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프로필
프로필
답변
잉크
답변 내역
전체
학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마케도니아의 스코피에 근교 타우레시움에서 출생,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사망했습니다.내정에서는 전제적 중앙집권제의 확립을 꾀하여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편찬, 상공업을 육성하기에 힘썼으며 외정에서 페르시아와 항구적인 평화 협정을 맺고 반달, 동 고트, 서 고트를 정복, 구 로마 제국 영토의 태반을 회복했으며 종교정책은 철저한 황제교황주의를 취했습니다.537년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장려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을 건립 했습니다.
학문 /
역사
23.05.23
0
0
세계 최대 강대국인 미국이 베트남전쟁에서 진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미국이 전쟁에 패한 이유는 베트남의 습하고 더운날씨와 정글에서 땅굴을 파고 지하도시를 만드는 게릴라 전투는 미국의 사기를 꺾었으며 미국의 지원을 받은 남베트남은 전쟁의 의지가 없었고, 부패하고 북베트남을 지원하는 베트공은 수시로 계속해 나타나 미군을 괴롭히고 남베트남은 미국도 침략국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문 /
역사
23.05.23
0
0
과거 동서독일 분단 되어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베를린 장벽은 언제 무너진 것입니까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소련의 공산주의 체제 붕괴에 잇따라 독일 통일이 추진되면서 1989년 장벽도 다 철거되고 브란덴부르크문을 중심으로 약간의 부분만 기념물로 남겨져있습니다.
학문 /
역사
23.05.23
0
0
1967년도 동백림 사건은 어떤 것이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앙정보부는 1967년 7월8일부터 17일까지 7차에 걸쳐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 대남 적화 공작단에 대한 수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문화예술계의 윤이상, 이응로, 학계의 황성모, 임석진 등 194명이 대남 적화공작을 벌이다 적발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중앙정보부의 발표에 따르면 사건 관계자들은 1958년 9월부터 동백림 소재 북한대사관을 왕래하면서 이적활동을 한데 이어 일부는 입북 또는 노동당에 입당하고 국내에 잠입해 간첩활동을 해왔다는 것, 중앙정보부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의 민족주의비교연구회도 여기에 관련된 반국가단체라고 발표합니다.이후 사법부는 동백림 및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사건을 별도로 심리하기로 결정, 1969년 3월 까지 동백림사건 관련 재판을 완료해 사형 2명을 포함한 실형 15명, 집행유예 15명, 선고유예 1명 형 면제 3명을 선고합니다.중앙정보의 발표와 달리 동백림사건 관련자 중 실제로 한국에 돌아와서 간첩행위를 한 경우는 거의 없었고 보복이 두려워 또는 단순한 호기심에 북한에 잘 도착했다는 신호를 보낸 정도였습니다. 중앙정보부는 대규모 간첩단이라 하여 무려 203명의 관련자들을 조사했지만 실제 검찰에 송치한 사람 중 검찰이 간첩죄나 간첩미수죄를 적용한 것은 23명에 불과했고 실제 최종심에서 간첩죄가 인정된 사람은 한명도 없었습니다.이러한 재판결과는 동백림사건 수사가 강제연행과 고문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며 유학생과 교민들의 강제연행은 외교적 마찰을 불러 일으켜 서독과 프랑스 정부는 영토주권의 침해라고 강력히 항의하고 원상회복을 요구했습니다.박정희 정부는 1970년 광복절을 기해 서독 및 프랑스의 의견을 수용해 사건 관계자에 대한 잔여 형기 집행을 면제, 정규명, 정하룡 등 사형수까지 모두 석방했습니다.
학문 /
역사
23.05.23
0
0
1968년 통혁당 사건은 어떤 내용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통일혁명당간첩사건은 1968년 발표된 대남 대규모 간첩단 사건으로 1971년 재건이 기도되었던 사건입니다.김종태는 북한공산집단의 대남사업총국장 허봉학으로부터 직접 지령과 공작금을 받고 남파된 거물간첩이었는데 그는 운수업으로 위장해 통일혁명당을 조직, 전남로당원, 혁신적 지식인, 학생, 청년 등을 대량으로 포섭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 시기가 오면 무장봉기하여 수도권을 장악하고 요인암살, 정부전복을 기도하려다 일망타진 되었습니다.
학문 /
역사
23.05.23
0
0
러일 전쟁 후 메가타 고문에 의해 본격 시행된 "화폐 정리 사업"에 대해서 배경, 의미, 특징 및 결과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본은 1904년 8월 내정개선을 구실로 제 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고 이른바 고문정치를 시행합니다. 이 때 재정고문으로 파견된 일본인이 메가타 다네타로인데 조선의 화폐정리사업은 이 메가카에 의해 추진되었습니다.메가타는 탁지부 고문으로 내한하여 재정 및 경제적 합방에 착수하면서 먼저 1905년 6월1일부터 일본과 마찬가지로 조선에서도 금본위제도를 시행할 것을 공포하는데 이 사업은 조선화폐의 유통 및 교환기능을 없애 조선화폐를 정리하고 대신 일본화폐를 조선에 널리 유통시킴으로 조선에 대한 경제적 침탈을 쉽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은 조직적이면서도 신속하게 화폐정리사업을 추진합니다.사업 진행은 1892년 부터 조선에서 주조,유통되던 백동화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나 일제는 백동화를 정리하면서 구화를 신화와 교환할 때 액면가로 바꾸어주지 않고 질이 떨어지는 구화는 액면가보다 적은 값으로 바꾸어줍니다.즉 백동화를 등급별로 나누어 갑인 경우 액면가 그대로, 을인 경우 2전 5푼짜리를 1전으로, 병인 경우 교환을 거부하는 형식으로 기존의 백동화를 정리합니다.대신 일본 다이이치은행이 한국의 국고금 취급과 법화 발행을 담당하는 중앙은행의 지위를 확보했는데 1905년부터 1909년 까지 교환, 납세, 매수 등의 방법으로 환수된 백동화는 모두 960만 8636환 64전이었고 이어 엽전도 점진적으로 환수하면서 다이이치은행권과 보조화폐인 신백동화가 널리 유통되기 시작합니다.그러나 화폐 교환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백동화는 을이나 병으로 판정되는 경우가 많았고 이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이 교환을 거부하여 가지고있는 화폐가 무효화되는 경우도 적지 않았고 반면 일본인들은 화폐정리사업을 미리 알고 있어 질이 좋은 화폐를 가지고있었기 때문에 피해가 적었습니다.화폐정리사업으로 인해 조선에서는 유동성 결핍, 어음시장 혼란, 신화 발행 지체 등 여러 부작용이 뒤따라 많은 상인이 파산하는 반면 일제는 금융조합, 농공은행, 어음조합, 공동창고회사 등을 설립해 조선의 산업 경제활동을 통제, 장악하고 기간산업을 독점해 사실상 민족 경제는 몰락했습니다.
학문 /
역사
23.05.23
0
0
기후변화협의 COP27란 구체적으로 무엇이고, COP27에서 27은 무슨의미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집트 샤름엘셰이크에서 2022년 11월 7일부터 11월 20일까지 열린 제 27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를 말하며 cop는 당사국총회를 뜻하며 27은 회의의 회차를 뜻합니다.
학문 /
역사
23.05.23
0
0
조선시대 훈구파와 사림파는 왜 갈등을 겪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왕권, 신권의 대립에서 잉태했던 조선사회의 갈등은 훈구파, 사림파의 갈등으로 이어졌는데 당시 세조의 정권을 탈취로 기인되었습니다.발단은 이극돈, 김일손 두 개인 사이의 갈등이었지만 배후는 복잡했는데 이극돈은 수양대군의 즉위를 계기로 등장한 훈구파의 일원이었고, 김일손은 훈구파의 정치 행위에 극도의 불신감을 가진 사림파였기 때문입니다.구세력인 집권 훈구와 신세력인 신진 사람의 대립이었는데 양자의 가장 큰 차이는 세조의 즉위를 바라보는 시삭으로 이극돈이 유자광을 끌어들이고 유자광이 다시 노사신, 윤필상, 한치영, 신수근 등을 끌어들일수 있었던 것은 훈구세력들의 세계관이 같아 가능했던 것입니다.사림파는 세조 체제를 부정하는 대역죄로 몰아 세조의 즉위 자체를 부인하려는 세계관을 가지고있었습니다.결국 김종직의 조의제문으로 이어져 연산군, 훈구파는 이미 죽은 김종직의 관을 꺼내 시신의 목을 자르는 부관참시를 행했습니다.
학문 /
역사
23.05.23
0
0
조선시대 장악원은 무슨 일을 하던곳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되는 음악, 무용에 관한 모든일을 맡아보던 관청입니다.예조에 소속되어 제례, 연회, 조의, 대사객 등에서 실제적인 음악활동을 했으며 수많은 의례에 쓰이는 음악을 소화하기 위해 평소에도 많은 연습을 해야했으며 실제 장악원에서 연마해야 할 연습 일정을 법전에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학문 /
음악
23.05.23
0
0
과거 조선시대에 '공명첩'이라는 것을 통해서 관직을 살수가 있었다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있던 매관매직의 제도로 성명란에 이름을 쓰기만 하면 되기에 부유한 사람들에게 팔아 국가의 재정을 보충하는 용도로 쓰였습니다.공명첩은 중앙에서 발행하고 관리하는 것으로 엄격하게 관리되었고 공명첩을 위조하거나 훔쳐 내팔았다가 적발될 경우 사형에 처하기도했습니다.발행수는 중앙에서 정하고 통제했고, 연간 발행수를 각 지방 및 중앙의 관청에 재정 요구에 따라 할당해 분배하는 식이었고 나은 공명첩은 회수 후 소각했습니다.
학문 /
역사
23.05.23
0
0
1171
1172
1173
1174
1175
1176
1177
1178
1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