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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정한낙지284
단정한낙지28423.02.25

우리나라 역사적으로 신라시대에만 여왕이 있었나요?

인문 역사적으로 신라시대에만 여왕이 탄생했던걸로 알고 있습니다. 한국 역사시대 동안 신라에서 여왕이 나올수 있었떤 이유는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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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8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2.25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신라에는 '골품 제도'라고 하는 신분 제도가 있었습니다. 왕족에는 성골과 진골이 있었고, 귀족은 육두품, 오두품, 사두품, 삼두품, 이두품, 일두품으로 나뉘며 벼슬, 결혼, 옷차림, 집 등 모든 것을 신분에 따라 정해진 대로 따라야만 했다고합니다.

    왕을 뽑을 때도 이 골품 제도를 따라야 했지요. 부모가 모두 왕족인 사람을 '성골'이라 했는데,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26대 왕인 진평왕이 세상을 떠난 후에 진평왕에게는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어서 왕위를 이을 성골 남자가 없었습니다. 성골 중에는 진평왕의 딸인 덕만 공주가 있었지요. 성골이 단 한 명이라도 있는 한 성골이 왕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결국 덕만 공주가 왕이 되었다고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탄생하게 되었고 성골이 왕이 되어야 한다는 골품 제도 때문에 신라에 여왕이 세 명이나 있었던 거라고합니다.


  • 안녕하세요. 정광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여성으로서 여왕의 지위까지 올랐다는 점은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의미있고 자랑스러운 일인것 같습니다.

    신라시대에 여왕의 탄생 이유는 그당시 고대 신라에 존재했던 골품제도와 성골 진골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 독특한 신분제에서 왕족은 성골, 진골에 속했고 일반 귀족들은 6두품 이하에 속했습니다. 이 혈통의 중요성으로 인해 진평왕에게 아들이 없었고 딸만 있었고 주변 친족도 같은 사정이었습니다. 그래서 왕위를 계승할 자격이 되는 성골 남성들이 없음으로 인해 여성인 선덕여왕이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역사가 남자를 왕으로 세웠던것에 비해 신라에서 이런 일이 가능할수 있는 이유는 골품제와 함께 당시 신라에서의 남성과 여성의 지위가 비슷했기때문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시대에 여왕이 탄생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인 이유는 아마도 신라의 특수한 여성적 지위와 신라의 정치체제의 특징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1. 신라의 여성적 지위: 신라는 고구려나 백제와 달리 여성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높았습니다. 신라의 여성들은 산업과 경제활동에서 큰 역할을 하였고, 또한 토지와 재산의 상속권을 가졌습니다. 이러한 여성적 지위는 여성이 정치적 지위를 차지하는 데에도 일부 기여하였습니다.

    2. 신라의 정치체제: 신라는 중앙집권적이고 왕권을 강조하는 체제였습니다. 이러한 체제에서는 왕이 권력을 집중하고, 권력을 부여받은 부족의 지위가 중요했습니다. 이런 정치적 지위는 왕의 가문에서 나온 여성들에게도 일정한 지위를 부여하였습니다.

    3. 왕족 내의 여성 인사: 여성들은 신라의 왕족 내에서도 권력과 지위를 가졌습니다. 대표적인 예로는 세속적인 지위를 가진 공주들이 있습니다. 이들 공주들은 왕권의 계승자가 되는 경우도 있었고, 정치적 결혼을 통해 다른 왕국과의 연합을 이루는 등 왕족의 권력에 일부 기여하였습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들이 결합하여 신라시대에 여왕이 탄생할 수 있었습니다. 단, 이런 특수한 사회적/정치적 배경이 없었다면 여왕이 등장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신라의 계급제도인 골품제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선 그것을 알기 전에 신라의 계급제도를 먼저 살펴 보아야 한다.

    신라 계급제도는 "골품제"로 계급에 따라 정치적인 출세는 물론, 혼인, 가옥의 규모, 옷 색깔 등이 정해졌다.

    결혼은 같은 신분끼리 할 수 있었는데 만약, 서로 다른 계급끼리 결혼을 하게 되면 아랫 신분을 따라가야했으며 태어나는 아이조차도 아랫 신분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성골이나 진골은 같은 계급끼리 결혼을 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짝이 사라지면서 근친혼이 성행했다. 아시다시피 근친혼은 불임, 낮은 임신율, 기형아 출산으로 현재 금지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들은 근친혼의 부작용을 몰랐을까? 그 시대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모르지만, 그들은 자신의 혈통과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해야했다. 진평왕이 즉위하기 전, 진지왕이 신라를 다스렸는데 이 왕은 주색에 빠져 음란하고 정사가 어지러워 4년 만에 폐위된다. 그러면서 그의 아들 용춘(용수)도 성골에서 진골로 족강이 된다. 용춘(용수)와 진평왕의 딸, 천명공주와 결혼해 낳은 김춘추도 이 때문에 진골 출신이 되었던 것이다. 김춘추는 나중에 최초의 진골 출신의 왕이 된다. 아무튼 진평왕이 즉위하고 신라를 삼국통일하는데 기여한다.

    그러나 진평왕은 왕자가 없고,

    공주만 셋이라 왕위를 어떻게 물려줄지 고민을 하는데 엎친데 덮친격 성골 출신이 남아있지 않아,

    결국 덕만공주(선덕여왕)에게 왕위를 물려준다.

    출처: https://royalbloger.tistory.com/278 행복을 꿈꾸는 청춘스토리


  • 안녕하세요. 김태호 인문·예술 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여왕은 신라시대 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고려, 조선 시대에도 존재했습니다. 다만, 여왕이 선위에 있었던 신라시대는 여왕이 국가를 이끌어가는 권한을 가진 진정한 여왕제도였습니다.

    반면, 고구려, 백제, 고려, 조선 시대의 여왕들은 왕에 대한 후견인 역할이나 신분이 높은 가문의 출신으로 왕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특히, 조선 시대의 여왕들은 왕에게 후견을 제공하면서도 왕권에 간섭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따라서, 여왕들은 그저 왕의 배우자로서의 지위를 가지기도 하였습니다.


  • 안녕하세요. 손용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신라에만 유독 여왕이 있었던 가장 주요한 원인은 신분제도인 '골품제도'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고구려나 백제에서는 왕에게 아들이 없는 경우 유력한 왕족의 한 사람이 왕위를 계승하면 되었습니다. 반면에 신라에서는 성골(聖骨) 신분이 아니면 왕위를 계승할 수 없었다고 하지요. 그래서 성골 출신인 여왕이 탄생 하게 되는 것 입니다.


  • 안녕하세요. 이예슬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상 여왕은 신라시대의 선덕여왕, 진덕여왕 그리고 진성여왕이 있는데, 고려 이후의 국가나 삼국시대의 고구려나 백제의 왕 등 여왕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네, 성별보다 신분(골품)을 중시했던 신라 시대에만 여왕이 존재하였었고, 다른 시대에는 여왕이 존재하지 않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 - 추가적으로 궁금하신 점은 의견으로 남겨주시면 제가 아는 범위 내에서 성의껏 답변을 드려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