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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호저172
까칠한호저17224.03.10

권율은 문관임에도 어떻게 장군의 직위를 맡았나요?

권율 장군은 임진왜란 당시에 활약했던 장수입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무관이란 인식이 있었는데 문관이라더군요. 그런데 문관인 권율은 어떻게 장군의 직위를 맡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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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권율은 40살이 넘어도 관직에 나가지 않다가 가족의 권고로 뒤늦게 46세에 식년문과에 응시하여 급제한 인물입니다. 여러 관직을 거치다 임진왜란 직전에는 의주목사로 재직중 당상관으로 승진했지만 1592년 해직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중 광주목사로 제수되어 활약하다 1592년 이치전투에서 승리하여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습니다. 그리고 1593년 행주대첩 승리 공으로 도원수(정2품)에까지 올랐습니다.

    권율은 문관직이었으나 임진왜란 중 무관의 최고 관직인 도원수에 임명되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특별한 상황에서 문관 중에 최고위 관료가 무관직을 수행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전쟁 상황에서 군정 양쪽을 통솔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임명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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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녕하세요. 장경수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권율 장군은 임진왜란 초기 당시 의주 목사, 즉 수령이었다. 수령은 당연히 문관이다. 임진왜란 초기 수도 한양이 함락되었을 때 권율 장군은 전라도 순찰사의 지휘를 받아 전라도 인근의 근왕군을 끌어모라 동료 수령들과 함께 한양을 통해 북상한다.


    수원 인근에서 일본군과 마주친 권율은 '적의 대군이 코앞이니 우선 매복하며 명을 기다립시다.' 는 신중론을 펼쳤지만 함께 올라가는 상관이 동의하지 않았고 그렇게 임진왜란 조선육군 대패의 역사 중 하나인 용인전투를 치르고 패퇴한 뒤(이때 권율이 이끈 병사들은 질서있게 후퇴가 가능했다고) 남원으로 돌아와 다시끔 병사를 모으며 다음을 준비한다.


    그리고 곧, 남해에서 이순신장군의 수군이 활약을 시작하고 이에 따라 일본군의 보급선이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 일본군은 당연히 유리한 육지에서의 전력을 바탕으로 이순신 장군을 옥죄고자 전라도 지역으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이 때 전라도 지방으로 진격하는 일본군을 차단한 것이 바로 권율 장군의 이치 전투이다.


    이후 이어진 독선산성 전투에서 3천 명의 일본군을 죽이며 기세를 올린 권율 장군은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한양을 재점령할 기회를 노리기 위해 행주산성으로 그 다음 행보를 결정한다.


    요약하자면 문관 출신의 지방 도시 수령이었지만 난세를 겪으면서 지휘관으로써의 능력이 발화, 후세 사람들의 기억에 '장군'으로 기억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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