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사회시설인 의창과 상평창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세요.
조선시대 사회정책은 농번기에 농민을 잡역에 동원하지 못하게 하고 재해를 당한 농민에게 조세를 감면해 주고 이후에도 농민의 생활이 불안정하자 국가에서 의창과 상평창을 설치했다고 하는데 의창과 상평창에 대해 자세한 내용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의창은 고려와 조선시대 농민을 구제하기 위해 각 지방에 설치한 창고로 기원은 수의 율령에서 유래된 것으로 고려시대에는 태조 왕건이 이를 흑창이라하여 춘궁기에 농민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 후 이를 회수했으며 986년 흑창의 곡식을 1만 석 더 보충하여 이를 의창이라 했습니다.
의창에는 주로 곡식을 저장했지만 포, 소금, 간장 등도 저장해 기근에 대비했고 이러한 물품으로 진휼하는데는 진대와 진급이 있었는데 진급은 무상으로 분급, 진대는 양식과 물품을 나누어주고 이를 가을에 환납하는 유상분급 제도입니다.
운용과정에서 곡식 회수가 어렵다는 문제 등이 제기되어 1525년 의창을 폐지하고 일체의 구제사업을 구휼청에서 관장했습니다.
상평창은 고려시대에 의창과 더불어 설치된 기구로 의창이 농민 구휼을 목적으로 삼은 것과 달리 상평창은 곡식 물가 조절을 목적으로 하며 고려 성종 12년 처음으로 양경 및 12목에 설치되었습니다.
풍년이 든 해에는 자연스레 곡물의 가격이 내려가므로 이때 웃돈을 적당히 주어 수매하여 곡물 가격의 비정상적인 하락을 방지하고 사들인 곡식을 저장해두었다가 곡식 값이 오르면 저장해놓은 곡식을 싼 값에 풀어주면서 곡식 가격의 하락을 유도해 소비자들에게 곡식의 구매 부담을 완화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진광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종은 상평창을 설치하면서 여기에 米 6만 4천 석을 주어 그 중 5천 석 은 개경의 상평창에, 나머지 5만 9천 석은 서경과 12목 등 모두 15개의 상 평창에 분급하였다.316) 상평창의 관리는 개경의 경우, 市■을 관리·감독하던 京市署로 하여금 穀·布의 가격 변동에 따라 이를 관리·조절하게 하는 한편, 大府寺와 司憲臺가 출납을 공동 관리하게 하였으며, 서경은 分司司憲臺에 위임하였다. 한편 기타 州郡倉은 당해 지역의 관원이 이를 관리하도록 하였다.
양경의 사헌대에서 이를 관리하게 한 것은 운영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폐단을 막아 보려는 데 그 뜻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상평창이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그 실태를 알려주는 자료가 거의 없다. 다만 인종 원년(1123) 고려에 다녀간 송의 徐兢이 편찬한≪高麗圖經≫에 의해 상평창이 존속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317)
그러나 이보다 먼저 현종 3년(1012)에 서경이 지난해의 수재와 한재로 인하여 곡가가 등귀하여 백성들이 곤란하게 되었다며 소관 관청으로 하여금 창고를 열어 진휼하라는 지시를 내린 바 있는데,318) 이 때의 소관 관청이 상평창이었는지 또는 의창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곡가가 등귀하여 창고의 곡식을 풀었던 것으로 보아, 그것은 상평창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상평창이 처음에는 물가조절 기구로 출발하였지만 뒤에는 진대의 역할도 담당하였기319) 때문이다.
또 현종 5년 6월에는 풍년이 들어 쌀값이 떨어져 거친베(麤布) 1필이 쌀 12말이나 되므로 그 값을 조절하도록 삼사에서 건의하므로 이에 따랐다고 한 것으로 보아,320) 상평창이 물가조절 기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다. 또한 삼사에서 이를 건의한 것은, 삼사가 중외 전곡의 출납과 회계를 맡던 기구였으므로 경제의 안정과 농민의 손해를 덜어주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상평창은 그 실재가 확인된 인종 때까지는 그 기능을 유지하였으나, 그 이후 발생한 내우외환으로 국가적 혼란기를 맞아 의창과 같이 그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고 보여진다. 상평창이 다시 설치된 것은 충선왕 즉위 년(1308)이었다. 정치적 개혁을 시도했던 충선왕은 여러 도의 務農使 李厚·陸希贄·崔伯倫 등을 불러 “典農司를 설치한 것은 常平倉을 설치하여 백성에게 糶糴을 실시, 그 급한 것을 구하는 데에 있다”321)고 한 것으로 보아, 이 때 상평창이 다시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충선왕은 얼마 후 아들인 충숙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원나라로 갔고, 그 뒤 계속된 원의 수탈과 權門世族의 횡포, 충정왕 이후 창궐한 왜구의 침입은 이러한 제도의 정상적 운영을 방해했다. 이 때문에 상평창은 그 기능이 다시 정지되었고 공민왕 20년(1371) 復置되었으나,322) 전국적으로 다시 설치된 것은 공양왕 원년(1339) 대사헌 趙浚 등의 건의에 의해서였다.323)
이와 같이 상평창은 고려 전기에는 그 기능을 유지하면서 존속하였으나, 후기에는 치폐를 거듭하였기 때문에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상평창은 본래 물가조절이 목적이었지만, 고려 475년간 수재와 한재가 평균 2년에 한번씩 일어났기 때문에324) 물가조절과 함께 의창과 같이 진대의 기능도 가졌던 것이다. 상평창이 물가조절을 위한 좋은 제도였음에는 틀림없지만, 고려시대가 가지고 있었던 여러 문제점들이 이러한 제도의 원활한 운영을 방해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그 기능을 유지하지는 못하였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경제&금융 분야, 재무설계 분야, 인문&예술(한국사) 분야 전문가, 지식iN '절대신 등급' 테스티아입니다.
✅️ 의창의 경우 환곡 등을 통해 빈민에 대한 구휼을 담당했던 기관이었고, 상평창은 물가를 조절하여 백성들의 삶을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즉, 전자는 '은행'의 역할, 후자는 '중앙은행'의 역할을 하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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