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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향고래93
거대한향고래9323.04.24

신라시대 여왕이 있는 배경이 있나요?

조선시대나 고려시대는 여왕이 없었던거 같은데 신라시대에 선덕여왕 등 여왕이 있던 배경이 있나요? 여자도 왕이 될 수 있는 평등한 나라였던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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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6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4.24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의 제 27대 국왕이자 기록상 확인되는 한국사 최초의 여왕입니다. 연호는 '인평'(仁平), 골품은 성골.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의 딸이며, 최초의 진골 출신 국왕인 태종 무열왕의 이모이기도 합니다. 진덕여왕, 진성여왕과 함께 신라 3대 여왕들 중 한 명. 현대 대한민국 대통령이였던 박근혜까지 포함해 한국사에 단 4명 있었던 여성 국가원수들 중 첫 번째였습니다.

    《삼국사기》에서는 진평왕의 장녀였다고 전한다.필사본 《화랑세기》에는 천명공주와의 위아래가 뒤집혀 차녀로 기록되어 있는데, 어차피 이건 이미 주류 사학계에선 《환단고기》와 마찬가지인 위서인 것으로 이미 결론이 난 상태이므로 무시해도 좋다. 남편은 《삼국유사》에서는 음갈문왕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화랑세기》에는 여기에 추가적으로 김용춘, 을제 3명의 남자가 선덕여왕의 남편이라고 써 있다. 다만 《화랑세기》는 앞서 언급했듯이 역사적인 가치는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부왕인 진평왕은 자신의 삼촌이었던 진지왕을 대신해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그는 즉위 직후부터 자신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중요했다. 당장에 원래 왕위 계승자가 될 뻔했던 사촌 김용춘이 살아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자신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조건은 자신의 아버지인 동륜태자의 가문을 높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이 당연히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그 가문을 성골 가문으로 삼았고, 그로 인해 남성 중심 사회였던 고대 동아시아 환경에서도 특히 혈통을 중시하는 신라 사회였기에 여성이었음에도 성골이란 이유로 그녀가 여왕에 오르게 되었다.

    사실 신라의 전례를 따져본다면 원래 신라에선 아들이 없거나 있어도 문제가 있다면 딸이 아니라 사위가 왕위에 올랐다. 탈해 이사금, 내해 이사금, 미추 이사금이 그랬다. 즉 진평왕의 사위이자 사촌형인 김용춘이 관례대로라면 진평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진평왕은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이어 받은 핏줄을 꽤나 중시하는 편이었고, 자신의 맏딸을 더 중시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미 사위 계승의 명목은 당시로는 눌지 마립간 이후 부자 상속제가 확립되면서 사실상 사라진 것이었기 때문에 이쪽을 더 밀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평왕은 꾸준히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장녀를 차기 왕위계승자로 일찌감치 점 찍어놓고서 결국 왕위를 이어준 것이 아닌가 추정해볼 수 있겠다.

    출처: 나무위키 선덕여왕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와 고려시대의 경우 유교사상으로 인해 남녀의 역할과 지위가 구분되어 있어 당시 여성들이 권력의 주인이 되는것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신라시대의 경우 남자와 여자가 어느정도 동등한 지위를 가지는것이 허용된 평등한 사회였습니다. 이에 따라 여자들도 다양한 분야에 진출하였으며 최고 권력인 여왕으로 책무를 맡을 수 있었습니다.

    선덕여왕은 신라시대 가장 유명한 여왕중 한명으로 27대 진평왕의 딸로 태어나 남평왕과 함께 신라 최고의 권력자로 국가를 통치 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에서는 성골 출신만 왕이 될수 있었는데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어 큰딸인 덕만공주가 왕이 될수 있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박남근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시대는 사람을 등급으로 나누던 골품제도 라는것이 있었습니다.

    성골이라는 왕족만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왕족끼리 혼인을 하니 비정상적이게 되었고 아들을 낳지 못한 증평왕이 성덕 선덕 그리고 또한명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 안녕하세요. 축복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는 골품제도를 매우 중요시 여기던 나라였습니다.

    강력한 신분제 사회였지요. 이중에 성골이 왕으로써 이어졌는데 성골 끼리만 혼인으로 인하여 유전병 등으로 인하여

    점차 성골의 씨가 마르게 됩니다. 결국 신라에서도 남자가 왕이 되어 이어져 왔으나 왕을 이어받을 성골 남자가 없어지고

    성골인 여자만 남게 되고 성골 출신 중인 여자가 왕위를 이어받게 되니 그들이 진덕여왕, 선덕여왕입니다.

    이 여왕들이 사망한 후에는 성골이 존재하지 않아 진골 귀족중에 왕위가 이어졌고 그가 무열왕 김춘추 입니다.

    평등한 나라였다고 하기보다는 무엇보다 성분을 제일 중요하게 여겼던 골품제 국가였던 것으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귀족 지배 계급은 "성골"과 "진골" 핏줄 계급 가문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골품 제도라고 부릅니다. 성골 계급은 신라 왕실에서 왕이 될 수 있는 핏줄의 가문이었고 진골 계급은 귀족 가문의 지배 계층이었지만 신라의 왕이 될 수 없는 신분이었지요. 바로 이러한 이유로 오직 신라에만 성골 출신의 여왕이 탄생 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