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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는 어떤것들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는 아담의 창조, 다비드상, 피에타, 최후의 심판, 톤도도니, 인생의 꿈, 레다와백조, 시스틴예배당 천장화 등이 있습니다.
학문 /
미술
23.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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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생일날 왜 미역국을 먹는가?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한국에서 미역을 처음 먹은것은 1400년전부터라 전해집니다.당나라 유서의 첫 학기에 기록된것은 고래가 아이를 낳은 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미역을 먹는 것을 본 고려인들이산모에게 미역을 먹이는것을 시작으로 기록됩니다.조선시대 여자들의 풍습을 기록한 조선여속고에서 산모가 처음 국밥을 먹기 전 산모의 방 남서쪽을 깨끗이 치운 후 쌀밥과 미역국 세그릇씩을 장만하여 삼신상을 마련하는데 여기 놓여있던 밥과 국을 모두 산모가 먹었다 라 기록되어있습니다.미역은 출산 후 자궁 수축, 지혈작용에 도움을 주고 심장과 혈관활동, 신진대사를 증진시켜 빠르게 건강을 회복하는데 도움을 줍니다.영아 사망률이 높던 과거에는 생일 후 10일 지난 후 , 출산 후 3.7일이 되는 날 삼신상으로 태어난 아기의 무병장수를 기원했는데 이것이 생일날 미역국을 먹는 풍습의 유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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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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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은 어떻게 한글을 만들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세종대왕이 우리 글자를 만든 이유는 백성들이 글을 몰라 자기 뜻을 제대로 펼칠수없음이 안타깝다고 훈민정음 서문에 나옵니다.글자를 모르는 백성들은 법을 제대로 알수 없어 무엇이 죄가 되는줄 몰라 억울한 일을 자주 당했다고 합니다.중국에서 빌려온 글자인 한자는 우리말을 제대로 옮기기도 어렵고, 먹고살기 바쁜 백성들이 배우기에는 너무 어려웠는데 한자가 아닌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쓰자는 움직임에 대해서 당시 사대부들이 발발하였습니다.당시 조선은 중국 예법과 제도를 본받아 이미 오래전부터 한자를 쓰고 있었고, 사대부 중 새글자를 만들어 사용하는건 중국을 본받는 대신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배우기 쉬운 문자를 만들어 백성들이 글자를 알면 나라의 법과 제도를 만만하게 생각해 한문을 공부한 사대부들에게 함부로 할것이라 생각했습니다.세종대왕은 신하들 모르게 직접 훈민정음을 만드는 일을 했을거라 짐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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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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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후가 엄청난 악녀라고 하던데 왜그런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서태후는 청나라 말기의 황태후로, 청나라의 제9대 황제 함풍제의 부인이자 제10대 황제 동치제의 어머니, 제11대 황제 광서제의 큰어머니 이자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의 큰친할머니입니다.서태후는 당시 청나라가 외세의 침약으로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사치를 벌였는데, 진귀한 음식에 관심이 많았고 식탐도 많아 한끼에 128가지나 되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는 당시 중국 농민의 약 1년치 끼니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농민 1000명을 먹여 살릴 수준이었습니다.또 서태후는 절대 같은 음식을 3번이상 먹지 않았으며 관상용으로 호화스러운 음식을 가득차려 따로 내놓거나 과일을 방향제로 소비하기도 하였으며 오리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등 육식을 좋아하고, 돼지고기 중 동파육을 좋아해 매번 즐겼으며 제비집과 상어지느러미, 과일과사탕, 떡을 즐겼으니 서태후가 전용열차를 타고 지방에 가는 날이면 16칸 열차에 4칸이 주방이었으며 식사 준비 요리사만 50~100여명이엇씁니다.또, 매일 옥용산이라 불리던 새똥으로 세수하고 각종 꽃과 약초를 넣은 목욕물을 이용해 목욕하고, 돼지기름과 계란 흰자를 이용해 마사지를 하였으며 진주와 모유가 피부미용에 좋다 믿어 노년이 될때까지 진주를 갈아마시거나 외모가 아픔다운 젊고 건강한 산모들을 처소까지 불러 신선한 모유를 매일 먹었습니다.서태후는 자신의 위엄이 훼손됨을 누구보다 싫어하다 보니, 서태후에게 젖을 주는 산모는 무릎을 꿇은 채 서태후에게 젖을 물려야 했으며, 그녀의 머리 치장을 담당하는 궁녀들은 실수로 머리가 빠지거나 그녀를 아프게 하면 매질을 당하기도 했습니다.이화원에 거주 시 자신과 통화하는 상대방이 건방지게 누워 통화하는지 확인할수 없다는 이유로 전화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서태후 운전기사도 예외가 아니라서 무릎을 비스듬히 꿇고 운전해야 했기때문에 서태후가 탄 차는 늘 잔사고가 많았습니다.옷이 3000여벌이 되었고 옷을 담는 박스가 700박스가 넘었으며 버선과 신발에도 신경을 써, 서태후의 옷, 버선과 신발을 만드는데만 매년 3000명 가량이 동원 되었으며 비용은 매년 10000냥 정도 들어갔습니다.그녀는 버선, 신발도 한번 신거나 입으면 그대로 버렸고, 그녀가 쓰고 한번 버리는 목욕수건에도 수가 놓이는 등 엄청난 사치를 보였으며 보석에 대한 애착이 커서 과일 모양의 특이한 보석의 경우 환관들을 시켜 다물쇠로 늘 지키게하였고 이들 중 일부는 그녀의 무덤에 매장되었다고 합니다.비취와 진주를 좋아해 진주, 비취로 만든 팔찌와 반지, 호갑투와 머리장식, 망토 , 식기, 악기도 이것들로 만들기도했습니다.또, 북양함대 예산을 유용하여 이화원을 지었다는 설도 있고, 당시 러시아를 막기 위해 북양함대의 예산 일부를 육군이나 광둥해군 예산으로 돌렸을 가능성이 있기때문이 이러한 설이 있지만, 이화원에 쓴 은전 3000만냥은 강시 청나라 전체 1년 예산의 30%의 수준으로 이 막대한 돈이 정원 건설에 낭비되었습니다. 해군의 예산이 아니었다고 해도 당시 중국의 정세를 보면 외국과의 충동을 불가피하였고 이런 상황에서 국가 지도자라면 국방에 힘을 쏟아야 하는데 정원에 썼습니다.청일 전쟁에서의 피해는 총체적인 청군이 난맥과 지휘관들의 무능 때문이었지만, 돈이 헛되이 낭비된것 또한 원인이라 할수 있습니다.또, 의화단 활동이 거세지자 1900년 4월 서양 세력들이 두달안에 의화단을 진압하지 않으면 연합군을 편성하여 진압하겠다 밝혔지만 서태후는 방관하였고 의화단은 수도인 베이징에 들어가 학살과 파괴를 자행합니다.광서제를 중심으로 청나라 조정에서도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여 서양과 강화하자는 의견도 있었고, 이홍장, 위안스카이는 적극 의화단을 진압하여 하였으나 서태후는 오히려 의화단을 옹호합니다.결국 1900년 6월 10일 연합군 선발대 2000여명이 베이징에 들어오자 의화단의 반격으로 이럴 저지해 톈진으로 후퇴했는데 고무된 서태후는 사태 파악을 못하고 서양 연합군 선전포고를 하는 조서를 내리며, 독일과 일본 공사가 의화단의 습격으로 사망하는 일도 있었습니다.서양 8개국 연합군이 7월말 파견한 병력이 군함 54척,병력 50000여명을 파견하여 서태후는 시안으로 피난을 갑니다.그 결과 신축조약을 맺었는데 이때 청은 배상금으로 4억5천만냥을 물어야 했고 외국 군대의 베이징 주둔을 허가하고 기존의 통상조약에 불만이 있으면 열강들이 마음먹은대로 고칠수 있는 신세가 됩니다.그 전 청나라가 열강들에게 이권을 강탈당하기만 했지만, 이때부터는 사실상 열당들의 반식민지나 마찬가지 상태가 되었습니다.신축조약의 배상금 4억5천만냥은 청나라의 4.5년치 예산이며 청일전쟁으로 일본에 물어야 하는 배상금은 2억3천만냥르호 합치면 7년치 예산을 뺏기는 셈이었으니 일련의 사태로 위안스카이, 쑨원등에 1912년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하는 계기가 되는데 의화단 운동 시 서태후의 사치가 더 심해졌습니다.이처럼 서태후의 사치와 자신의 위화감조성 등 여러 이유로 악행, 악녀라는 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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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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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건무 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건무는 을지문덕과 함께 수나라를 물리친 영웅이 되며 그 공으로 고건무는 영양왕의 뒤를 이어 618년 왕이 되었으나, 연개소문에게 죽임을 당한 영류왕입니다.영류왕은 고구려 25대 평원왕의 아들로, 26대 영양왕의 이복동생입니다.그의 이름은 건무로 영양왕이 559년 무렵 태어난것에 비해 평원왕이 늦게 얻은 아들임을 고려하면 580년대 초반에 태어난 것으로 봅니다.그는 618년 영양왕이 죽자, 왕위에 올라 642년까지 고구려를 다스리다가 60세 무렵 죽었습니다.그가 30세인 무렵 612년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 전쟁이 나고 이때 그는 고구려 수도를 방어하는 사령관으로 바다건너 고구려 평양 부근에 도착한 수나라 좌익위대장군 래호아가 지휘하는 수만의 군대를 막아내는 임무를 맡고, 래호아의 군대는 요동을 통과하여 육로로 평양을 향해 공격하는 수나라 30만 병동대군에게 군수품을 보급하며 함께 평양을 공격할 임무를 맡았습니다.고구려는 이들을 빨리 격파하여 수나라 별동대와 만나지 못하게 해야한다, 건무는 유인작전을 펼칩니다.북사 래호아에따르면 영양왕의 동생 건무가 날래고 용감하기가 매우 뛰어나 죽을 각오를 한 결사대 100명을 이끌고 래호아의 진영으로 돌진했다고 하며 그의 형인 영양왕처럼 그도 용감하게 적진을 향해 돌격하여 군사들에게 모범을 보입니다.고건무의 작전은 적에게 일부러 패해 작은 승리를 안겨주어 교만하게 만드는것으로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자 하는 욕심이 컸던 래호아는 자주 승리를 거두어 고구혀의 수도 평양 장안성 앞에 이르자 자신의 군대만으로 고구려 수도를 함락시킬 야심을 갖게 됩니다.부총관 주법상이 래호아에게 수나라 육군을 기다려야 한다고 하지만 래호아는 직접 4만 대둔을 이끌고 장안성으로 진군했고 , 고건무는 외성을 비워놓고 적을 유인했습니다.외성안으로 들어온 수나라 군대는 기강을 잃고 약탕하자 숨겨두었던 고구려 군대가 나타나 대오가 흩어진 수나라 군대를 섬멸시킵니다.도망간 수나라 군대는 해안가에 마련한 진지만을 지키고 수나라 육군과 만나 합동작전을 펼칠 능력을 상실합니다.고건무의 활약으로 을지문덕은 보급품을 받지 못해 지친 30만 수나라 별동대를 살수에서 대파하였습니다.고건무는 뛰어난 지략과 용감함을 갖춘 512년 고-수 전쟁의 영웅이었습니다.군대에서 위상이 높아지고 사람들의 지지를 얻음에 그는 왕위 계승자로 부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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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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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웅산묘소 폭발사건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아웅산묘소폭발암살사건은 1983년 10월9일 미얀마의 수도 양곤에 있는 아웅산묘소에서 한국인 외교사절 다수가 북한테러분자의 폭파암살로 사상한 사건입니다.당시 대통령인 전두환의 미얀마 순방 이틀째인 10월9일 공식 일정은 오전 10시 30분에 미얀마의 독립영웅 아웅 산 장군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었습니다.미얀마를 방문하는 해외 주요 인사들은 다 하는 의례행사로 행사를 위해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등의 정부 수행원들과 기자들은 먼저 인야레이크 호텔에서 아웅 산 묘소로 별도 승용차편으로 이동하여 10시18분쯤 아웅 산 묘소에 가장 먼저 도착합니다.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심상우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등 나머지 수행원들은 영빈관에서 의전 행렬의 선발대로 10시10분경 아웅 산 묘소로 출발하여 서석준 부총리 등 일행들과 최종 합류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현지 도로 사정을 잘 아는 이 대사가 탑승한 차량이 앞장서서 안내했습니다.10시 26분 경 태극기를 단 감색 계통의 벤츠 280SE차량을 선두로 한 제대 차량이 앞뒤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묘소에 도착 후 공식 수행원, 기자, 경호원들의 시선이 자연히 이 차에 모였으며 창문이 선팅되어있어 내부는 보이지 않았고, 이 차에서 내려 도열에 합류한 이들은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일행입니다.수행원들끼리 악수하고 곧 각하가 오실테니 모두 자리에 정렬하자는 이대사의 말에 수행원 모두 2열 횡대로 도열하고 기자들도 촬영준비를 합니다.원래 일정에 따르면 10월9일 오전 10시15분 미얀마 외무장관이 전두환 대통령 숙소인 영빈관에 도착하여 대통령을 접견 후 10시20분 묘소로 함께 출발 예정이었으나, 영빈관으로 향하던 외무장관의 승용차가 운행 중 고장이납니다.당시 미얀마는 대한민국의 1960년대 수준의 교통 인프라를 가지고 있어 택시가 드물었으며 운전기사는 대체차량으로 택시 1대를 끌고 와 다시 출발하는데 이때는 이미 도착 예정시간이었던 10시 15분으로 이미 늦은 상황입니다.같은 시각 10시 15분, 영빈관에 있던 전두환은 도착해 있을 외무장관과 함께 차량을 타고 묘소로 출발하여 1층 로비에 내려가있었으나 외무장관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고, 국빈인 국가 원수가 로비에서 외무장관을 기다리는 격이 되어 모양새가 이상하여 다시 2층으로 갑니다.4분 뒤 10시 19분 미얀마 외무장관이 도착하였다는 보고를 받지만 전두환 대통령은 격려 인사를 중간에 멈추는 것이 이상하여 끝까지 하고 미얀마 외무장관과 함께 묘소로 출발하였는데 예정 시작보다 4분 늦은 10시 24분입니다.오전 일정이 대한민국 수행원들끼리 진행하는 묘소 참배이다 보니 조금 늦어도 외교적 결례가 될 일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영빈관에서 선발대로 출발한 이계철 주 미얀마 한국 대사를 비롯한 일부 수행원들은 10시 26분 묘소에 도착하고 당시 이계철 대사의 머리가 대통령과 매우 흡사한 대머리에 안경을 썼으며 태극기를 펄럭이는 의전 차량에서 내려 나머지 선발대 일행들과 함께 묘소로 진입하면서 먼저 도착한 수행원들과 악수를 나눈 뒤 앞 열 가운데 자리에 도열했으니 대통령으로 오인할수도 있었습니다.이러한 주장과 달리 상황이 달랐다는 주장도 있는데 통상적으로 대통령 비서실장은 전두환과 함께 합니다.그러나 그날은 참배할 묘지의 행사장이 좁다는 이유로 장세동 경호실장의 요청에 함병춘 비서실장이 먼저 도착합니다.그런데 함병춘 실장도 대머리였으니 이과정에서 북한이 이계철, 함병춘을 전두환으로 잘못봤던가 관례처럼 비서실장이 도착하니 전두환도 당연히 도착했다고 생각하여 폭탄테러를 시행하였다고 합니다.아웅산 묘소의 나팔수들은 전두환의 도착이 지연되자 행사 진행 전 시범 연주 삼아 연주를 시작하고 아웅산 묘소 참배 현장을 직접 볼 수 없던 북한 공작원들은 애초에 폭탄의 폭파 시점을 전두환의 묘소참배를 알리는 진혼 나팔 소리에 맞추기로 했기 때문에 결국 진혼곡 연주가 나오자마자 곧바로 테러를 진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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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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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도끼 사건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판문점도끼사건은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미루나무 벌목작업을 지도하던 미국인 UN군 장교 2명이 조선인민군 병력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입니다.당시 판문점은 물리적인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는 공동경비구역이었는데, 유엔군 측 3초소는 조선인민군 육군 초소3개소에 포위당한 지점에서 항상 위협에 노출되어있었습니다.따라서 가장 고지대에 위치한 5초소 측에서 3초소를 지켜보고 있어야 했는데 미루나무가 5초소의 시야를 방해하여 8월 3일 UN군 경비대 작업반은 3초소의 안전 도모를 위해 미루나무를 자를 것을 권고합니다.8월6일 한국인 노무자 4명과 UN군 병사 4명이 미루나무 절단을 시도했는데 북한군이 이의를 제기하며 작업을 중단시켰으나 경비대는 8월 18일 절단이 아닌 가지치기를 하기로 결정하고 오전 10시30분 한국인 노무자 5명을 동원하여 가지치기를 하였으며 경비대 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 소대장 마크 배럿 중위 등 UN장교 2명, 병사4명 , 국군장교 1명, 병사4명 등 총 11명의 병사들이 작업 감독을 합니다.북한군 군관2명과 하전사 8명이 나타나 재항의를 하자 UN군은 가지치기 작업을 하는 중이라 설명하고, 현장에 있던 북한군도 수등하여 노무자들에게 가지를 잘 치는 법에 대해 조언하기도 했습니다.10시 47분~50분 사이 박철 중위 등 북한군 장교 2명이 15명의 병력을 이끌고 현장에 나타나 박철 중위는 보니파그 대위에게 작업 중단을 요구합니다.보니파스 대위는 이를 무시하고 작업을 계속 지시했고 11시30분 경 북한군20여명이 트럭을 타고 추가로 도착하였으며 박철 중위가 그만두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위협하지만 보니파스 대위는 무시합니다.박철 중위가 소매를 걷고 차고있는 손목시계를 호주머니에 넣으며 신호를 보내자 북한군들은 일제히 소매를 걷고, 박철 중위가 죽여! 라고 소리치자 북한군들은 트럭에 싣고 온 둔기와 한국인 노무자들이 사용하던 도끼를 이용해 기습적으로 폭행을 가합니다.보니파스 대위가 북한군의 구타에 가장 먼저 쓰러지고, 북한군 5명이 쓰러진 그들에게 달려들어 도끼로 머리를 찍어 살해했으며 마크 배럿 중위는 발견 당시에는 살아있었지만 이송 중 사망하였습니다.나머지 병사들도 유엔군 병사 1명을 제외한 전원이 부상당했습니다.아보니파스대위는 사건 당일 한국에서의 근무가 3일 남았고, 후임 중대장 역시 JSA에 투입되어 인수인계 과정중으로 가지치기 작업 감독 지휘는 후임 중대장에게 인계할 수 있는 업무였으며 배럿 중위는 JSA에 전입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입니다.박병엽 전 조선로동상 대외조사부 부부장의 증언록에 의하면 이 사건은 당시 북한 주석인 김일성이 아닌 김정일의 지시였다고 하며 당시 북한은 김정일이 후계 체제를 구축해 나가는 과정으로 김정일이 전국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었습니다.김정일은 당시 UN군이 판문점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한다는 보고를 받고 조선 사람의 본때를 보여주라. 단, 남조선 노무자들은 건드리거나 총을 쓰지말고 미제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라 라고 지시했다고 합니다.
학문 /
철학
23.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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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대통령 저격사건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8.15 대동령저격사건은 1974년 9월15일 서울특별시 국립극장에서 거행된 광복 제29주년 기념식에서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이 당시 대통령 박정희를 저격한 사건입니다.오전 10시23분,, 광복절 경축사를 낭독하던 대통령을 향해 청중석 뒤에서 문세광이 나와 권총을 발사합니다.총탄이 빗나가 대통령은 연설대 뒤로 몸을 피하여 무사했으나, 이어 발사한 두번째 탄이 단상에 있던 대통령 부인 육영수의 머리를 맞힙니다.또 문세광이 연단에 뛰어나가며 권총을 발사할 때 경호팀이 응사한 총탄에 맞아 합창단의 한 여학생이 절명하고, 범인은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육영수는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으로 이송되어 5시간 이상의 수술을 받으나, 오후 7시에 사망합니다.범인 문세광은 재일조총련계 한국교포 2세로 일본식 이름은 난조 세이코였으며, 일본인 요시이 유키오라는 이름의 여권으로 입국하였습니다.1974년 5월 북한의 대일공작선이며, 재일교포 북송선이기도 한 만경봉호에서 그해의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대통령을 저격하라는 지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범인이 사용한 권총이 일본의 경찰관서에서 절취한 것임이 나오고 범인이 소지하였던 위조여권 발부한 데에 대한 책임, 저격범의 공범 중 일본인이 있었다는 사실 등으로 일본 정부는 법률적 내지 도의적 책임을 면할수 없게되었습니다.아 사건을 계기로 한일관계가 불편해졌으나 일본정부가 책임을 인정하고 9월19일 집권당인 일본자유민주당 부총재인 시나 에쓰사부로가 수상 다나카 가쿠에이의 친서를 휴대하고 진사특사로 한국을 다녀감으로 양국관계가 회복되었으며, 범인이었던 문세광은 그해 12월 17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며 20일 집행되었습니다.
학문 /
역사
23.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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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눈물이라는 작품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행복의 눈물 작가는 로이 릭텐스타인 입니다미국 팝 아티스트로 1950년대 말 추상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았으나, 1961년 만화 캐릭터와 상업적 이미지를 그렸으며 일상용품의 광고 이미지와 만화의 일부분을 확대하여 두꺼운 검은 윤곽선과 역동적인 구성으로 표현한 것이 그의 작품의 특징입니다.제작은 1964년 입니다.
학문 /
음악
23.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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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고흐는 왜 귀를 잘랐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반고흐가 자신의 귀를 자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습니다.재정적으로 어려웠던 고갱은 반고흐의 동생 테오와의 관계를 이어가다 테오는 형을 후원하고 돌보는 일에 지쳐있던 상태였습니다.이에 테오는 고갱에게 형과 고류할 것을 요청하고 룸메이트가 됩니다.그러나 반고흐와 고갱은 서로 정반대의 성격을 가지고 있어 대립이 많았고, 결국 싸움이 일어나며 고갱에게 욕을 들은 반고흐는 귀를 잘랐다고 합니다.또 다른 설은 평소 내성적이지만 마음은 따뜻했던 반고흐는 주변 이들의 곤경을 지나치지 못하는 인물로, 사창가에서 청소를 하던 한 여성이 들개에게 물려 피부가 썩어가는 모습을 보게되고, 반고흐는 그런 그녀를 좁고자 그녀가 망가진 피부를 치료할 수 있도록 자신의 귀를 건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학문 /
미술
23.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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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
1937
1938
1939
1940
1941
1942
1943
1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