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작통법이란 정확하게 무엇이며, 조선시대 언제부터 시행되었나요?
조선시대에는 오가작통법이라는게 있어서, 주민들이 서로 감시할수있게 했다고 들었는데요, 근데 오가작통법이란 정확하게 무엇인가요? 그리고 조선시대 언제부터 시행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485년에 한명회에 의해 《경국대전》에 등재되었다. 《경국대전》에 기재된 내용에 의하면 수도인 한성에서는 5개의 호(戶)를 1개의 통(統)으로 구성하고 리(里)는 5개의 통(統)으로 구성하며 면(面)은 3~4개의 리(里)로 구성하여 통에는 통주(統主) 또는 통수(統首)를 두어 조직을 강화하였다.
지방에서도 한성과 동일하게 5개의 호(戶)를 1개의 통(統)으로 구성하고 리(里)는 5개의 통(統)으로 구성하여 3~4개의 리(里)들로 면(面)을 형성하여 면에는 권농관(勸農官)이라는 관리관을 두었으나 초기에는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조선 중기부터 본격적으로 활성화되었다.
오가작통법은 주로 호구를 밝히는 동시에 범죄자의 색출과 조세 징수, 부역 동원 등을 목적으로 만들었으나 운영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숙종 때인 1675년에는 ‘오가작통법 21조’를 작성하여 오가작통제를 강화하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호패와 함께 호적의 보조수단이 되었으며 역(役)을 피하여 호구의 등재없이 이사와 유랑을 반복하는 유민(流民)들과 도적들의 행태를 방지하는 데 주로 이용되었고 순조와 헌종 때에는 오가작통제의 연대 책임을 강화하여 ‘한 집에서 천주교도가 적발되면 다섯 집을 모조리 처벌하는 방식’으로 천주교도를 색출하는데 이용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다.
출처: 위키백과 오가작통법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가작통법은 조선시대 다섯 집을 1통으로 묶은 호적의 보조조직입니다.
조선 최초의 오가작통법은 단종 연간에 시행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1485년 한명회의 발의에 따라 채택되어 경국대전에 올랐는데 이에 의하면 한성부에서는 방 밑에 5가작통의 조직을 두어 다섯집을 1통으로 하여 통주를 두고 방에 관령을 두었습니다.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오가작통법은 5가구를 1통으로 편성, 통내 가호에 연대 책임을 부과하여 거주지 이탈, 절도 등을 방지하고 아울러 세금 수취의 편의를 꾀한 행정 제도입니다.
세종대 한 차례 논의된 바 있으나 시행되지는 못하였습니다. 이후 단종 대에 최초로 시행되었는데, 5가호를 1통으로 묶어 상호 감시를 통해 강도 및 절도범 은닉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후 조선 최초의 법전인 경국대전에도 해당 내용이 수록되었는데, 5가구마다 1통을 설치하고, 몇 개의 통을 하나의 리(里)로 편성한 다음, 리마다 리정(里正)과 유사(有司)를 두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리를 몇 개 묶어 면(面)으로 편성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 입법된 오가작통법은 오랜 시간 유지되지는 못하였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17세기 후반 다시금 오가작통법의 도입이 조정의 현안으로 떠올랐는데, 당시 오가작통법은 조세 수취 대상자들을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그 결과 숙종 원년 전국적으로 실시되었으나 역시 오랜 기간 유지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19세기 천주교와 동학교도에 대한 색출을 위해 오가작통사목이 다시 마련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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