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최초 철기국가는 어디인가요?
보통 철기국가가 강력한 군사력을 유지하던데 한반도에서 최초의 철기국가는 어디인가요?? 그리고 어떤경로로 철기가 들어왔나요??
안녕하세요. 이승원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한반도의 철기 문화는 서기전 3세기대 전국계 철기의 유입과 함께 시작된다. 이후 낙동강 유역 내 철기 생산 기술의 보유는 이후 신라, 가야로 이어지는 철기 문화의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동북아시아 여러 지역의 철기 문화는 중국 대륙 철기 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르게 전개된다. 한반도 철기 문화는 전국시대 연나라를 비롯한 황해안과 인접한 지역권 간의 인적, 물적 교류 관계 속에 등장한다.
그중에서 연나라 철기 문화의 확산과 관련하여 주로 인용되는 한나라의 문헌인 『염철론(鹽鐵論)』에는 “연(燕)은 동호(東胡)를 엄습하여 퇴각시키고 천 리의 땅을 개척하였으며, 요동(遼東)을 지나 조선(朝鮮)을 공격하였다.” 라는 진개(秦開)의 동쪽 진출과 관련된 기록이 있다.
이를 근거로 철기 문화의 확산은 전국시대 연나라 철기 문화와의 관련성이 깊다는 점을 추정하기도 한다. 한반도의 초기 철기는 중국 동북 지역, 구체적으로는 연(燕)나라의 철기에 계통으로 보고 ‘연계 철기’, 혹은 ‘전국계 철기’라고 불린다.
전국시대 철기 문화는 서기전 3세기경 한반도 북부 지역에서 확인된다. 평북 위원 용연동 유적은 한반도 철기 문화의 등장과 관련된 대표적인 유적이다. 여기서 출토된 철기는 연나라의 도성인 연하도(燕下都)에서 출토된 그것들과 유사하다는 점이 주목받았다.
또한, 연나라의 화폐인 명도전(明刀錢)이 함께 출토되어 이 철기들이 연나라에서 제작된 것이거나 연나라와 관계 속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국내외 여러 연구자들은 용연동 철기를 연나라의 철기로 한정하지 않는다.
반월형철도(半月形鐵刀)와 철사(鐵鉇)는 청동기시대의 도구인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 청동사(靑銅鉇)의 형태를 그대로 이어받은 유물로 평가된다. 주조철부 역시 전형적인 연나라의 그것과 달리 가장자리에 융기된 선이 보인다. 주조철겸도 구멍을 뚫어 자루에 고정하는 방식으로 연나라의 주조철겸에서 보이지 않는 특징이다.
이로 인해 용연동 철기는 '연나라의 영향을 받은 요동 지역의 독자적인 철기' , '고조선의 철기' 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청천강 유역 영변 세죽리 유적 등의 철기류 역시 용연동 유적의 그것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반도 남부 지역 내 철기의 등장은 역사적 사건과 귀결시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것은 바로 위만조선의 성립과 그에 따른 고조선 준왕(準王)의 남천(南遷)이다. 한반도 남부 지역 내 새롭게 철기가 유입되는 곳은 이른바 마한 권역, 특히 금강 · 만경강 유역이 두드러진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서 "준왕(準王)은 그의 근신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하여 바다를 경유하여 한(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칭하였다."라는 기사의 한지(韓地)가 바로 그곳이라는 것이다.
위만조선이 세워진 서기전 194년 이후에 철기가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고고학 자료로 보아 당시의 철기는 전량 수입품이었으며, 아직까지 철 생산[제련(製鍊)]의 증거와 정황도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철기의 기종 구성과 형태는 전국계 철기에 속하는 것이며, 한반도 북부 지역에 확산된 전국계 철기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하여 약간의 시기적 차이는 있을 것이다.
금강 · 만경강 유역 내 철기는 연나라에서 생산한 철제 농공구가 존재하며, 산둥반도와 요동반도, 압록강을 경유하여 건너왔을 여러 종류의 철기가 완주 갈동 · 신풍 유적, 장수 남양리 유적 등에서 확인된다. 특히 완주 갈동 유적의 주조제 쇠낫[鐵鎌]은 연나라와 관계 속에서 철기의 유입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철기이다.
또한 완주 상림리 유적에서 보이는 동주(東周)식 동검의 매납, 연나라의 귀족묘로 알려진 연하도 신장두(辛藏頭) 30호묘 내 부장된 세형동과(細形銅戈주2)는 환황 해안을 따라 이어진 장거리 교역의 거점 속에 금강 · 만경강 유역이 포함되었음을 알려준다. 따라서 해로를 활용한 북에서 남으로의 점진적인 확산이라는 철기 문화의 경로를 상정할 수 있다.
금강 · 만경강 유역은 중국 대륙의 철기 문화를 가장 먼저 받아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유역에서 보이는 철기 문화의 성장에 미치지 못한다. 신라 · 가야에서 보이는 철제 갑옷으로 대표되는 삼국시대 철기 문화의 완성은 이른바 진한 · 변한 철기 문화의 독창적인 발전에 의한 것이다.
특히 금호강 유역은 진한(辰韓) 철기 문화의 등장을 잘 보여준다. 금호강 유역에 등장하는 철기류는 철단검(鐵短劍), 철모(鐵矛), 철촉(鐵鏃)과 같은 단조법의 단조제 무기와 주조법의 주조제 농공구가 함께 출토된다. 이러한 단조제 무기는 한(漢)나라의 전형적인 특징도 아니며, 연나라의 주조제 농공구를 직접적으로 계승하였다고 보기도 어렵다.
특히 안테나식 손잡이장식의 철검[触角式鐵劍]은 요동 지역을 포함한 동북 지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본다. 금호강 유역을 중심으로 철기 문화는 이후 낙동강 전역에서 보이는 공통적인 현상으로 확산된다. 이처럼 낙동강 유역 내 요동 및 서북 한계의 영향을 받아 등장하는 독자적인 철기 문화는 철기 생산 기술의 보유와 관련성이 깊은 것이다.
낙동강 유역 내 독자적인 철기 생산기술의 보유는 이후 신라, 가야로 이어지는 철기 문화의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이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철기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이주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이 시대는 청동야금술(靑銅冶金術)뿐만 아니라 철의 야금술이 발명 ·보급되어, 이기가 철로 제작된 시대를 말한다. 원자력이 사용되는 오늘날에도 철이 주요 도구로 이용되고 있으므로 넓은 의미의 철기시대는 현대도 포함되나, 일반적인 고고학적 의미의 철기시대는 철의 야금술이 알려진 시대를 의미하고 있다. 신대륙에서는 고도의 고대문화가 존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철기시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구대륙에서는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로 이행되었다. 그러나 구대륙 모두가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로 이행된 것은 아니고, 지역에 따라서는 신석기시대가 오래 지속되었다가 직접 철기시대로 이행한 경우도 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아프리카(이집트는 제외)이다. 이것은 청동야금술 전파의 지체, 구리나 주석 산지(産地)의 제한성, 또는 이 지역 주민들이 구체제에 만족하고 기술적 혁신에 대한 관심이 적었거나, 문화적 수준이 청동야금술을 받아들일 정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석기 ·청동기 ·철기라는 시대구분은 지극히 기술사적(技術史的)인 시대구분이다. 철의 야금술의 존재는 철기와 쇠똥(슬래그), 목제품에 보이는 철제의 흔적 등으로 쉽게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즉물적(卽物的)으로 내보일 수 있는 점에서 철기시대란, 유물 ·유적을 다루는 고고학자들에게는 편리한 시대구분이다. 그러나 기술사적 시대구분은, 문화 전반을 파악한 뒤의 시대구분과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으며 모순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최근에는 원고사(遠古史) 서술에서 고고학자 자신도 ‘철기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일이 점차 감소되고 있다.
1. 철기의 성립
철은 구리나 주석과는 달리 사철(砂鐵) ·운철(隕鐵:隕石) ·광석의 형태로서 지표상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 최초로 사용되었던 것은 운철로서, 이집트 제4왕조나 오스만 투르크의 아라자 유구(遺丘:청동기시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운철을 사용한 장신구, 드물게 보이는 단검류는 BC 3000년대 이래 제작되기는 하였으나 고온의 노(爐)가 없었던 것과 원료의 양이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대량생산은 불가능했고, 또 가격도 황금의 몇 배 이상 되는 귀금속이었다. 또 철광을 제련하여 얻은 괴철(塊鐵)에서 소량의 연철(鍊鐵)을 얻었으나 연철은 약해서 청동보다도 사용가치가 뒤졌다.
그 후 목탄(木炭)과 접촉시키면서 가열하고 작은 망치로 두드리면서 탄소와 화합시켜 강인한 철을 만드는 기술이 개발되었는데, 이 기술은 BC 15세기경 아르메니아 지역과 소아시아 서부지역에서 개발되어 미타니인(人)과 히타이트인(人)에게 전해졌고, BC 13세기경에는 당시 진행중이던 민족이동 경로를 따라 각지에 보급되었다.
강철은 무기 ·농구의 재료로 청동보다 우수하고 가격도 저렴하여 이 기술이 전파된 곳에서는 도처에서 철기시대가 열렸다. 즉 메소포타미아에는 BC 13세기, 이집트에는 BC 12세기, 인도에는 BC 10세기경에 보급되어 철주(鐵柱)가 제작되었고, BC 9세기경에는 이탈리아에서도 초기 철기문화가 시작되었다.
유럽 중부에서는 오스트리아를 주요 생산지로 하여, 할슈타트 문화(BC 800?∼BC 400?)와 라텐 문화(BC 500?∼BC 1세기 말)가 번영하였다. 유라시아의 초원지대에서는 BC 800년경부터 철의 야금술이 도입되어, 주민들의 유목기마민족화(遊牧騎馬民族化)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 남러시아 지역의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족의 철기문화는 이러한 강철 제조 기술에 기반을 두고 발달하여 소아시아 ·아시리아 ·중국 북부에 이르는 광범위한 기마민족 문화를 형성시켰다.
중국에서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인 BC 4세기 초부터 이기(利器), 특히 무기가 철로 제작되기 시작하였고 전한(前漢)시대에는 보편화되었다. 이러한 기술혁신의 여파는 한반도에도 미쳐 고대국가 형성에 절대적 공헌을 하였으며, 일본에도 파급되었다.
2. 철기의 영향
철제품의 출현은 장신구·용기 등에 대한 청동의 대량 사용을 가능케 했다. 철기시대가 되면서 청동을 많이 사용한 기물이 오히려 증가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철의 야금술 개발은 사회의 각 영역에서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철제 기구는 청동제보다 성능이 우수하고, 수량도 풍부하며 가격도 저렴하였다. 따라서 서민 출신의 병사들도 철제 공격무기로 무장할 수 있게 되어 그들의 발언권 또한 증대하였다.
철제 공구(工具)는 삼림의 대규모 벌채를 가능하게 하였고, 또 철제 농구(農具)는 일정 시간 내에 보다 넓은 경작지를 보다 깊이 경작하는 일과 소택지(沼澤地)를 관개(灌漑)하는 일을 용이하게 하였다. 철제 등자(子)의 고안은 기마민족의 행동반경을 확대시켰고, 또한 각 지방에서의 철 생산지의 출현은 물자의 교류를 활발하게 하였다. 그런 뜻에서 철의 야금술 개발과 이용은 청동의 경우에 비하여 훨씬 역사적 의의가 크다. 그러나 의의가 아무리 크다 하더라도 철기시대는 어디까지나 기술사적인 시대구분이며, 일반사적인 시대구분으로는 아직도 적절하다고 보기가 곤란하다.
3. 한국
중국에 유입되어 발전된 철기문화는 BC 4∼BC 3세기경에 이미 한반도로 유입되던 이주민들을 통해 한국에 전래되기 시작하였는데, 이 시기에는 철기뿐만 아니라 중국 계통의 청동기도 함께 전래되었다. BC 2세기 초 위만(衛滿)조선의 성립으로 대동강 유역에는 청동기와 철기시대가 공존했으며, BC 1세기 말 한군현(漢郡縣)의 설치와 함께 한반도는 본격적으로 철기시대가 발달하여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등의 북방지역 부족국가와 삼한이 지속되던 남방지역 부족국가에 급속히 전파되어 철기 부족국가 형성에 기틀이 되었다.
철기시대의 유물은 대체로 독무덤[甕棺墓]과 널무덤[土壙墓]에서 발굴되며, 철기문화의 전파는 씨족공동체사회를 친족공동체사회로 변환시켰으며, 철제 농기구를 이용한 농경방식이 개발되어 생산력을 증가시켜 사회구조에 일대 변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철기문화는 1세기경에 고대국가인 고구려와 뒤이어 백제 ·신라의 3국을 형성하였다.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경제·금융전문가 조유성 AFPK입니다.
✅️ 위만 조선 즉, 후기 고조선이며 이 철기는 중국으로부터 전래가 되어 위만 조선의 정치, 군사적 기반을 닦아주는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 참고. 전기 고조선 [ 단군조선 ] =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건국, 성장하였음.)
만족스러운 답변이었나요?간단한 별점을 통해 의견을 알려주세요.안녕하세요. 정준영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철기문화의 형성 과정에 대해서는 여러 설명이 있으나 대체로 크게 두 단계를 거쳐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중국제 철기가 들어온 시기입니다. 서기전 4∼3세기에 해당하는 명도전(明刀錢)이 압록강 중류지방에서 서북지방에 걸쳐서 철기류와 함께 출토되었습니다. 즉 평안남도 덕천군 청송리에서는 명도전이 철제이기(鐵製利器)와 함께 출토되었고, 평안북도 위원군 용연동에서는 연(燕)나라 제품이 분명한 철제 농기구가 일괄 발견된 바 있습니다. 명도전은 중국연나라의 동으로 만들어진 화폐로서 표면에 ‘명(明)’자가 양주(陽鑄)되어 있어서 붙여진 명칭입니다.
이와 같이 한반도 북부지역에 유입된 철기류는 중부지역을 거쳐 서남부지역까지 파급되었는데 충청남도 부여 합송리유적, 당진 소소리유적과 전라북도 익산 신동리유적, 완주 갈동·신풍유적, 장수 남양리유적 등지에서 주조철기가 청동기류와 함께 다수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철기는 주조로 된 농기구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고, 세형동검(細形銅劍)을 표지로 한 청동제 무기와 덧띠토기〔粘土帶土器〕등이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위만조선(衛滿朝鮮)의 건국 전후에 한반도로 들어온 철기문화의 여파가 남부지역까지 도달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둘째 단계는 철기가 본격적으로 생산,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입니다. 서기전 108년 한나라 무제(武帝)에 의한 낙랑군(樂浪郡)의 설치는 철기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철기는 우리나라 전역으로 급속히 전파되었습니다. 즉 도끼·가래·낫 등 철제 농경구와 단검·창·꺽창을 비롯한 무기류가 전국적으로 생산, 보급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중·남부지역 철기문화는 최소한 두 가지 통로로 유입된 문화를 수용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나의 통로는 육로를 이용한 것으로 대동강유역으로부터 한강유역을 거쳐 낙동강유역으로 파급되었습니다. 낙동강유역의 움무덤〔土壙墓〕에서 철기와 함께 중국 전한대에 제작된 일광경(日光鏡), 소명경(昭明鏡), 가상부귀경(家常富貴鏡) 등 거울이 발견되고 있으며 특징적인 토기는 와질토기(瓦質土器)입니다. 다른 하나는 해로를 이용한 것으로 서해안과 남해안을 거쳐 동남부지역으로 파급되었습니다. 이 지역의 조개더미에서 화천(貨泉), 오수전(五銖錢) 등 중국의 화폐와 점뼈〔卜骨〕가 발견되었고, 특징적인 토기로는 경질민무늬토기와 적갈색연질토기 등이 있습니다. 다만 두 계열의 문화는 낙동강 하류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혼합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경주 황성동유적에서는 철을 채취하던 제철유적이 발견되어, 이 시대에 철 생산활동이 활발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삼국지(三國志)』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을 보면 서기 3세기경 영남 일대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 대방(帶方), 왜(倭)와 철을 교역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는 비단 서기 3세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부터 교역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같이 철기생산의 전국적인 확산은 낙랑군이 설치된 이후, 이 지역에서 밀려난 위만조선 유민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큰 한편 해로를 통해 동아시아에서의 문화교류가 활발해진 결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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