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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가오리188
즐거운가오리18823.05.21

조선시대 오가작통제을 시행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조선시대 때 시행된 오가작통제는

어떤 사회적 이유로 시행된 것인가요?

촌락에도 관리가 있었을 건데

굳이 오가작통제를 시행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그리고

오가재통제의 통수는 누가 뽑았으며

실제 관리급의 대우를 받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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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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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21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5가구를 1통으로 편성, 통내 가호에 연대 책임을 부과하여 거주지 이탈, 절도 등을 방지하고 아울러 세금 수취의 편의를 꾀한 행정 제도.

    *내용

    오가작통법은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대 한 차례 논의된 바 있으나 시행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단종(短宗, 재위 1452~1455) 대에 최초로 시행되었는데, 5가호를 1통으로 묶어 상호 감시를 통해 강도 및 절도범 은닉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후 조선 최초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도 해당 내용이 수록되었는데, 5가구마다 1통을 설치하고, 몇 개의 통을 하나의 리(里)로 편성한 다음, 리마다 리정(里正)과 유사(有司)를 두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 리를 몇 개 묶어 면(面)으로 편성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 입법된 오가작통법은 오랜 시간 유지되지는 못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17세기 후반 다시금 오가작통법의 도입이 조정의 현안으로 떠올랐는데, 당시 오가작통법은 조세 수취 대상자들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 결과 숙종 원년 전국적으로 실시되었으나 역시 오랜 기간 유지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천주교와 동학교도에 대한 색출을 위해 「오가작통사목(五家作統事目)」이 다시 마련되기도 하였다.

    출처: 우리역사넷 오가작통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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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7세기 중엽 이후 조선 정부는 촌락 주민들에 대한 통제를 원활히 하고자 이웃 다섯집을 하나의 통으로 묶고 통수를 두어 통 내를 관장하는 오가작통제를 실시, 이는 일종의 자치 조직으로 다섯집을 한통으로 하여 통수를 두고 다섯 통마다 이정을 두었으며 면에 권농관을 두었습니다.

    이는 농민의 토지 이탈을 막고 각종 역과 조세부담자의 동태를 파악하여 연대 책임을 지우는데 이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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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시대 오가작통이 언제부터 실시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오가작통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428년(세종 10)의 『세종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즉, 『세종실록』에 “주(周)·당(唐)의 제도를 모방하여 서울의 5부(五部) 각 방(坊)에는 다섯 집을 비(比)로 하여 비장(比長)을 두며, 성 밑 각 면(面)에는 서른 집을 이(里)로 하여 권농(勸農) 한 사람을 둘 것”을 내용으로 하는 한성부에서의 건의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이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그 뒤 1455년(단종 3)에는 강도와 절도의 방지를 위하여 유품(儒品)과 유음자제(有蔭子弟)를 제외하고 평민의 다섯 집을 한 통으로 조직하여 통내에서 강도·절도를 은닉하는 것이 발각되면 통 전체를 변방으로 이주시킬 것을 입법하였습니다.


    이것은 세조 즉위년에 재차 확인되고 있으며, 1457년(세조 3)에는 저수관개의 이(利)를 감독하기 위하여 8도 각 고을에 통주(統主)를 설치하였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오가작통은 1428년 이후 단종 연간에 처음 실시된 것으로 추측됩니다.


    오가작통은 『경국대전』의 완성과 더불어 더욱 정비되어 법제화되었습니다. 즉, “서울과 지방 모두에 다섯 집을 한 통으로 하여 통에는 통주를 두었으며, 그리고 지방에는 매 5통마다 이정(里正)을, 매 면마다 권농관을 두며, 서울에는 매 일방(一坊)마다 관령(管領)을 둔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마련된 오가작통법은 향약의 실시 또는 호패법의 실시 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면서 실시되고 있었습니다.


    그 구체적인 기능은 강도·절도방지, 풍속의 교화와 유민방지, 호적작성에 있어서의 탈루자(脫漏者) 방지 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시행에 있어서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가작통법 실시에 대한 계속적인 논의가 이를 말해 줍니다. 조선 전기의 오가작통법은 1675년(숙종 1) 윤휴(尹鑴)의 건의에 따라 비변사에서 「오가작통사목(五家作統事目)」 21개조를 제정하면서 전국적인 실시가 강행되었습니다.

    「오가작통사목」의 내용은 다섯 집을 한 통으로 하여 통수의 관장을 받고, 5∼10통을 소리(小里), 11∼20통을 중리(中里), 21∼30통을 대리(大里)로 하여 이에는 이정과 이유사(里有司) 각 1명을 두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의 행정을 면에 귀속시켰는데, 면에는 도윤(都尹)과 부윤(副尹) 각 1명을 두어 이정을 지휘하게 하였고, 면윤(面尹)은 수령의 감독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논의의 대상이 되었던 오가작통법은 17세기에 이르러 정착된 면리제(面里制)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명실공히 정부의 제도적인 뒷받침 아래서 시행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오가작통사목」의 내용에서 보이는 오가작통법시행의 표면적인 이유는 농경을 서로 도우며, 환란을 상호구제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유민의 발생을 규제하고 각종 조세(租稅)의 납부를 독려하는 것이었습니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천주교와 동학의 금압과 교도의 색출을 위하여 일부 집권층에 의하여 강행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사정에서 1884년(고종 21)에는 내무부의 건의에 따라 「오가작통사목」이 마련되었습니다. 1896년에는 전국의 호적작성에 있어서 열 집이 한 통으로 편성되기도 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도 오가작통법은 결코 행정적인 기능을 원활히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국가의 지배력이 전통적인 생활공동체로서의 자연촌의 강인한 질서를 해체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가작통법의 시행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강화와 이완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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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황정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관리는 엄격하면 엄격할수록 왕권이 더 강화되기 때문에 이런 제도를 실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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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가작통법은 질문자의 이야기처럼 1485년, 한명회(韓明澮)에 의해 채택되어 《경국대전》에 등재되었는데 경국대전에 기재된 내용에 의하면 수도인 한성에서는 5개의 호(戶)를 1개의 통(統)으로 구성하고 리(里)는 5개의 통(統)으로 구성하며 면(面)은 3~4개의 리(里)로 구성하여 통에는 통주(統主) 또는 통수(統首)를 두어 조직을 강화하였습니다.


    지방에서도 한성과 동일하게 5개의 호(戶)를 1개의 통(統)으로 구성하고 리(里)는 5개의 통(統)으로 구성하여 3~4개의 리(里)들로 면(面)을 형성하여 면에는 권농관(勸農官)이라는 관리관을 두었으나 초기에는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조선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었습니다.


    오가작통법은 주로 호구를 밝히는 동시에 범죄자의 색출과 조세 징수, 부역 동원 등을 목적으로 만들었으나 운영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숙종(肅宗) 때인 1675년에는 ‘오가작통법 21조’를 작성하여 오가작통제를 강화하였습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호패(戶牌)와 함께 호적의 보조수단이 되었으며 역(役)을 피하여 호구의 등재없이 이사와 유랑을 반복하는 유민(流民)들과 도적들의 행태를 방지하는 데 주로 이용되었고 순조(純祖)와 헌종(憲宗) 때에는 오가작통제의 연대 책임을 강화하여 ‘한 집에서 천주교도가 적발되면 다섯 집을 모조리 처벌하는 방식’으로 천주교도를 색출하는데 이용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즉 헌종 때까지 존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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