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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무
수리무24.01.12

선덕여왕이 왕이 될때 반대가 심했나요?

여자가 왕이 되는 것은 고대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인데 우리나라 최초의 여왕인 신라의 선덕여왕이 왕이 될때 반대가

심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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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선덕여왕이 즉위한 이유는 신라의 신분제도 골품제도 때문이다. 당시 신라에서 왕이 될려면 받듯이 성골이어야만 했고 하지만 아버지 진평왕은 아들이 없었고 성골에서 마땅한 후보가 없자 화백회의에서 선덕여왕을 추대한 것이였습니다. 선덕여왕이 즉위할 당시 신라는 주변 국들의 위협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수나라가 무너지고 당나라가 세워졌고 백제와 고구려는 신라를 공격하던 시기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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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4.01.12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선덕여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년인 진평왕 재위 53년의 여름 5월에 대규모 반란 기도가 있었는데, 바로 칠숙·석품의 난이었다고합니다. 이 시도는 진평왕에게 적발당해 칠숙은 동쪽 시장에서 목이 베어졌고, 9족을 멸족당했으며 아찬 석품은 백제로 도망가다가 처자식을 보고 싶다며 낮에는 숨고 밤에는 걸어서 총산까지 돌아오던 중, 한 나무꾼을 만나 옷을 벗고 헤어진 나무꾼의 옷으로 바꿔 입고 나무를 지고서 몰래 집에 이르렀는데, 들통나서 붙잡히고 역시 처형당했다고합니다. 이것이 단순히 진평왕에 대항한 반란인지, 아니면 여성인 선덕여왕이 즉위하는 것을 반대한 반란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이 있은 후 진평왕이 곧 세상을 떠난 것을 보았을 때 이미 고령의 진평왕이 몸이 좋지 않았고, 후계자로 선덕여왕이 지목된 상황에서 일어난 반란이므로 여자가 후계자로 지목돼 왕에 오르는 사태에 반발해 일어난 반란으로 추정하는 설이 많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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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진평왕은 첫째 딸인 천명의 남편 용춘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했습니다. 천명도 여자가 왕이 될 수 없다며 남편이 왕이 되는 것을 당연시 여겼어요. 그러나 용춘은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이라는 콤플렉스가 있었죠.

    결국 둘째 덕만이 선덕 여왕으로 즉위하자 백성들은 물론 당 태종, 백제도 조롱했습니다.

    그러다 재위 마지막 해인 647년 정월, 상대등 비담이 염종(廉宗)과 함께 “여자 군주는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라는 기치를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왕은 월성에 진을 치고 김유신을 파견하여 진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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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인문·예술 전문가 조유성 AFPK 입니다.

    ✅️ 선덕여왕 덕만은 진평왕의 딸이었고 그 자체로 '성골'이었기 때문에 성별이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즉위 이후에는 소위 여왕이 정치를 잘 못한다 등의 명분으로 비담 등이 난을 일으키긴 했지만 모두 진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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