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의 티샤츠 가로, 세로 줄무니 옷 입는 사람 성향이 다른 건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시각적으로는 가로 줄무늬가 세로 줄무늬보다 뚱뚱해보이는 경향이 있습니다. 가로 줄무늬의 평행성의 간격이 넓거나 두꺼운 경우에 그렇게 보입니다. 하지만 줄무늬가 가늘고 그 간격 또한 좁다고 한다면 자신의 체형을 고려하여 날씬하게 보이기 위해서 가로 줄무늬 옷을 추천하고, 크게 보이기 위해서 세로 줄무늬 옷을 선택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일종의 착시 효과를 이용해서 이럴 때는 가로 줄무늬가 더 날씬해보이게 하는 착시를 가져옵니다. 심리적으로는 세로 줄무늬는 직선적, 상승에의 욕구, 공격적, 가로 줄무늬는 안정적, 평등, 자유로움 등을 표출한다고 하기도 하나 그냥 가로와 세로의 줄무늬를 선호하는 것은 기호의 차이로 보입니다. 한때 예술가적 표현으로 일탈, 자유로움의 상징이 줄무늬였는데(이것은 가로 줄무늬) 그것은 과거 마린룩에서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선원들은 대부분 가로 줄무늬의 옷을 입었는데 이것은 어떤 성향의 차이가 아니라 신분의 차이로 배에서 가장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이 이러한 복장을 하였습니다. 이후 바다를 항해하는 사람의 이미지로 드넓은 바다를 헤쳐나가는 것에서 자유로움, 일상에서의 탈출 등 일탈의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예술가들에게는 그러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피카소도 가로 줄무늬 티셔츠를 즐겨입었다고 합니다. 여담으로 저는 가로 줄무늬, 세로 줄무늬 다 입는데 어떤 것을 특별히 선호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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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여성을 차별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기독교에서는 이를 어떻게 설명하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성경에서는 남녀의 차별을 두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유대교에서 파생되어 발전해왔으니 뿌리가 같습니다. 지금은 유대교, 기독교(개신교, 카톨릭)로 나뉘어져 있지만 랍비, 목사, 신부 모두 남성만이 될 수 있습니다. 성경적으로 남자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다는 부속적인 사상이 깔려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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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사상은 어떻게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전파가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 명의 성리학이 고려 시대에 신진사대부들에게 전파되어 그 학문적 사상의 기반이 되었고, 고려 말 혼돈의 시대에 신진사대부 중 정도전 외 그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북방 세력인 이성계의 세력과 함께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조선의 건국이념은 정도전이 설계하여 성리학의 기반 위에 국가를 새로이 세우고, 성리학의 가르침에 따라 학자들이 국정에 대해 논하며 만들어가기를 바랐습니다. 이에 조선은 초기부터 고려의 국교였던 불교를 그동안의 폐해를 들어 억제하고 성리학이 기반이 된 유교사상을 도입하여 숭유억불의 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파고들어야 하기 때문에 관혼상제 모두를 유교사상을 접목하여 하게끔 하였습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지속되었기에 발전하였고, 조선 중후기에 들어 너무 학문적 유토피아만 꿈꾸는 것이 아닌가 하여 몇몇 학자들 사이에 실제 생활과 밀접한 학문이 필요하다 하여 소위 실사구시, 실학 사상이 대두되기는 하였으나 전반적으로 유교사상은 퇴화되지 않았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도 중국보다 더 우리 실정에 맞는 유교사상으로 자리매김하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조금씩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시대의 흐름이니 언젠가는 그 색이 바래지 않을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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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의 관심법이 무엇인지 궁금해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자신을 미륵불이라고 지칭하고, 영험한 능력이 있다고 포장하여, 관심법, 즉 마음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있다고 하며, 자신을 반대하거나 자신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확인했다고 하며, 그에게 죄를 물어 처벌 또는 처형을 하는 폭정의 수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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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총이 만든 문자 ‘이두’는 어떤 형태였나요? 한글과는 어떤 점이 다른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설총이 고안한 이두는 문자가 아니라 당시의 우리말을 표현하기 위해 우리말의 어순에 한자의 음과 뜻을 빌어온 표기법입니다. 네이버 지식백과에 잘 표현한 내용이 있어서 가져와 봅니다 .위의 내용은 우리가 잘 아는 동요 비행기를 당시 이두식 표기법으로 바꾸어 본 것입니다. 떴다 떴다의 경우 '떴'은 '뜨나', '날다'의 뜻이므로 飛(날 비)자를 가져왔고 '다'는 음만 차용하여 多(많을 다)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높이 높이의 경우 '높'은 高(높을 고)를, '이'는 음만 차용하여 耳(귀 이)를 가져왔습니다. 즉 명사, 동사, 어간 등 뜻이 있는 한자를 쓰고, 조사나 어미에는 음만 차용하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원래 중국어의 어순은 우리말의 어순과 다르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려웠다면, 이러한 이두식 표현법은 한자를 알고 있으면 우리말의 어순대로 표현할 수 있어서 신라 시대를 거쳐 조선 시대에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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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뜻하는 영어단어에 대한 질문입니다.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말씀주신 바다와 그 지역을 뜻하는 단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습니다. beach : an area covered with sand or small rocks that is next to an ocean - 모래사장, 자갈이 있는 해변, 바닷가를 뜻합니다.coast : the land along or near a sea or ocean - 바다와 큰 땅이 맞닿아 있는 지점, 해안 경계로 만들어진 지역을 뜻하는데 사람들이 사는 마을(지방)이 만들어진 곳을 지칭합니다.ocean : the salt water that covers much of the Earth's surface - 일반적인 바다보다는 구체적으로 특정된 큰 바다를 뜻합니다. 인도양, 대서양, 태평양 등sea : the salt water that covers much of the Earth's surface - 일반적 의미의 바다를 뜻합니다.추가적으로,shore : he land along the edge of an area of water - 호수든 바다든 땅과 맞닿아있는 해안을 일반적으로 말합니다. bay : a large area of water that is part of an ocean or lake and partly surrounded by land - 섬처럼 동떨어지지는 않았으나 육지를 둘러써 물이 들어와있는 지역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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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건국 초기, 왜 고려의 정치제도를 그대로 사용했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나라가 바뀌었을 때 초기에는 급작스런 변화에 국정 운영이 혼란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중요한 기틀은 그대로 가지고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조선 초기에 고려의 정치 및 행정 제도를 그대로 가지고 간 것도 있고, 폐지하거나 변경한 것도 있습니다. 고려 말에 들어서는 전반적인 관료 조직의 형태가 중앙집권 체제로 많이 자리 잡아 있었던, 중국의 관료 조직을 수용했었기 때문에 중앙집권적 왕권 확립을 위하여 관료 조직은 그대로 가지고 가되 그들이 가질 수 있는 특권 등에 제제를 가하면서 왕권을 더욱 강화하는 방향으로 가져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태조 이성계 때는 왕권을 약화하고, 재상 즉 고위 관리들(성리학자)의 힘을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가 있었습니다. 신진사대부로 조선건국 주축이었던 정도전이 불씨잡변이라는 책도 썼었으며, 행정, 문화, 사회 전반에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경국전이 편찬되었습니다. 이후 이 조선경국전은 중앙집권체제의 강화를 위해서도 많은 역할을 하게 됩니다. 태종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키고, 정도전을 죽이고,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사병을 없애 고위 관리, 권문세족들의 역성 혁명 위협으로부터 왕권을 보호하여 군은 국가만이 가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중앙 정부는 의정부 6조직계제 시스템을 가지고 갔고, 지방은 8도 체제를 정립시키고 고려 시대와는 달리 모든 곳에 지방관을 파견하여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였습니다. 8도에는 관찰사를, 부, 목, 군, 현에는 수령과 향리를 파견하였습니다. 고려의 향리는 권력이 있었으나, 조선의 향리는 권력이 없었다고 볼 수 있는 단순 공무원이었습니다. 성리학자 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 사림은 유향소(여론형성), 서원(인재양성), 향약(농민관리)을 통해서 지방의 권력을 확보하고 있었는데 중앙 정부에서도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이 경재소를 만들어 유향소를 감시하였습니다.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인재등용에 있어서 천거와 문음(음서제도)가 있기는 하였지만, 고위관직에는 불가능하게 제도를 개선하였고, 고위 관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조선시대에는 과거시험을 통해서 오를 수 있었습니다. 과거시험은 문과/무과/잡과로 나누어 실시하였고, 고려시대에는 무과는 없었으나 신설되었고, 불교국가라 승과를 시행하던 고려와는 달리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 시대에는 승과를 폐지하였습니다. 이후 왕의 성향에 따라 중앙집권을 느슨하게 했다가 조였다가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조선시대는 왕권강화 및 중앙집권체제 강화를 주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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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원불교의 역사가 그렇게 오래지는 않은 것으로 앎니다 누가 원불교를 창시 하였나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원불교는 1916년 4월 28일에 여러 종교 및 사상의 수행자였던 소태산 박중빈이 창시한 새로운 종교로 일원상의 진리와 함께 불법의 생활화, 대중화, 시대화를 추구한다고 합니다. 이름이 원불교라 불교 내 하나의 종파로 오해할 수 있지만, 불교계에서도 다르게 보고 있는 별개의 종교라고 합니다. 창시자가 불교, 동학, 도교, 유교, 기독교의 경전을 두루 공부하던 수행자였는데, 그 중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가장 감명을 받아 불교의 법문과 논리가 사상적 기반이 된 것은 맞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불법연구회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을 모았고, 임시 교명으로 사용하다가 1943년 6월 1일 박중빈은 대종사의 이름으로 열반(사망)하였고, 2대 대종사로 정산 송규가 이어받았고, 일제에서 해방된 후 1948년에 원불교라는 정식 교명을 선포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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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어린이날은 언제 누구에 의해 제정이 된 것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19년의 3·1 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민족 정신을 고취하고자, 1923년 방정환을 포함한 일본 유학생 모임인 ‘색동회’가 주축이 되어 처음에는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가 1927년 날짜를 5월 첫 일요일로 변경하였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행사만 추진하였고, 1961년에 아동복지법에 공식적으로 어린이날을 5월5일로 명기되었습니다. 1973년에는 기념일로 지정되었고, 1975년부터 공휴일로 제정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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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인시대의 김두한이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란 것이 팩트인가요
안녕하세요. 이기준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사실로 판명된 일로 판단됩니다. 우선 안동김씨 족보에 김두한이 김좌진의 아들로 올라가 있고, 호적에도 김좌진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습니다.김좌진은 부인이 여럿이었는데 정실부인과 다른 부인들이 김두한을 김좌진 아들로 인정하고 일제 시대와 김두한 사망 이후 1980년대까지도 김두한이 김좌진 아들임을 증언했다는 것을 볼 때 사실이라 확인됩니다. 일제시대 김좌진 아들 김두한을 요주의 인물로 지정하고 감시했던 일제시대 공식문서가 있고, 김두한이 어렸을때 김좌진 아들이라며 행적을 보도한 당시의 각종 신문기사도 존재하며, 해방 이후에 김구와 청산리 동지였던 이범석 등 독립운동가들이 김두한을 김좌진 아들로 공식석상에서도 인정하고 발언하였다고 합니다. 도올 김용옥이 거지였던 이가 자신을 김좌진의 아들 김두한이라고 속였다는 음모론을 제기하였었으나, 1990년대에 김좌진의 여러 부인 가족들과 김두한 가족들이 한 가족으로 방송 다큐에 출연하여 가족이 확실함을 밝혔습니다. 그게 사실이 아니라면 거지 하나가 안동김씨 가문 전체와 국가와 언론과 일본까지 다 속였다는 것인데 사실상 불가능하고, 그에 따른 공식 기록들이 사실로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사실상 국내의 여러 매체의 내용보다도 철두철미한 일본 정부에서 김좌진을 잡고자 그의 아들인 김두한을 종로를 벗어나지 못하게 철저하게 특별 감시하였다는 것만 보아도 사실 관계가 확인되었으니 그랬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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