양규는 이에 고려 현종은 1011년 2월 양규에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추증하였고, 4월에는 양규의 아내 은율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에게 평생토록 곡식 100섬을 내리고 아들 양대춘(楊帶春)을 교서랑(校書郞)에 임명하였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양규의 공을 기리기 위한 많은 절차기 진행되었고, 한국 역사상 훌륭한 리더십과 역경을 극복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