윷놀이는 언제부터 시작하였고 윷놀이의 유래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윷놀이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으나 신채호는 부여의 사출도에서 기원이 되었다도 합니다. 즉, 도(돼지) · 개(개) · 걸(양) · 윷(소) · 모(말)는 부여의 제가인 마가 · 우가 · 저가 · 구가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후 정월 초하루부터 대보름까지 민속놀이로 계승되었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백제수도였던 위례성은 지금의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위례성은 한성을 말하며, 현재 서울을 말합니다. 기원전 18년 백제 시조 온조왕이 최초로 하북위례성을 쌓았고, 이후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했다고 합니다. 하북위례성은 아직 명확하게 비정되지 않았으며, 하남위례성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중 하나로 추정되며, 이 밖에 하남시 이성산성으로 보기도 합니다.
평가
응원하기
소격서는 어떤 관청이고 조광조는 왜 소격서 폐지를 주장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소격서는 도교의 초제를 거행하기 위해 설치한 관청입니다. 즉 신선과 별자리에 제사 의식을 담당하는 기관입니다. 소격서는 도교의 상징적인 공간이기 때문에 성리학 관료들은 페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결국 1518년 조광조 등 사림들의 강력한 건의를 통해 혁파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묘사화로 다시 설치되었다가 임진왜란 이후 완전히 폐지됩니다.
평가
응원하기
영국프랑스 백년전쟁은 어떻게 발발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국과 프랑스는 프랑스 안의 영국령과 모직물 공업의 중심지인 플랑드르 지방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대립하였습니다. 이 상황에서 프랑스 왕 필립4세의 딸 이사벨라의 아들인 영국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의 샤를4세의 후계자로서 프랑스 왕위 계승을 주장하자 충돌하였습니다(백년 전쟁, 1337~1453).
평가
응원하기
바다의왕자 장보고에 대한 업적이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나라 무령군 소장이 된 장보고는 신라 사람들이 해적으로 팔려 오는 것을 목격하고 신라로 돌아와 흥덕왕에게 자신의 의지를 전달합니다. 그리고 828년 완도에 청해진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청해진을 근거로 동중국해 해상권을 장악하여 당, 신라, 일본을 잇는 국제 무역을 주도했습니다. 그리고 산동성 적산촌에 법화원을 건립하여 후원하였습니다. 장보고는 막대한 부와 명성을 바탕으로 왕권 다툼에 관여해 신무왕이 왕위에 오르도록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으나 신무왕의 아들 문성왕과 자신의 딸의 혼인 문제로 대립하다 암살당합니다.
평가
응원하기
고려 왕건은 왜 거란이 보내준 낙타를 다 죽였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내세워 건국 초부터 북진 정책을 추구하였습니다. 이에 서경(평양)을 북진의 전진 기지로 삼아 영토를 확장하였고,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친선 관계를 맺고자 접근해 왔지만 강력히 배척하였습니다. 또한 발해 유민을 포용했는데, 그 이유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하고 스스로 고려라고 자처했기 때문에 고려 입장와 같은 국가 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평가
응원하기
조선시대의 신분은 어떻게 나뉘어져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의 신분 제도는 법제상으로 자유민인 양인과 부자유민인 천인을 구 분하는 양천제로 정비되었습니다. 양인은 조세와 국역을 부담하였지만, 과거에 응시하고 벼슬을 하는 데 법적인 제한이 없었습니다. 천인은 각종 천역을 담당하고, 관직에 나가는 것이 불가능하였습니다. 조선은 건국 초 양인을 늘려 국가 기반의 안정을 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양인층 안에서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구분하는 반상제가 더해지면 서 신분 구조는 양반, 중인, 상민, 천민으로 나뉘어 정착되었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거란장수 소배압은 어떤 인물인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소배압은 거란 경종의 딸인 위국공주와 결혼하여 사위가 되었으며, 소손녕의 형입니다. 몽골족 정벌에 공을 세웠으며, 986년 하북으로 진격해온 송나라 군대를 격파하였습니다. 1010년 거란의 2차 침입 당시 개경을 점령하고, 1018년 3차 침입시 10만 대군을 지휘하였으나 강감찬의 귀주 대첩으로 대패하여 귀국후 파면되었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영조 재위시기 시행한 균역법은 양반은 군포 부담이 제외되었는데, 왜 균역법인가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조시기 일반 백성의 군역 부담이 늘어나자 양역을 변통하여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특히 결포론, 호포론 등 면제자들도 부담을 지게하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초기 계획은 시행 반 년 만에 큰 반발을 불러왔습니다. 결국 군역 부담을 줄여주는 감포론이 대세가 되었습니다. 즉 양인이 부담해야 할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여 주고, 부족한 양만큼 보충하는 형태였습니다. 그런데 새로 양역을 지게 된 선무군관들이나 어염세, 선세를 거두고 있던 궁방(宮房) 등에서 불만을 토로해왔습니다. 결국 영조는 기존의 균역법 내용을 다시 보완하여 1751년(영조 27) 9월에 균역법을 공포하게 되었습니다.균역법 시행에 따라 양인의 군역 부담은 2필에서 1필로 줄였고, 기존에 각 궁방이나 아문이 점유하고 있던 어염세, 선세를 중앙 기관에서 수취하게 되면서 특정 기구의 특권을 없앴으며, 상층 양인들에게 선무군관이라 하여 군포 부담을 확대했습니다. 비록 양반은 제외되었지만 개인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던 군포 부담을 1필로 확정한 것 역시 양인들 간의 부담을 균등하게 한 성과가 있었기 때문에 균역법이라 칭하였습니다.
평가
응원하기
조선시대에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신분이 정해져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유영화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는 양천이 구분되고, 세부적으로 반상제(양반, 중인, 상민, 천민)가 존재했습니다. 즉 태어나면서 부터 신분이 정해진 귀속지위입니다. 다만 고대, 중세 시대에 비해서는 신분 이동이 가능한 개방사회였습니다. 특히 조선 후기는 군공, 공명첩, 납속 이외에도 족보 매입 및 위조, 도망 등으로 신분 이동이 가능했습니다.
평가
응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