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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이 만들어지고 백성들에게 어떻게 글을 알려주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반절표에서는 구체적인 예들을 모아 보여주기 때문에, 그림에서 보여주는 표만 있으면 한글을 쉽게 깨칠 수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 반절표를 읽고 외우고 직접 써보며 한글을 배웠던 것입니다. 조선후기에는 반절표가 목판본으로 인쇄·판매되며 큰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반절표란?반절본문(反切本文)이라고도 한다. 반절은 한자음(漢字音)을 나타내기 위해 윗글자(反切上字)의 성(聲)과 아랫글자(反切下字)의 운(韻)을 합해서 다른 하나의 음을 나타내는 방식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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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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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과학자는 어떤 대우를 받았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역사를 보면 조선 시대에는 과학자들이 천시를 받았다. 기술은 천민이나 상놈이 하는 것으로 하찮게 여기는 사회 풍조 때문이었다. 흥미롭게도 삼국시대에는 기술자가 우대받는 시대였다고 한다.신라 시대에 왕이 된 석탈해도 근본을 따져보면 대장장이 집안 출신이고, 여성들에게 길쌈을 장려했던 것도 신라가 기술을 우대했던 사회라는 증거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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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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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은 어릴때부터 교육을 받았던건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어려서부터 시, 글씨, 그림에 매우 능하였다고 하는데 4세부터 글공부, 7세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했는데도 세종 시대의 화가였던 안견의 그림을 본따서 그릴 정도였으며 금강산에 가서도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조선의 지식인들도 인정했을 정도로 출중하였다.-출처:나무위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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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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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은 관직을 나가지 않으면 수입이 없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관리가 되지 않은 양반은 글공부를 주로 하였고, 자기 땅의 농사는 노비와 소작농에게 맡겼다. 양반은 유교를 숭상하여 충효를 중시하였고, '사서삼경'이라 불리는 유교 경전을 공부하거나 시짓기, 활쏘기 등을 하였다. 이러한 양반들 중에 학식과 인품이 높은 사람을 선비라 불렀다.-출처:우리역사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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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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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몽골제국이 망한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첫째, 소모적인 후계자 경쟁이 있었다. 여러 부족의 연맹체였기에 권력 중심부가 흔들리면 해체 속도 또한 빠를 수밖에 없었다. 둘째, 테크노 헤게모니(기술 주도권)의 상실이다. '머스킷'이라는 총의 등장은 몽골제국의 퇴각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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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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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라는 것은 어느나라에서 처음 시작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최초의 대중가요는 3·1만세 운동이 있은 뒤인 1923년 무렵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한을 담아 외국곡에 우리말 가사를 입혀 만든 <희망가> 혹은 <이 풍진 세월>이라 불리는 곡이었다. 영화 <군함도>의 마지막은 1920년, 그 시대를 대표했던 대중가요였던 이 노래가 장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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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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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스바움이 혐오가 공적 판단의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한 이유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누스바움은 혐오 연구에서 다른 감정 연구보다는 좀 더 구체적인 판결에 대한 법철학적 검토를 시도하는데, 이 글에서는 그러한 접근 방식을 그대로 따라가기보다는 감정 철학과 도덕 철학적 관점에서 누스바움 논의의 타당성을 검토하고자 했다.감정을 평가적 믿음으로 정의하는 인지주의 입장에서 누스바움은 도덕 감정의 적절성을 주장한다. 그런데 누스바움은 적절한 도덕 판단이 가능한 감정들의 목록에서 혐오를 제외시킨다. 즉 혐오는 인간이 갖는 동물성과 유한성을 부정하는 생각을 바탕으로 하고 정상에 대한 불안한 집착에서 비롯하기 때문에, 존엄성을 존중하는 도덕의 가치를 위협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혐오는 인간성에 대해 위협적인 감정인가? 이 글에서는 누스바움의 혐오 회의론에 대한 감정 철학적 관점과 도덕 철학적 관점에서의 반론을 검토했으며, 이러한 반론들보다 누스바움의 혐오 회의론이 좀 더 설득력이 있음을 보이고자 했다.-출처:한국학술지인용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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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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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준은 과거 일반 양인에서 나중에 어의가 되어 양반이 된걸까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허준은 뼈대 있는 무관의 가문 출신으로 아버지 허론(許碖)과 양반 가문 출신인 어머니 영광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정실(正室)이 아니었기에, 그의 신분은 중인으로 규정되었고, 이러한 신분은 문 · 무관보다 천하다고 여겨진 의관의 길을 택하는 데 작용하였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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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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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는 원나라, 금나라, 청나라의 역사를 중국 역사라고 인정하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의 통일왕국 송나라의 두 황제를 사로잡아 무릎 꿇린 여진족의 금나라는 당시 중국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여진족이 우리 민족과 무관한 것으로 알고 있는 실정이다. 이 같은 시각은 고려 때 윤관 장군이 여진족을 토벌하고 9성을 쌓았으며, 조선왕조 때 김종서 장군이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4군과 6진을 개척했고 청나라가 조선에 쳐들어와서는 삼전도에서 인조임금의 항복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그러나 중원에 광대한 제국을 이룩한 여진족의 금나라와 청나라는 우리와 같은 엄연한 단군의 후예들이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고구리(高句麗)의 후예가 대진국(발해)이고 또 대진국의 후예가 거란족 요나라와 여진족 금나라이며, 금나라를 이은 것이 청나라인 것이다.-출처: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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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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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역사에서 명성황후의 평가는 어떠했나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대 명성황후를 만났던 외국인들 한 결 같이 명성황후가 총명하고 판단력과 뛰어난 외교력을 지닌 교양 있는 여성이라고 말합니다. 영국 왕립지리학회 회원인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이라는 책을 통해 명성황후와 흥선 대원군의 정치적 갈등을 언급하면서도 명성황후를 지식인이자 우아한 자태를 가진 귀부인이라고 묘사 했습니다.또한 당시 조선 왕실의 의사였던 언더우드 여사도 명성왕후가 우아하고 근엄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반면에 당시 일본 화가들이 남긴 명성황후의 삽화는 모두 그 모습이 뚱뚱하고 심술궂게 그려져 있으며 일본 외교관들은 명성황후를 '여우'로 불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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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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