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 시기에 사간원 독립이라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태종 이방원 시기에 사간원 독립이라는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 것인가요?
사간원을 독립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392년(태조 1) 7월의 신반관제(新頒官制)에서는 고려 말의 문하부 낭사의 제도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러나 1401년(태종 1)에 문하부를 혁파하고 의정부를 설치할 때 문하부 낭사는 독립되어 사간원이 되었다. 중국과 고려시대에 중서성·문하성의 하위직 관원이었던 간관이 조선시대에 비로소 독립된 관부가 된 것이다. 이때 사간원의 직제는 세조 때에 몇 차례의 변동을 거쳐 『경국대전』에 고정되었고,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때 관제가 개혁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사간원의 직무는 고려시대에는 간쟁과 봉박( 옳지 않음을 글을 올려 논박함)이었다. 1392년에는 ① 헌납간쟁, ② 박정차제, ③ 수발교지, ④ 통진계전(계문이나 상소를 왕에게 알리거나 올림)이었다. 이 당시 문하부 낭사의 직무는 간관으로서의 기능(①, ②)과 왕명과 문서의 출납 업무(③, ④)였다. 그러나 1401년((태종 1) 문하부가 혁파될 때 간관의 업무는 독립하여 사간원이 되었고, 출납 업무는 승정원으로 이관되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시간원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조선 왕조는 체계적인 기본 법전으로서 경국대전을 만들고 법전에 준거하여 정치를 시행하였습니다. 이로써 조선 왕조는 수준 높은 법치 국가로 한 걸음 전진하였습니다.
경국대전 체제는 동양 전래의 6전 제도와 군주제를 바탕으로 한 것이지만, 그것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재구성한 점에서 독자성을 가집니다.
중앙에는 의정부라는 특유한 기구를 두어, 재상의 합의를 통해서 정책을 주도하게 하였습니다. 재상권과 합의제의 발달은 우리 나라 정치 제도의 한 특색 있는 전통으로 내려온 것으로서, 정책의 최고 결정권은 국왕에게 있었지만, 재상의 합의를 거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제도였습니다.
6조 및 6조에 딸린 여러 속관(屬官)은 직능별로 행정을 분담하였으나, 고급 행정 관원은 정책 결정에도 참여하여 기능적 분화와 통일성을 조화시켰습니다.
정책 결정과 정책 집행 과정의 착오와 부정을 막기 위하여 언관(言官)으로서 사간원을 독립시키고, 감찰관으로서 사헌부를 두었습니다. 또한, 정책 결정과 행정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하여 홍문관(집현전의 후신), 예문관, 춘추관을 두고, 군주와 대신이 정기적으로 한 자리에 모여 학술과 정책을 토론하는 경연(經筵) 제도를 두었습니다. 이 밖에, 정책 결정 과정에 여론을 반영하기 위하여 상소 제도가 확대되었습니다. 언론, 학술, 감찰관의 기능은 조선 왕조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으로, 가장 우수하고 강직한 신하에게 맡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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