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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교를 만든 무함마드가 후계를 정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무함마드는 비교적 뒤늦게 종교지도자로써 활약하기 시작했고작은 신흥종교 지도자로써 이슬람을 중동전체를 통일한 거대 종교로 키우기 위해진짜 미친것 처럼 일했기 때문에 일하는 동안에는 후계자를 남길 수가 없었습니다.초기에는 무함마드 죽으면 그대로 무너질 약한 조직이었고후기에는 오히려 너무 커서 권력투쟁이 생길 여지를 차단해야 했던 거죠카바성전 점령 후에는 후계자 선포가 가능은 했지만 권력투쟁의 위험은 여전했고결국 열병에 걸려 죽기 직전에 가서야 최대한 유언을 남기려고 노력 했지만너무 갑작스럽게 쓰러진 다음 말은 커녕 글도 못쓰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에결국 직접적인 후계자 지정은 못한 것 입니다하지만 3대 칼리파 때 까진 이슬람 세력이 쪼개지지 않았으니후계구도 정리는 어느정도 하고 갔다는 걸 알 수 있죠. 그냥 사람답게 무함마드 또한 먼미래를 알 순 없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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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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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서점은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책을 사고파는 것 자체는 거의 인류 문명 시작할 때부터 있던거라 추적이 불가능 하지만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서점은 광교에 있던 회동서관(匯東書館)이라고 합니다책전문, 일부 문구류 판매, 인쇄물 박리다매등의 특징이 있어 근대식 서점으로 인정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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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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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공화국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 기준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연히 독립한다음 세워진게 1공화국이고그 후로 개헌으로 국가 체계가 바뀔 때마다 숫자가 늘어나는 겁니다제1공화국 대통령 간선제->의원내각제로 개헌해서 제 2공화국->박정희가 쿠데타 후 대통령 중심제로 바꿔서 제3공화국이런 식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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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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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선비들은 어떻게 돈을 벌었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에는 화폐가 거의 통하지 않아서돈그 자체를 버는 사람은 상인 밖에 없었습니다어지간한 선비라면 밭한두개(어장포함)쯤은 있기 때문에거기서 직접 일하던 평민한테 소작맞기던 해서 먹고 살았습니다또한, 과거시험은 하나만 있는게 아닙니다크게는 소과(예선)/대과(본선)으로 나뉘었구요 시험 종목 중에서 무과나 잡과(장인, 음악가, 번역가 등이 해당되는 시험)는 경쟁률이 비교적 낮았고각 시험 지방합격자가 따로 마련되었기 때문에소과만 합격한 다음 자기네 고향에서 지방공무원이나 서당선생으로 일할 수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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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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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주의와 허무주의는 무엇이 다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매우 간단하게 설명하자면영양제를 사려고 할때이게 내 몸에 맞는지 아닌지 의심된다 고 생각하면 회의주의고영양제 그딴거 먹어서 뭐하냐 라고 생각하면 허무주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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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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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구인사는 천태종 본산이라 합니다. 이 천태종은 고려시대 천태종과 같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백제랑 싸우던 고려의 이름을 왕건이 그 나라의 후손이라고 자기 나라 이름을 고려라고 하고옛날 고려를 고구려로 바꾼 것과 마찬가지로1970년에 정부에 등록된 불교 종파가조선시대때 숭유억불 정책에 따라 사라졌던 해동천태종을 계승한다고이름을 천태종으로 정한 것이 구인사의 대한불교천태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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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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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스트는 철학과 어떤 차이점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에는 현대식 학문구분이 없었기 때문에철학, 수사학 부터 해서 수학이나 음악, 체육, 심지어 의학 까지 대부분 분야가 다 섞여 있었습니다.음악을 수학공식에 맞춰 쓴 다음 이것이 완벽한 음율이라는 철학을 세워서 정치적인 연설할때도 쓰고환자 치료할때도 쓰고 건물설계도 악보따라서 하고 그런 식이죠의사, 수학자, 음악가 이런 세세한 직업구분이 없진 않았지만 그냥 지식이라는 큰 덩어리를 다루는현대식으로 말하자면 종합학자가 많았고이런 종합학자를 소피스트(지혜로운자) 라고 부른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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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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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사람이 생시를 동물로 비유했나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태어난 해를 동물에 비유하는게 아니라일주일에 월,화,수,목 이라는 이름이 있고서양 달력으론 1월 2월이 아니라 (January (February 라고 하는 것 처럼옛날 동양 역법에선 년도를 세는 방법으로 숫자가 아니라 12간지를 쓴 겁니다.서기처럼 특정 시기를 영원한 1년으로 아는게 아니라왕이 바뀔때마다 1년이 새로 시작했기 때문에 년도 세는 방법이 따로 있었던 거죠최초의 기록은 중국 후한시대의 학자인 왕충이 쓴<논형>이라는 책인데이 논형은 일종의 백과사전 이었기 때문에 간지를 왕충이 만든건 아닐 것이라서간지의 유래가 무엇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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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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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와 영국 사이 백년 전쟁의 발발 원인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여러가지 복잡한 정치적, 귀족적 문제가 있지만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단순한 자존심 싸움입니다우선, 진짜로 100년동안 쉬지도 않고 싸운게 아니라 1~10년 정도의 여러 전쟁이사이사이에 1,2년 정도의 휴전기만 가지고 계속 이어지면서 다합치면 100년이 넘어서백년 전쟁이라 하는 거에요. 프랑스 측은 아예 중간에 왕조가 바뀌기도 하고주위 나라의 상황이나 동맹관계도 여러번 바뀌는 등 많이 복잡한 이야기 입니다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백년전쟁의 영국은 현대의 브리튼이 아니라 그 일부인 "잉글랜드"구요프랑스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이 "전대왕이 나한테 왕하라고 했었다"라면서군대를 끌고 잉글랜드로 처들어가 1066년에 진짜로 즉위에 성공했고그때부터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공작을 겸했습니다.(영국 역대 최악의 왕으로 항상 손꼽히는 존왕이 프랑스에 남아있던 땅을 다 팔아버렸다가후대에 그중 일부를 되찾아 아키텐 공작 으로 바뀌었죠)봉건제에선 신하가 된다는건 그냥 한쪽이 더 유리한 동맹같은거라 별 문제 없었지만프랑스에서 중앙권화가 진행되면서 프랑스에서 영국을 완전히 부하로 취급하려는 시도가 계속되는데잉글랜드에서 200년 이상 따로 살면던 잉글랜드왕실은 당연히 이걸 싫어했고그래서 "프랑스에 남아있는 영국왕실 땅"이라는 애매한 땅을 가지고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이 분쟁은 프랑스가 잔다르크라는 기적의 카드를 뽑아서 역전승 하면서잉글랜드가 프랑스의 모든 땅을 잃어버리는 대신 완전 독립된 다른나라가 되는 것으로 결말지어졌고그 후로 혼인이나 동맹같은 간접적인 연합은 있어도 프랑스와 영국은 완전 다른 나라라는게 확실해 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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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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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명장 한니발이 독약을 마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서호진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선, 한니발이 독약을 마셨다는건 어디까지나 "썰"입니다그의 인생에 어울리는 드라마틱한 결말이라서 가장 유명할 썰일뿐, 그게 사실이란 증거는 어디에도없어요한니발의 말년은 도망자 신세라 기록 자체가 거의 없기 때문에 어떻게 죽었는지는 커녕언제 죽었는지도 아무도 모릅니다.고대 로마시대에도 한니발이 어떻게 죽었느냐에 대한 추측을 하는게 유행할 정도 였으니타임머신이 발명되지 않는 이상 진실을 알아낼 방법은 없는거죠좀 자세히 설명하자면한니발 바르카의 2차 포에니 전쟁은 나라의 모든 역량을 뽑아서 시도한 마지막 역전시도였습니다그러나 로마가 의외로 강력한 카르타고군을 보고 지연전을 하기로 하면서 원정군의 고질적 문제인보급문제가 커지기 시작했고한니발이 없는 지역에선 카르타고군이 패배당하기도 했기 때문에한니발 혼자서 아무리 열심히 밀고 나가도 결국 보급도 없고 아군도 없어서 질 수 밖에 없게 된 겁니다결국 한니발마저 패배하고 카르타고는 로마에 점령되죠그런데 한니발은 말그대로 한나라를 통째로 로마에 들이박을 정도로 로마를 증오한 인물이며로마입장에서도 역대최대의 로마인사상자를 만든 원수라서한니발은 애초에 항복할 생각도 없고, 해봤자 처형당할께 뻔하니카르타고 함락 후에도 셀레우코스 라는 로마랑 전쟁준비중이던 옆나라로 이민해서 또 로마랑 전쟁을 했지만고향이 아니라 다른나라라서 그런지 주특기인 육군대신 해군을 담당하게 되었고결국 거기서도 져버리긴 했지만, 한니발의 능력부족이 아니었기 때문에비티니아 왕국이란 곳에서 또 장군을 할 수 있었습니다하지만 로마에는 한니발이 살아있는거 자체가 싫은 사람들이 많았고비티니아는 로마랑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한니발을 로마에게 주기로 하지만로마에서 한니발 끌고갈 병력이 도착하기 전에 사망했다 정도만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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