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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푸른점
창백한 푸른점23.08.22

견훤은 왜 적국인 왕건에게 항복을했을까요?

후백제의 왕이었던 견훤은 평생을 왕건과 전쟁을하며 싸웠는데요

왜 노후에 왕건에게 항복을 하고 왕건의 통일을 도왔던건가요?

특별한 이유가 있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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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의 개수
3개의 답변이 있어요!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8.22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견훤의 아들 신검은 아버지인 견훤이 자기에게 왕의 자리를 물려 주지 않고 자신과 배다른 형제인 금강에게 물려주려합니다. 그걸알고 난 신검은 아버지를 절에 가두고 자기고 왕이 되고 그 뒤 견훤은 절을 탈출하여 왕건에게 항복을 하고 견훤과 왕건은 같이 신검이 있는 후백제를 치러갑니다. 견훤의 고려귀순이 결정적으로 후백제로선 타격이 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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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김기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견훤은 용맹스럽고 투지가 강한 인물이었고 호랑이가 젖을 먹여 키운 아이라고 합니다. 백제 땅에서 배출한 마지막 왕이기도 합니다. 아들 신검과의 권력다툼에서 밀려나 호랑이 키운 아이는 어느덧 가엾은 완산아이가 되어 눈물로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견훤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대항하기 위해 후백제를 세웠지만 그의 평생 라이벌은 고려태조왕건이었습니다. 견훤이 먼저 주도권을 잡아 승승장구했지만 후계자 선정문제로 갈등을 겪다가 금산사 불당에 갇히고 맙니다. 넷째아들 금강에게 자리를 물려주려는 것을 신검 양검 용검 등이 알고 저지른 행위입니다. 이후 견훤은 왕건에게 의탁하게 되었고 아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비극이 전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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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고려 태조 원년(918년) 견훤(甄萱)은 반란을 일으켜 나라 이름을 후백제라 하였다. 태조는 상주(尙州) 등에서 견훤과 여러 차례 맞싸워 이겼다. 태조가 고려를 개국하자 귀순하는 사람이 많았으나 오직 견훤만은 서로 왕래하려 하지 않았다. 얼마 후 견훤(甄萱)이 일길찬(一吉粲) 민합을 보내 즉위를 축하하였다. 동 3년 견훤이 아찬(阿粲) 공달을 보내 공작선(孔雀扇)과 지리산(智異山) 대로 만든 화살을 바쳤다. 겨울 10월에 견훤이 신라를 침공하였는데 신라에서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므로 군사를 보내 구원하였다. 동 7년 7월에 견훤(甄萱)이 아들 수미강(須彌康)과 양검(良劍) 등을 보내 조물군(曹物郡)을 공격하였다. 왕이 친히 군사를 이끌고 조물군(曹物郡)에서 견훤(甄萱)과 교전하였다. 견훤(甄萱)이 보낸 인질 진호(眞虎)가 병으로 죽었다. 견훤(甄萱)은 고려에서 그를 죽인 것이라 여겨 인질로 보내 준 왕신(王信)을 죽였다. 동 10년 견훤(甄萱)이 맹약을 어기고 누차 거병하여 변방을 침공하였다. 견훤(甄萱)이 왕신(王信)의 시신을 보내왔다. 9월에 견훤이 근품성(近品城)을 공격하여 불지르고 나아가 신라 고울부(高鬱府)를 습격하였다. 또 벽진군(碧珍郡)을 침략하였다. 12월에 견훤이 서신을 보내왔다. 곧 중국의 권유를 받아 정전하자는 제의였다. 동 11년에 왕이 견훤이 개과천선하기를 바란다는 답장을 보내었다. 견훤(甄萱)이 장군 관흔(官昕)을 시켜 양산(陽山)에 성을 쌓게 하였고 겨울에 견훤이 오어곡성(烏於谷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동 12년 신사일에 견훤이 5천의 군사를 이끌고 의성부(義城府)를 침범하였다. 견훤이 가은현(加恩縣, 현 경북 문경)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견훤이 고창군(古昌郡)을 포위하였다. 동 18년 3월에 견훤(甄萱)의 아들 신검(神劍)이 아버지는 금산사(金山寺)에 가두고 동생인 금강(金剛)은 죽였다. 여름 6월에 견훤이 막내아들 능예(能乂)와 딸 애복(哀福), 폐첩(嬖妾) 고비(姑比) 등을 거느리고 고려 정부에 들어오기를 청하였고 동 19년에는 사위인 장군 박영규(朴英規)도 귀순을 청하였다. 여름 6월에 견훤이 태조에게 아들들에게 벌을 주라고 부탁하므로 군비를 정렬하여 왕이 견훤과 함께 군사를 사열하고 전진하였다. 위력에 눌린 신검이 아우들과 함께 항복하였다. 견훤은 근심과 고민으로 등창이 나더니 며칠만에 죽었다.


    10년에 공산(公山) 동수(桐藪)에서 태조가 견훤과 싸우다가 불리하게 되었다.


    태조가 견훤과 조물군(曹物郡)에서 싸울 때 견훤이 고창군(古昌郡)을 포위하니 검필(黔弼)이 태조(太祖)를 따라 구원에 나섰다. 그 위세에 눌려 견훤이 화친을 청하였다. 박영규(朴英規)는 승주(昇州) 사람으로 견훤(甄萱)의 사위가 되었고 훤(萱)의 장군이었다.

    출처 : 한국 고대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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