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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따운안경곰70
아리따운안경곰7023.05.19

조선 시대 경저리제도는 통일 신라의 상수리제도와 고려 시대 기인 제도와 비교했을때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통일 신라의 상수리제도와 고려시대의 기인제도는

일명 인질제도라 알고 있는데

조선 시대의 경저리 제도는 어떤 목적의 제도인가요?


경저리제도도 그 대상이 일반인이나 천민이 아닌

향리인데

상수리제도, 기인제도와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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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2개의 답변이 있어요!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지방의 각 고을에서는 서울에서 편의를 돕는 경저와 감영을 연락하는 영저를 두었습니다. 이는 고려 초에 지방 향리의 자제를 선발하여 '기인'이라 이름을 붙이고 서울에서 일하게 한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후 중앙집권이 강화되면서 향리의 지위가 약해지며, 경저들은 고역에 사역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경저가 서울에 두어서 공물 상납과 연락 업무를 담당했습니다. 또한 본읍 향리의 서울 내왕 때 여러 가지 편의 업무를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이때 있었던 조선 시대 경저리 제도는 중앙과 지방 관아의 연락 사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지방 수령이 서울에 보내는 공문을 처리하는 제도였습니다 경저에는 몇 사람의 경저리를 두었고, 이후에도 존속하였습니다.

    차이라고 한다면 상수리 제도는 지방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제도였고 경저리 제도는 실무를 위한 제도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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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고려 초기의 기인이 맡았던 임무인 각 고을의 공물 상납 및 연락 등을 담당하는 지방 각관의 분실로 경저를 서울에 두었습니다. 공물 상납을 위하여 상경한 공리(貢吏)들은 경저에서 숙박하는 것이 통례였고, 공납 물품도 여기를 경유하여 각사에 상납되었습니다. 경저에는 몇 사람의 경저리(京邸吏)를 두었는데, 그 장을 경주인(京主人)이라 하고 그 아래 서원(書員)·서리와 관노를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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