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프로필
프로필
답변
잉크
답변 내역
전체
학문
이순신 장군이 고초를 겪은 이유가 뭘까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순신 장군은 그의 철저한 원칙주의와 올곧은 성품으로 많은 중상모략을 받았으며, 이에 따라 수 차례의 좌천과 강등, 백의종군이라는 고난을 겪고 있었다.
학문 /
역사
23.05.06
0
0
조선시대 신분확인 방법을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호패는 1354년(공민왕 3)에 원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시행하였으나, 잘 시행되지 않았고 조선시대 들어와서 확대되었다. 호패법을 제정한 목적은 호적을 파악하여 요역과 군역 자원을 확보하고 세금을 걷어 들이는 데 있다. 호패는 품계와 신분에 따라 기재하는 내용과 만드는 재료가 달랐다. 『속대전』에 보면 2품 이상은 상아, 3품 이하 잡과 합격자는 각(쇠뼈), 생원이나 진사는 황양목, 잡직·서인·서리는 소목방패, 공·사천(公私賤)은 대목방패로 만들었다고 한다.-출처:우리역사넷
학문 /
역사
23.05.06
0
0
포상팔국의 난에 대해서 알고싶습니다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209년(내해이사금 14)에 포상8국이 가라(加羅)를 침략하려고 꾀하매 가라의 왕자가 신라에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신라의 태자 우로(于老)와 이벌찬(伊伐飡) 이음(利音)이 6부(六部)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구원하여 8국의 장군을 죽이고 그들이 잡아간 6,000명을 빼앗아 돌려보내 주었다. 이 때의 가라는 지금의 김해에 있던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으로 추정되고 있다.-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학문 /
역사
23.05.06
0
0
여순반란사건에 김구선생이 관련된건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김구는 여순 사건을 반란, 테러로 규정했다. 10월 28일의 공개 담화에서 김구는 '순진한 청년들이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하였으며', '반도(叛徒, 공산주의자)들의 목적은 북한 정권을 남한에 연장시키는 것'으로 보인다고 규정했다.-출처:위키백과
학문 /
역사
23.05.06
0
0
오마쥬란 단어가 생긴 원인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반적으로 타 작품의 핵심 요소나 표현 방식을 흉내내거나 인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존경'이라는 의미답게 모방을 통해 원작에 대한 존경심의 표출 그 자체가 목적이다. 단순 풍자나 개그 효과를 노리는 패러디와는 달리 딱히 개그 장면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주로 영화 등 대중문화에서 사용되지만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등 학계에서도 역사에 이름을 남긴 대작의 제목이나 문장 배열을 살짝 비틂으로써 해당 저서와 학자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출처:나무위키
학문 /
역사
23.05.06
0
0
바이킹족이 세운 나라들은 어떤나라들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오늘날의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아이슬란드는 바이킹족이 건설한 나라이다. 영국과 아일랜드도 바이킹의 영향이 많이 남아 있다. 11세기 후 영국 왕가(王家)는 바이킹족 출신인 정복왕 윌리엄 1세의 후손들이다.-출처:월간조선
학문 /
역사
23.05.06
0
0
조선시대 문종이 즉위2년만에 죽은 이유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실제로 세종과 숙종이 당뇨병으로, 태조, 정종, 태종이 중풍으로 인한 뇌출혈로, 문종, 성종, 효종, 정조, 순조가 종기로 세상을 떠났다.출처:문화재청
학문 /
역사
23.05.06
0
0
남존여비 사상은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중기 이후. 양반가의 여성들은 그 사회적 지위가 지극히 열등하였는데, “여성은 알게 할 것이 없고 다만 좇게 할 것”이라는 유교와 성리학적 이데올로기가 그 근본이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성리학의 예법에 따라 외부와 격리된 생활을 해야 했기에, 하류층의 여성들과 달리 매우 억압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다.-출처:나무위키
학문 /
역사
23.05.06
0
0
조선시대에는 인구조사를 어떤방식으로 했을까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의 전근대 인구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많지 않다. 비교적 자료가 많이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인구에 대해서도 아직 정설이 확립되어 있지 못하다. 조선시대에는 3년마다 매 가호에서는 『경국대전』의 규정(戶口式)에 따라서 가족과 노비를 기록한 ‘호구단자’(戶口單子)를 소속 군현의 수령에게 제출하였다.각 군현에서는 이에 기초하여 호적대장을 3부 작성하여 한 부는 해당 군현에서 보관하고 다른 2부는 감영과 호조로 보냈는데, 이로부터 전국의 호구 총수가 집계되었다.-출처:생글생글
학문 /
역사
23.05.05
0
0
조선시대 갓크기가 신분을 증명하는 방법이었을까요?
안녕하세요. 김종호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갓의 종류 중에는 양반과 평민 구별 없이 사용한 초립(草笠)이 있다. 이것은 가는 풀이나 대나무를 가늘게 오려서 만들었다. 형태와 소재는 구별이 없었지만, 얼마나 가는 것을 쓰느냐에 따라 양반과 평민을 구별하였다. 양반은 50죽, 평민은 30죽을 썼다) 죽(竹)이란 초립을 만들 때 가늘기를 가늠하는 기준을 말한다. 초립의 형태는 갓과 구별되는데, 초립의 챙은 가장자리가 약간 위로 휘어져 있으며, 머리가 얹히는 부분도 갓과 다르게 매우 좁다. 초립은 조선시대 관례를 마친 소년이 흑립을 쓰기 전까지 주로 썼기 때문에 ‘초립동’이라고도 하였다.-출처:우리역사넷
학문 /
역사
23.05.05
0
0
559
560
561
562
563
564
565
566
5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