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양규에 대한 높은 평가는 어려운 상황에서 굴하지 않고 꿋꿋이 싸워 적은 수의 군대로 좋은 성과를 내고 전투의 승리에 큰 역할을 했기에 합당하지만 비교적 덜 알려진 이유는 강감찬 장군이 비교적 당시 유명 했기 때문 이라고 보여 집니다. 특히 그는 고립된 군대를 이끌며 약 한 달 동안 거란군과 7번 싸워 수많은 거란군을 죽이고, 다량의 무기를 역으로 거두었으며, 포로가 된 백성 3만여명을 되찾았아 그야말로 영웅적인 면모를 보였는데 이처럼 거란의 제2차 침략에서 고려가 승리를 거두는 데 큰 공을 세운 양규는 이에 고려 현종은 1011년 2월 양규에게 공부상서(工部尙書)를 추증하였고, 4월에는 양규의 아내 은율군군(殷栗郡君) 홍씨(洪氏)에게 평생토록 곡식 100섬을 내리고 아들 양대춘(楊帶春)을 교서랑(校書郞)에 임명하였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후에도 양규의 공을 기리기 위한 많은 절차기 진행되었고, 한국 역사상 훌륭한 리더십과 역경을 극복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