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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속의 말똥구리
땅속의 말똥구리23.05.30

우리나라의 벼농사는 언제부터 시작됬을까요?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나라의 주식은 쌀밥입니다. 이런 쌀은 벼농사로 시작되는데요.

벼농사는 우리나라에 언제부터 시작된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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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탈퇴한 사용자
    탈퇴한 사용자23.05.31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 벼농사의 기원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벼농사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대륙을 거쳐 전래되었다고 하는 북방설과 중국의 산둥반도에서 해로를 타고 한반도 중부에 전래되었다는 설, 그리고 중국 강남에서 남해안지방을 기점으로 전래되었다는 남방설과 북방설 및 남방설의 절충설 등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벼농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지』 「위지(魏志)」 변진조(弁辰條)에 “변진국들은 오곡과 벼재배에 알맞다(宜種五穀及稻).”라고 씌어 있다.

    또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에 “ 다루왕 6년(33) 2월 영을 내려 나라의 남쪽 주군(州郡)에 벼농사를 시작하게 하였다(多婁王六年二月下令 國南州郡 始作稻田).”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1세기에 벼농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것이 서기전 1세기경이라는 사실(安滕, 『日本古代稻作史雜考』, 1951)에 비추어 과거 중국 문화가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전파과정으로 보아 우리나라 벼농사의 기원은 적어도 서기전 1세기 이전으로 보아야 타당하다는 설도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물로 경기도 여주시 흔암리에서 서기전 6, 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탄화미(炭化米)가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록상으로는 「신라본기」에 “남해왕 13년(16) 7월 멸구[蝗]의 피해로 백성이 굶주려 창고를 열어 구하였다(七月蝗民飢發倉廩救之).”는 기록과 「고구려본기」에 “태조 3년(55) 8월, 나라의 남쪽에 멸구가 곡식을 해쳤다(國南蝗害穀).”는 기록들이 있다.

    멸구는 벼식물에만 서식하며 지금도 매년 중국에서 기류를 타고 날아와 우리나라 벼농사에 큰 피해를 주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월동이 안 되는 곤충이므로 이들의 피해가 민생에 영향을 줄 정도였다면 벼는 적어도 서기전 1세기 이전부터 많이 재배되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330년에는 논벼 재배를 위한 용수를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의 저수지인 벽골지(碧骨池)를 축조한 것으로 보아 4세기경에는 남쪽에도 벼농사가 상당히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때의 벼농사 작부방식(作付方式)주2은 지력 유지로나 호당 경지규모로 보아 대체로 1년 또는 2년 만에 재배되는 휴한농법(休閑農法)이 관행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농무도감(農務都監) · 전농사(典農司) 등의 권농관(勸農官)을 두는 한편, 1363년(공민왕 12)에는 제학(提學) 백문보(白文寶)가 수차(水車) 보급을 건의한 것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벼농사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계속 재배면적이 증가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벼농사


  • 안녕하세요. 임지애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의 벼농사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대륙을 거쳐 전래되었다고 하는 북방설과 중국의 산둥반도에서 해로를 타고 한반도 중부에 전래되었다는 설, 그리고 중국 강남에서 남해안지방을 기점으로 전래되었다는 남방설과 북방설 및 남방설의 절충설 등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벼농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지』 「위지(魏志)」 변진조(弁辰條)에 “변진국들은 오곡과 벼재배에 알맞다(宜種五穀及稻).”라고 씌어 있습니다.

    또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에 “ 다루왕 6년(33) 2월 영을 내려 나라의 남쪽 주군(州郡)에 벼농사를 시작하게 하였다(多婁王六年二月下令 國南州郡 始作稻田).”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1세기에 벼농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벼농사


  • 안녕하세요. 신현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벼농사가 완전 처음 시작된 시기를 유추해보면 청동기 시대인 기원전 10세기경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전남 나주의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된 벼의 화분 분석 결과 기원전 2000년기 후반에 벼가 재배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도 있구요.

    대부분의 주류 의견은 기원전 10세기 경이라고 합니다. 한국사람에게 쌀문화 식습관의 역사가 굉장히 오래 됐네요.


  • 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의 벼농사가 중국에서 전래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경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대륙을 거쳐 전래되었다고 하는 북방설과 중국의 산둥반도에서 해로를 타고 한반도 중부에 전래되었다는 설, 그리고 중국 강남에서 남해안지방을 기점으로 전래되었다는 남방설과 북방설 및 남방설의 절충설 등이 그것입니다.


    우리나라 벼농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지』 「위지(魏志)」 변진조(弁辰條)에 “변진국들은 오곡과 벼재배에 알맞다(宜種五穀及稻).”라고 씌어 있습니다.


    또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에 “ 다루왕 6년(33) 2월 영을 내려 나라의 남쪽 주군(州郡)에 벼농사를 시작하게 하였다(多婁王六年二月下令 國南州郡 始作稻田).”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아 1세기에 벼농사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것이 서기전 1세기경이라는 사실(安滕, 『日本古代稻作史雜考』, 1951)에 비추어 과거 중국 문화가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간 전파과정으로 보아 우리나라 벼농사의 기원은 적어도 서기전 1세기 이전으로 보아야 타당하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유물로 경기도 여주시 흔암리에서 서기전 6, 5세기경으로 추정되는 탄화미(炭化米)가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록상으로는 「신라본기」에 “남해왕 13년(16) 7월 멸구[蝗]의 피해로 백성이 굶주려 창고를 열어 구하였다(七月蝗民飢發倉廩救之).”는 기록과 「고구려본기」에 “태조 3년(55) 8월, 나라의 남쪽에 멸구가 곡식을 해쳤다(國南蝗害穀).”는 기록들이 있습니다.


  •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처음 발굴된 쌀 자료는 1920년에 조사한 김해 패총에서 발견된 탄화미이다. 출토된 탄화미는 자포니카로 기원전 1세기경의 쌀로 밝혀졌다. 일본에서는 기원전 3세기의 쌀이 여럿 출토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자료를 토대로 일본 열도에서 한반도로 벼농사가 전래되었다고 주장하는 일본인 연구자도 있었으나, 현재 이 견해를 따르는 한국인 연구자는 없다.

    -출처:우리역사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