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안증도의 태평염전은 등록문화재360호로 지정되었다고 하는데요. 염전시작은 언제부터였나요?
우리나라 천일염을 이야기하면 전남신안을 이야기 합니다 신안에서 가장오래된 천일염전은 증도의 태평염전이라고 하는데 등록문화재360호로 지정되었다는데 몀전시작은 언제부터 였는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소금의 고장으로 잘 알려진 비금도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천일염을 생산해 낸 곳으로 염전이 생긴 것은 1946년이며 해방이 되고 개펄을 막아 구림염전을 개척한 것이 시초라고합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국의 경우 소금광산이 거의없어 암염이 나지 않았으며 옛 기록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고구려가 소금을 해안지에서 운반해 왔다는 기록을 볼때 고대부터 이미 해안가의 염전을 통해 소금을 얻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1288년 처음으로 염전에서 세금을 거두었고 1309년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도염원을 두어 염분을 국가에서 관장하여 직접 소금을 제조, 판매하는 전매제도로 재정수입원을 삼았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소금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조에
소금을 해안지방에서 운반해 왔다는
대목이 있을 뿐입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는 1288년(충렬왕 14) 처음으로
염전에서 세금을 거두었고, 1309년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면서 도염원(都鹽院)을 두어 염분(鹽盆)주4을 국가에서 관장하여 직접 소금을 제조·판매하는
전매제도로 재정수입원을 삼았습니다.
19세기 말 우리나라의 소금 생산량은 150만 톤 이었고 소비량은 210만
톤으로 부족분은 일본, 타이완, 청나라로부터 수입하여 충당하였습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53년 6·25전쟁 후 피난민들을 정착시키고 소금 생산을 늘리기 위하여 조성한 염전으로,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2007년 11월에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원래 증도는 전증도와 후증도로 나뉘어 바닷물이 빠지면 징검다리로 건너다녔는데, 두 섬 사이를 둑으로 연결하여 형성된 간척지에 이 염전을 조성하였다.
1953년 정부에서 민간사업자인 척방산업(주)에 영업권을 넘겨주었고, 1963년부터 대평염업(주)이 운영하다가 문을 닫은 것을 1985년 태평염업사가 인수한 뒤 태평염전으로 상호를 변경하여 지금에 이른다. 면적은 462만㎡로 국내에서 단일 염전으로는 최대 규모이다. 연간 1만 6000t의 천일염을 생산하는데, 이는 국내 생산량의 6%에 해당한다.
염전은 북쪽에 동서 방향으로 긴 장방형의 1공구가 있고, 남쪽에 2공구가, 남북 방향으로 3공구가 자리 잡고 있다. 1985년부터 생산시설을 현대화하여 소금밭에서 생산된 소금을 컨베이어 벨트를 이용하여 소금창고로 이동하는 시스템, 채렴(採鹽)과 운반구 및 염수(鹽水) 자동공급 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소금밭은 67개로 나뉘어 있고 이에 딸린 67동의 소금창고가 3㎞에 걸쳐 길게 늘어서 있다. 이 가운데 1953년 염전을 조성할 때 함께 지어진 석조(石造) 소금창고는 남한에서 알려진 석조 소금창고로는 유일한 것으로 2007년 일부를 개조하여 소금박물관으로 개관하였으며, 염전과 함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밖에 염부(鹽夫)들의 사택과 목욕탕, 관리사무실 등의 건축물들이 남아 있다. 염전설비 정비기간인 1~3월을 제외하고는 방문객들이 직접 소금 만드는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염전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출처 :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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