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에 있었던 사라예보사건이란 것이 무엇인가요?
1914년에 있었던 사라예보사건으로 인해서
세계1차대전이 발발하게 되었다고 하던데
사라예보사건이라는 것이 어떤 내용인가요?
사라예보사건으로 국가들 간에 진영 대립 발생한 것인가요?
세계1차대전의 근원이라는 사라예보사건이라는 것이
어떤 사건이고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사라예보사건에 대해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와 그의 부인인 조피가 세르비아계의 학생인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빌미로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이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됩니다.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 패배한 뒤 보스니아를 비롯한 발칸반도의 국가들은 오랜 기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19세기 이후 민족주의가 확산되면서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독립운동이 고양되었습니다. 특히 슬라브인들에게 오스만제국을 유럽에서 몰아내고 남슬라브 단일 국가를 건설하자는 범슬라브주의가 확산, 19세기 초 두 차례에 걸친 봉기로 오스만제국에게서 자치권을 획득했던 세르비아가 그 중심에 있었습니다.
러시아도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이러한 범슬라브주의를 지원, 1877년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한 오스만 제국은 산스테파노조약으로 이스탄불을 제외한 모든 유럽의 영토를 잃었꼬,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루마니아가 독립, 불가리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자치권을 얻습니다.
그러나 열강들의 개입으로 발칸반도의 정세는 더 복잡해지는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제국의 서부를 잃은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발칸반도의 동진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있었고, 지중해 지역과 중앙아시아 등에서 러시아와 대립했던 영국, 프랑스, 독일을 끌어들여 러시아를 견제하려 합니다. 마침내 유럽의 열강들은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산스테파노 조약을 수정, 그 결과 불가리아 영토의 상당 부분이 다시 오스만제국으로 반환되었으며 보스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 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보스니아를 동진정책의 전초기지로 활용하려 했고, 1908년 보스니아를 완전히 병합합니다.
이러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정책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민족주의를 자극, 이 지역 정세를 불안정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젊은 보스니아 , 검은 손 등 범슬라브주의에 기초한 비밀결사가 1910년 이후 잇달아 구성되며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조카이자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아내 조피와 함께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를 방문, 그 날은 그들의 결혼 14주년 기념일이었고 세르비아인들에게 점령국 황태자 부부의 방문은 애초부터 반가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그 날은 세르비아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성 비투스 축일이자, 세르비아왕국이 오스만제국에 패한 코소보 전투가 벌어진 치욕의 날이라 세르비아인들의 반감은 더욱 커진 상태, 이에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들이 결성한 비밀경사인 검은 손 은 이들에 대한 암살을 계획하고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열차를 타고 보스니아에 도착한 대공 부부는 오전 10시를 조금 지난 시각에 일행과 함께 4대의 차를 타고 이동, 처음에는 무하메드 메드메흐바시치가 총으로 대공 부부를 저격하기로 되어있었으나 계획이 실패, 네델리코 차브리노비치가 차량행렬에 수튜탄을 던졌으나 대공 부부가 탄 차가 지나간 후 폭탄이 터지는 바람에 대공 부부는 무사하고 뒤따르던 차에 타고 있던 12명만 부상을 입게 됩니다. 암살에 실패한 차브리노비치는 독을 마시고 목숨을 끊으려 했으나 체포됩니다.
대공의 행렬은 속도를 높여 시 청사로 갔으며 시청에 도착한 대공부부는 일정을 바꿔 부상을 입은 사람들을 위문하러 병원으로 가는데 도중에 가브릴로 프린치프의 총격을 받아 살해됩니다.
대공부부를 살해한 프린치프는 독을 마시고 총으로 자살을 시도하나 체포됩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 정부가 이 사건에 관련되어있다며 7월 23일 세르비아에 최후의 통첩을 보냈고 그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반대하는 모든 단체를 해산하고 그 단체들과 관련된 관리들을 해임하며 암살과 관련된 모든 자들을 처벌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관리가 세르비아에서 이를 조사할수 있게 허용할 것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고, 통보한 48시간 이내에 세르비아가 이에 대한 답변을 내놓지 않자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은 7월 28일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게 됩니다.
러시아가 세르비아를 지원하기 위해 7월 29일 총동원령을 내리자 1879년 오스트리아와 군사동맹을 맺은 독일이 러시아에 총동원령 해제를 요구하는 최후 통첩을 보냈고 8월 1일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함녀서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 본격화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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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말에 등장한 제국주의는 20세기 초 식민지 쟁탈전이 심화되었습니다. 특히 발칸반도는 독일의 3B 정책과 범게르만주의가 영국의 3C 정책과 러시아의 범 슬라브주의가 충돌하는 화약고 지역이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오스트리아가 보스니아를 차지하게 되자 아드리아해로 진출을 추진하던 세르비아가 불만이 표출되어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처를 암살하였습니다.(1914) 사라에보 사건으로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고, 두나라의 동참하면서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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