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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부에 대해 질문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연히 역사공부는 자국의 역사를 먼저 공부해야 합니다. 고대사부터 현대사까지 시기별로 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고대사를 공부하다보면, 우리 역사에 등장하는 주변국들과의 관계나 정세 등이 제시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참고로 그 관계국의 관련 역사를 참조하여 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대부분은 동양 즉 중국, 일본, 러시아 일부일 것입니다. 그리고 대한제국(조선말기)부터 현대사에 들어가면 동양권 뿐만 아니라 서양의 열강들과의 관계도 형성되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되면 서양사와 함께 접목하여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이렇게 우리 한국사를 먼저 공부하여 주변의 역사를 관계별로 중간중간 보다 보면 이후 관계국 전체 역사가 궁금해 질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관심이 있는 쪽을 선정하여 동양사든 서양사든 전체적으로 살펴보심이 좋을 듯 합니다. 한국사를 접할 때 교과서적인 부분만을 보는 것은 지양하시고, 다양한 견해의 역사서를 탐독하시기 바랍니다. 현재의 교과서는 여전히 식민사학의 영향을 많이 받은 듯 합니다. 예를 들어 고구려의 영토에 대한 문제만 하더라도 중국의 구당서 등에서도 동서 3천1백리, 남북으로 2천리에 달한다고 하고 있으나, 실제로 일부만 반영함으로써 정작 몽골지역에서 고구려토성터 등이 발견되었는데도 그 영토를 한정하고 있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최근 많은 사료들이 검증되어 있습니다. 너무 오래전의 사료들이나 우리가 작성한 국뽕의 역사가 아니라 경쟁국이었던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된 내용이므로, 보통 자신들의 더 크게 생각하고 상대를 낮추는 경향이 있는 중국을 감안할 때 기록된 것보다 더 넓을 수도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내용입니다. 역사공부에 관심을 가지시는데 대해 기쁨과 독려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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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2.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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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무슨 뜻 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81년 조계종 종정으로 취임할 당시에 성철스님이 하신 사람을 통해 글로 적어 전한 말씀이 그 유명한 "뚜렷한 깨달음 널리 비치니 고요함과 없어짐이 둘이 아니라.보이는 만물은 관음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이라. 보고 듣는 이것 밖에 진리가 따로 없으니 여기 모인 대중은 알겠느냐?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입니다. 이것은 성철 스님이 처음 하신 말씀이 아니라, 중국 송나라 때 발간된 <오등회원>에 나오는 중국 승려 청원유신이 남긴 말입니다. 이것은 그냥 해석하면 존재 그대로를 인정하고 순리에 맡기라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만 그리 간단한 내용은 아닌 듯 합니다.불교적으로 해석해보면 보고 듣는 것이 실제이고 그 함의가 관념이라고 둔다면 실제는 색(色)으로, 관념은 공(空)으로 대의하면. '색은 공이요, 공은 색이로다'라고 하는 반야심경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구절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끊임없이 끊임없이 변화하며, 진실과 거짓, 정의와 불의 등 구별도 경계도 없으므로 선과 악, 귀천도 없으며,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진리를 설법한 것으로 생각됩니다.당시의 시대상이 1980년 군부정권의 계엄령으로 사회가 경직되어있었을 때라 우회적으로라도 정부를 비판하고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말을 기대하였던 터라 굉장히 독특하고 놀라운 설법이었고 당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현실도피처럼 느껴졌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본다면 현실도피보다는 세상에 대한 자각, 깨달음의 쉬움, 문제의 근원에 대한 인식, 선악의 구분함의 무의미함을 함의로 이야기하며 지금의 상황을 제대로 알고 행동해야 하며 행동할 때는 사람에 대한 선악의 구분이 아닌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논의해야 하며, 그것은 물과 산처럼 그 존재 그대로를 인정하며 흐르고 변하는 시간처럼 돌아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라는 원리를 이야기한 듯 합니다. 법어이다 보니 해석에는 다양한 것이 있을 수 있으니 참고만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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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2.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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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삼국의 말이 서로 같아 대화가 통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구려 백제 신라의 말은 같았다고 보아집니다. 말이 같았다고 보는 것은 여러 역사서에서 기록된 것을 본다면, 서로 회담 자리나 사신 간의 왕래에 있어서 크게 문제가 있지 않았고 통역을 두고 대화하였다는 내용이 없는 것으로 보아 현재 지역적으로 보이는 사투리 정도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큰 불편은 없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지금의 제주도 사투리를 우리가 거의 알아들을 수 없듯이 그 지역에서만 쓰는 말들의 경우에는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판단되나, 상인 등은 국가에 상관없이 다녔기에 지역, 물건 등을 지칭하는 명칭의 차이가 있을 뿐 어순이나 기본적인 말은 같았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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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2.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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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욱일기의 유래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 일본과 고구려, 백제는 비슷한 문화가 있습니다. 태양을 신성 시 하는 사상이 있었다는 것이죠. 이것은 고구려가 고조선을 승계하는 하늘의 자손이라는 이념에서 태양 속에 산다는 신인 삼족오(다리가 3개인 까마귀)를 신성 시 하였고,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백제도 동일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백제의 문화가 당시 일본인 왜에도 전해졌다고 봅니다. 일본 천황가가 백제의 황가와 관계가 있었고, 그 이전 고조선 시대의 번한, 진한, 마한의 연방국가였을 때에도 왜(일본)은 마한의 영향권에 있었던 곳이었으니까요. 농경사회였던 일본의 경우 하늘을 숭상하였기에 당연히 이러한 문화가 쉽게 받아들여졌다고 봅니다. 일본 초대 신무 천황이 원정을 나갈 때 그를 인도한 것이 까마귀이고, 천황 즉위식 때 삼족오가 새겨진 곤룡포를 입으며 하늘을 자손(태양의 후예)라는 것을 각인한다고 합니다. 태양을 상징하는 일장기를 처음 사용했던 것은 다이카개신(645년) 이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에는 흰 바탕에 붉은 색 원형이 아니라 붉은 색 바탕에 황색 원형으로 되어있었던 것으로 확인됩니다. [사진 출처 : Namu wiki]흰 바탕에 붉은 색 원형의 일장기로 바뀌게 된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로 겐페이 전쟁 말기(헤이안시대) 헤이시 가문과 겐지 가문이 전쟁을 벌일 때 헤이시 가문에서는 붉은 바탕에 황색, 겐지 가문에서는 흰 바탕에 붉은 색 원형의 깃발을 사용하였는데 겐지 가문이 승리하면서 이후 그렇게 되었다는 설이 있고, 둘째로 그냥 홍백의 조화가 운이 좋다는 설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습니다. 이러한 일장기가 에도시대 말기에 선박용 국적표시로 사용되었고, 그 이후 국적을 나타내는 깃발로 일반화되었다고 합니다. 욱일기는 이러한 일장기의 확장판으로 해군과 육군이 1870년 5월 15일 전쟁의 시작과 함께 사용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될 때까지 사용되었습니다. 그 이후 1954년에 다시 일본 자위대의 깃발로 사용되면서 동아시아를 핍박하고 짓밟았던 제국주의의 상징이라는 의미를 계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면서, 한국, 중국, 동아시아에서는 전범기로서 의미로 굳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본은 독일 나치에 비해 전범 처벌 등이 거의 없었고, 현재에도 독일은 공식적으로 하켄크로이츠를 쓰는 것을 문제 삼고 있지만, 일본은 욱일기 사용에 아무런 제제를 가하고 있지 않아 반성하고 있지 않고 자랑스러워 하며 다시금 제국주의를 꿈꾸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비판을 받으며 더욱 반감을 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의 일본 사람들의 경우 이 욱일기 디자인을 운수대통의 전통적인 상징처럼 생각하고 있다고 하며 그 역사적인 심각성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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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2.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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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에서 인문이라는게 무슨 의미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문학에서의 인문이라 인간의 삶, 사고 또는 인간다움 등 인간의 전반적인 근원문제를 뜻합니다. 과거에는 인문학이라 함은 이렇듯 전반적인 모든 것을 포함하였으나 최근에 와서는 인문과학, 사회과학, 자연과학 등으로 나누어 구분하고 있고, 그 범주에 속하는 학문 또한 국가마다 조금씩 다르게 포함시키고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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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2.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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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해서 질문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오랜 세월을 거쳐오면서 민족 간의 교류가 있다 보면 혼혈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단일 민족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외부로부터 국가를 구성함에 있어서 다민족-다인종으로 구성되었느냐 아니냐의 판단이 아닐까 합니다. 현재 한반도의 경우 북쪽 대륙으로부터 이주해 온 것이 맞습니다. 우리 민족사를 고조선부터로 본다고 한다면 당시 삼한이라 함은 번한, 진한, 마한의 3개의 연방국가였습니다. 번한은 요서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어 현 중국의 황하 동남북 지역인 유주 영주 북경까지 세력이 펼쳐있었고, 진한은 시베리아 지역으로부터 아래로 지금 중국의 하얼빈, 러시아의 연해주까지 관할하였고, 현 한반도의 경우 마한으로 한반도 전체와 일본 서남부까지 관할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이것에 대해서는 여러 국가의 역사서에서 조금씩 다르게 말하고 있는 부분이 있어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명도전, 비파형동검 등 같은 문화권이라고 볼 수 있는 고대 유물의 분포를 볼 때 그렇게 추정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사의 국가의 영토의 경우 지금의 지도처럼 정확한 경계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충의 지역을 명기하여 우리의 영향권이다 정도이므로, 그것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내용으로 볼 때 고조선의 건국 이념은 하늘의 자손으로 하나의 민족이라는 기치를 내세웠으나, 실제 종으로써 하나가 아니라 한 국가 건립의 이념, 문화적으로서 하나의 민족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당시 저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이라면, 말갈, 흉노, 조선, 예 등 여러 민족들이 있었으므로 말과 터전은 달랐으니까요. 이러한 삼한 중 번한이 먼저 망하고, 진한은 부여국으로 이후 고구려, 백제, 신라 등 계속하여 민족이 남하 이주하였습니다. 이주하면서 말갈, 흉노, 예족등은 일부 이주하였겠으나, 원래의 터전에서 바뀐 국가에 예속되며, 생활을 해왔고, 현재 조선의 민족(같은 말을 쓰는 사람으로서)만이 현 한반도에 남았다고 보입니다. 원래부터 한반도에 있던 가야, 신라시대에도 역사 기록 등에 보면 서역(페르시아 등)의 사람들이 들어왔고, 신라의 왕가의 경우 흉노와도 관계있다고도 합니다.따라서 생물학적으로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혼혈이 되어 섞였기 때문에 순수한 단일민족이라고 할 수 없지만, 중남미나 동남아시아와 비해서는 인종의 형질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그 동질성이 이른 시기부터 형성되어왔고 지속되고 있으며, 그 편차가 크지 않다는 점으로 봐서 형질적, 문화적 단일민족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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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2.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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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산을 보고 왔는데 궁금증이 생겨 질문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래 빈농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아명은 고자루(새끼원숭이라는 뜻) 또는 히요시로 쓰다가 집을 나가면서 기노시타 도키치로라는 이름으로 개명하였다고 합니다. 중간에 기노시타 히데요시라고도 썼다고 합니다.하시바 히데요시라는 이름은 오미국을 평정하면서 오다 노부나가로부터 치쿠젠노카미의 관위를 받으면서 썼다고 하고 이후 태정대신, 관백이 되면서 일왕으로부터 받아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고 합니다. 후지와라 가문의 양자로 들어갔기 때문에 후지와라라고도 썼고, 당시 겐지 씨족이던 아시카가 막부를 멸망시키고 헤이시계임을 자처했던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인 탓에 조선의 기록 및 일부 문헌에는 다이라노 히데요시라고도 불리었다 합니다. 그런데 다이라노, 후지와라, 도요토미는 천황이나 종실 및 그에 준하는 쪽에서 내려준 성씨인 우지이고 실제 사용한 성씨인 묘지는 하시바였다고 합니다. 현재 일본에서는 우지는 쓰지 않고 묘지만 남아있기도 하니 하시바가 맞다고 주장하는 분도 있는 듯 합니다. 임진왜란이 1592년부터 1598년의 기간이니 실제성이 하시바 일지라도 당시는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로 일왕에게 하사받은 성인 '도요토미'를 쓴 도요토미 히데요시로 널리 불렸던 것이 사실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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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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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지도는 어떻게 그렸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옛날에 지도를 제작하는 방법은 땅끝이 보이는 높은 산에 올라 지형과 지세를 살피고, 직접 해안선을 걸으며 형태를 축적을 이용하여 옮겼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단한 것은 당시에 정확한 축적을 이용하였다는 점입니다. 대동여지도는 특히 과거 기 작성된 다른 지도 등을 참고하여 확인하고 수정해나가며 최대한 정확도를 높이고자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자세한 방법에 대해서는 "대동여지도 제작과 읽기"라는 제목의 최선웅 한국지도학회 이사, 매핑코리아 대표가 쓴 글인데 아래의 링크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대신 첨부합니다. http://san.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64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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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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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문화 대혁명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의 문화대혁명이라 함은 사실적으로 문화를 바꾸는 혁명적인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공산주의로 가면서 자신들의 방향과 맞지 않는 사람, 정책 등을 강제로 제거해나가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보통은 1966~1968년 또는 1969년을 이 기간으로 보는데 파괴적인, 비판, 규탄, 투쟁, 숙청 등의 사건들을 가리키며, 모택동이 사망한 후 그를 따르던 4인조가 체포된 1976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고도 합니다.문화대혁명은 중국 공산당의 주류를 이루는 사람들에 대한 모택동의 자신의 신념에 기인한 정책이었다 보여집니다. 소련 공산당대회에서 스탈린에 대해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정책적 정당과 그에 대한 구체화로 스탈린 지배체제에 요구하였던 정권의 정통성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었습니다. 모택동은 스탈린에 대한 개인 숭배에 근간을 두었기에 그 권력기반이 위태로워질 것을 두려워했습니다.모택동은 이 정통성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소련 '수정주의'에 대항하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정통을 계승한 새로운 이데올로기 정책을 구축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책은 중국과 소련의 대립, 대약진운동과 같은 정책의 실패 때문에, 수천만 명에 이르는 아사의 참상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에 모택동 개혁개방을 내세운 조정정책을 수용하여 중국경제를 재건하려고 하였으나 여러가지 부작용이 생겼습니다.모택동은 임표가 이끄는 군과 자신의 부인인 강청의 상해그룹을 중심으로 반격을 개시하였습니다. 당 중앙의 주류파를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실권파라고 하며 타도의 대상으로 하였는데 이 당시 모택동이 이용한 것이 청년 학생을 중심으로 한 홍위병입니다.오늘날에도 문화대혁명의 이면에 1950년대 스탈린적 사회주의의 특권계층제제와 경직된 계획경제 등에 대한 대중의 불만이 존재하였고 개혁 개방이 시작된 후에도 1956년 이전의 황금시대로 복귀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되었지만 그것에 대한 대중의 불만은 커져만 갔습니다.현실의 문화대혁명은 대약진을 비판하여 실각한 팽덕회의 명예 회복을 도모한 문예에 대한 비판이라는 형태를 취하였고, 모택동 등과 당 중앙의 주도권 쟁탈 후에 1966년 5월 16일 이후 모택동 주도의 파괴 단계의 문화혁명이 본격화하였습니다. 외국 물건과 책을 가지고 있어도 스파이라고 매도당하는 둥 공포정치를 하며, 상대 실권파들을 숙청, 추방하며 각 지에 통치기관으로서 혁명위원회를 설치 이후 각급의 정부로 탈바꿈하게 됩니다.문화혁명 후기에는 이데올로기를 중시하던 주은래와 등소평의 경제우선노선의 대립이 심화되다가 1976년 모택동이 사망하고 그를 따르던 4인조가 체포됨으로써 등소평이 실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이후 등소평은 개혁과 개방을 추구하게 됩니다.문화대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거창한 것 같지만, 중국 공산당 세력 중 하나였던 모택동이 실권을 유지하기 위해 추진한 무리한 정책으로 판단됩니다. 어느 나라든 정치란 국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을 위한 것인가 봅니다.[참조] 문화대혁명 [the Great Cultural Revolution] (21세기 정치학대사전, 정치학대사전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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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2.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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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말 위화도 회군에 대해서 ...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는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중국의 전체를 장악해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고려의 군이 출병한 이유는 이러한 명나라가 과거 원나라가 쌍성총관부를 세워 관리하던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고 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곳에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겠다는 의도였죠. 하지만 당시 군부의 실권자였던 최영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여 당시 왕이었던 우왕(공민왕)을 설득하여 요동을 먼저 치자고 하며 전쟁으로 맞서게 됩니다. 당시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쳐서는 필패하므로 안되며, 여름이라 농번기이므로 군사를 모으기가 어렵고, 지금 많은 군사를 이동시키면 남으로 왜구가 쳐들어올 가능성이 크며, 여름에 장마가 지면 덥고 습해 전염병이 창궐할 가능성이 높다는 4가지 불가론을 세워 전쟁을 반대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최영은 군부의 실권자이자 왕권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요동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이 때 자신이 8도 도통사가 되고, 좌군도통사에 조민수, 우군도통사에 이성계를 선봉으로 하여 진격하게 됩니다. 위화도에 도착한 이성계는 압록강이 불어났다는 이유로 2주를 지체하게 되고 회군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성계는 반드시 회군을 해야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조민수와 논의하여 회군을 결정하였고, 황명과 최영의 명을 어겼으므로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하다고 생각한 그들은 개경을 공략하여 우왕을 폐위시키고, 최영을 유배 보낸 뒤 죽여버립니다. 이후 우왕(공민왕)의 아들로 창왕을 세우고 함께 역모를 한 조민수와 권력 대립하다 조민수도 유배를 보내게 만들고 창왕도 폐위한 후 공양왕을 세우게 됩니다. 그러면서 과거 최영이 가졌던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고, 이러한 권력이 결국 조선 건국의 초석이 됩니다. 만약 회군을 하지 않았더라면, 당시 기세가 등등했던 명나라 군사에 맞서 오랜 전쟁 끝에 고려는 패배해 항복을 했을 것이고, 원의 영향력에 있었던 것처럼 명의 영향력 아래에서 힘없는 고려왕조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전쟁에서 많은 가병들과 힘을 잃어 이성계와 그의 가문도 역모를 꾀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원래부터 건국을 꿈꾸고 있던 이성계와 그의 가문으로서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선택이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그로 인해 만약 이성계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건국의 주축세력이고 브레인이었던 정도전은 다른 세력을 끌어들여서라도 자신이 꿈꾸던 나라를 건국하기 위한 일을 지속적으로 해나갔을 거라고 봅니다. 이성계도 건국을 꿈꾸었고, 정도전도 건국을 꿈꾸었으니 둘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였고, 정도전은 성리학의 나라를 건국하게끔 하였습니다.둘다 목적은 달성하였다고 할 수 있고, 위화도회군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군부를 끌어내리고, 학자들이 주축이 되는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시도는 계속되어 언젠가는 조선과 비슷한 나라가 세워졌을 거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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