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프로필
프로필
답변
잉크
답변 내역
전체
학문
인조의삼전도의 굴욕이란 어떤것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637년 2월 24일 청나라가 병자호란을 일으키고 한양으로 빠르게 남하하자 조선의 왕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하려하나 청군이 길을 막아 강화도로 갈수 없게 되었고 이에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합니다.그러나 성내의 물자가 떨어지자 끝내 청나라와 치욕스러운 강화를 맺으니 이를 삼전도의 굴욕이라 합니다.
학문 /
역사
23.11.14
0
0
왕규의 난은 어떠한 사건 이였는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혜종 때 왕규가 왕위쟁탈을 위해 일으킨 난입니다.943년 태조가 죽고 혜종이 왕위에 올랐으나 왕권은 불안했고 혜종은 태자때부터 강력한 호족 출신인 박술희의 지지와 후원을 받고 있었으나 왕권을 노리는 적대 세력이많고 강력했습니다.왕규는 혜쫑의 후견세력인 박술희 세력을 제압하고 왕위를 찬탈하기 위해 노골적인 행동을 취하는데 혜쫑대의 정정불안과 왕위쟁탈전의 원인은 혜종의 세력기반이 미약한 데 있었습니다.왕규는 광주를 기반으로 한 호족출신으로 태조를 섬겨 대광까지 되며 두 딸을 태조의 제 15,16비로 들였는데 16비는 광주원군을 낳습니다. 이처럼 왕규는 강력한 호족으로 왕실의 외척으로서 태조 만년에 강력한 실력자로 있었습니다.그는 태조에게 충성하나 혜종의 왕권은 인정하지 않았고 혜종을 죽이고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세우고자 합니다.그는 두 차례에 걸쳐 혜종 살해를 시도, 한번은 혜종의 침실에 자객을 잠입시켜 죽이려 했는데 마침 혜종이 잠에서 깨어 자객을 제압하면서 위기를 모면합니다.또 한번은 직접 무리를 이끌고 밤에 혜종의 침실을 급습했으나 혜종은 이미 다른 데로 거처를 옮긴 뒤었는데, 혜쫑은 최지몽이 무슨 변이 있을테니 거처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몰래 중광전으로 피한 것입니다.왕규의 세력이 혜종의 왕권을 압도하고 있던 상황에서 세력기반이 약한 혜종은 그를 문책하거나 응징하지 못했고 당시 혜종의 후견인으로서 왕규와 대립관계에 있던 박술희 역시 자신의 신변보호에 급급합니다.그리고 왕실 내에서도 혜종의 이복동생 요는 서경의 왕식렴 세력과 결탁, 왕위를 노리고 있었습니다.이에 혜종은 주위에 항상 갑사들을 수행했고 암살 위협에 정상적인 사고와 행동을 할수 없게 되며, 결국 왕규의 모역은 요와 결탁한 왕식렴의 서경 군사력의 개입으로 실패합니다.고려사는 요가 왕식렴세력과 결탁한 것은 왕규의 모역에 대비한 것으로 기록되나 이는 혜종의 왕권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 아닌 요의 왕위계승을 위한 포석이었습니다.요는 945년 서경 왕식렴의 군사력을 개경으로 불러들여 왕규를 갑곶에 귀양 보낸 뒤 사람을 보내어 죽였으며 그 무리 3백여명도 죽였으며 혜종의 후견세력인 박술희 살해, 그 책임을 왕규에게 전가합니다.박술희는 태조의 유명까지 받은 중신이었으므로 살해의 진상을 은폐할 필요가 있었기때문이며 요는 이처럼 왕위계승에 방해가 되는 적대세력을 일소한 뒤 왕위에 오릅니다.
학문 /
역사
23.11.14
0
0
조선의 병자호란은 어떤 전쟁이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병자호란은 1636년 12월부터 이듬해 1월 청나라가 조선에 대한 2차 침입으로 일어난 전쟁입니다.1627년 후금의 조선에 대한 1차 침입때 조선은 무방비 상태로 후금에 당함으로써 후금에 대해 형제의 맹약을 하고 두 나라 관계는 일단락 되는데 조선은 정묘호란 이후 후금의 요구를 들어 1628년 이후 중강과 회령에서의 무역을 통해 조선의 예폐 외에 약간의 필수품을 공급해 줍니다.그러나 그들은 당초 맹약을 위반하고 식량을 강청하고 병선을 요구 하는 등 온갖 압박을 가했고,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변경 민가에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므로 변방의 백성과 변방 수장들의 괴로움이 많았습니다.이러한 후금의 파약 행위로 조선의 여론은 군사를 일으켜 후금을 치자는 척화배금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격증, 당시 후금은 만주의 대부분을 석권하고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까지 공격하면서 정묘호란 때 맺은 형제의 맹약을 군신의 의로 개약하자 요청, 황금, 백금 1만냥, 전마 3000필 등 종전보다 무리한 세폐와 정병 3만까지 요구합니다.조선에서는 이러한 그들의 요구에 응하려 하지 않고 화의 조약을 무시하고 후금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1636년 2월 용골대, 마부태 등이 후금 태종의 존호를 조선에 알림과 동시에 인조비 한씨의 문상 차 조선에 사신으로 왔는데 그들이 군신의 의를 강요해 조선의 분노가 폭발하게 됩니다.조정 신하들 가운데 척화를 극간하는 이가 많아 인조도 이에 동조해 사신의 접견을 거절하고 국서를 받지 않았으며 후금 사신을 감시하게 됩니다.조선의 동정이 심상하지 않음을 알아차린 그들은 일이 낭패했음을 알고 민가의 말을 빼앗아 도주하는데 도망치던 중 조선 조정에서 평안도관찰사에 내린 유문을 빼앗아 본국으로 가져가게 됩니다.이로 인해 후금에 대한 조선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그들은 비로소 명확하게 알게 되었고 재차 침입을 결심하게 된 것으로, 같은 해 4월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고치고 연호를 숭덕이라 했으며 태종은 관온인성황제의 칭호를 받습니다.그는 이 자리에서 참석한 조선 사신에게 왕자를 볼모로 보내 사죄하지 않으면 대군을 일으켜 조선을 공략하겠다고 협박, 이와같은 청나라의 무리한 요구는 척화의지가 고조되고 있는 조선 조정에 받아들여질 리 없었고, 그해 11월 심양에 간 조선 사신에게 그들은 왕자와 대신 및 척화론을 주창하는 자를 압송하라 최후 통첩을 보내나 조선에서 그들의 요구를 묵살, 이에 청나라는 조선에 재차 침입하게 됩니다.
학문 /
역사
23.11.14
0
0
6.25 전쟁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대표적인 나라들은 어디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유엔군에는 우리나라와 미국, 영국, 캐나다 자치령, 튀르키계, 호주,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뉴질랜드, 그리스 왕국, 에티오피아 제국, 벨기에, 프랑스, 남아프리카 연방, 룩셈부르크 등이 있습니다.
학문 /
역사
23.11.14
0
0
조선시대 왕의 사위는 어떤 지위와 권한을 가졌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부마도위는 천자의 행차 때 갑작스런 암살의 위협을 막기 위해 어느 마차에 전자가 탔는지 모르도록 동행하는 예비 마차인 부마거 를 끄는 말인 부마를 관리하던 직책입니다.왕이 타는 마차를 관리하다 황제의 행차가 있으면 선탑하는게 주요 임무지만 매우 중요한 것은 행자 때 황제가 몇번째 마차에 타고 있는가 라는 초특급 기밀을 관장했습니다.이런 직책을 공주의 남편인 사위를 직접 임명하기 시작했고, 처자의 사위만이 부마도위 직책을 하도록 굳어지면서 결국 부마도위=천자의 사위가 됩니다.왕의 사위인만큼 그 대우가 각별하고 왕실에서 넉넉하게 지원해 편하게 살수 있었으나 아내가 왕녀이다 보니 아내가 살아있을 때 첩을 두지 못했고, 아내가 죽어도 재혼을 할수 없었습니다.
학문 /
역사
23.11.14
0
0
고려 광종 때 노인안검법은 어떠한 정책이였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광종때 실시한 것으로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사람을 조사해 다시 양인이 될 수 있도록 조치한 법을 말합니다.
학문 /
역사
23.11.14
0
0
흄의 도덕적 실천동기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흄은 이성만으로는 도덕적 행동을 할수 없다고 주장, 그는 도덕적 판단은 순전히 이성적인 고려가 아닌 궁극적으로 정서나 감정에 근거하며 그에 따르면 이성은 우리에게 사실에 대해 알려주고 정보를 제공하나 궁극적으로 우리의 도덕적 판단과 행동이 이끄는 것은 우리의 감정, 특히 승인 또는 비승인의 감정을 말합니다.흄의 관점에서 이성만으로는 무엇이 도덕적이고 좋고 나쁜지를 결정할수 없고 연민, 공감, 자비와 같은 우리의 감정은 우리의 도덕적 분별력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선행을 실천하도록 하며 감정은 도덕적 행동 뒤에 동기를 부여하는 힘을 제공, 이성은 도덕적 주장을 평가하고 평가하는 도구의 역할입니다.
학문 /
문학
23.11.14
0
0
서희장군이 받아낸 강동6주는 어떻게 받아낸 것 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거란 제 1차 침입 때 고려의 장수 서희가 거란장수 소손녕과 벌인 담판을 서희의 외교담판이라 합니다.993년 거란이 소손녕을 장수로 삼아 고려에 침입해 왔을 때, 고려조정에서는 중신을 시켜 항복하자는 의견과 서경이 이북의 땅을 베어주고 절령을 경계로 삼자는 견해 등이 나왔고, 이에 성종도 할지론을 따르려 하나 적장의 석연치 않은 행동을 간파한 서희는 저들의 출병이 영토의 확장에 있지 않음을 알고 왕의 동의를 받아 직접 적진에 나아가 소손녕과 담판하게 됩니다.이 담판에서 소손녕은 침입의 이유로 고려는 신라땅에서 일어났는데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고구려땅을 침식하고 있으며 자기 나라와 땅을 연접하고 있으면서도 바다 건너 송을 섬기고 있다는 점을 들고 따라서 만약 땅을 베어 바치고 조빙을 닦으면 무사할 것이라 제안합니다.이에 서희는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옛 터전으로 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한 것인데, 만일 지계로 논한다면 상국의 동경도 모두 우리 경역 안에 있는 셈인데 어찌 침식했다고 할수 있겠는가.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였는데 여진이 그곳에 자리잡고 있어 길이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조빙을 통하지 못한 것은 여진 때문이다.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아 성보를 쌓고 길이 통하게 된다면 감히 조빙을 닦지 않겠는가. 답합니다.서희의 당당하고 조리있는 변론을 들은 소손녕은 군사들을 돌리고 약속대로 고려가 압록강 동쪽 280리의 땅을 개척하는데도 동의해 강동 6주를 개척할수 있게 됩니다.
학문 /
역사
23.11.14
0
0
7이 행운의 숫자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대 이스라엘에서 7은 성수였고 6은 악마의 수로 생각했으며 7은 하늘의 수인 3과 땅의 수인 4를 더한 수로 세계의 모든 것을 나타낸다 믿었습니다.기독교, 유대교의 공통 성전이라 할수있는 구약성서에 7과 관련된 기록이 많은데ㅐ 기독교의 신인 여호와가 천지를 창조 시 걸렸던 시간이 7일, 그것을 기념하는 성스러운 안식일도 7일째였으며 노라에게 예견된 홍수까지 유예기간도 7일 이었습니다.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신화인 수메르 신화에서 이는 육안으로 관측 가능한 큰 천체가 태양, 달, 수성, 목성, 금성, 화성 , 토성까지 7개이었기 때문이며, 바빌로니아에서 이어진 요일은 그레고리력에서도 7개로 이어져 오늘날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게 됩니다.중국은 8,9를 행운의 수로 여기고 일본은 7과 8을, 이탈리아는 13, 베트남은 9 입니다.
학문 /
역사
23.11.14
0
0
노출콘크리트 건물의 약사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노출콘크리트는 철근콘크리트 건축의 아버지인 프랑스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에 의해 최초로 퐁티우 정비소에서 시도되었습니다.건축가 르 꼬르뷔지에는 아르세이유의 유니떼 다비따시옹 아파트에서 콘크리트를 완전히 노출하는데 페레의 경우와 다르게 거친 콘크리트의 물성과 거푸집의 흔적들을 그대로 표현하는 베똥 브륏을 주장합니다.1950년대 시공되는 그의 작품들에서는 콘크리트는 구조재인 동시에 마감재로 표현, 영국의 건축가 스미슨 부부는 브루탈리즘의 개념을 최초로 제창하며 재료와 구조의 진실성, 가시성 등을 제시하며 콘크리트를 비롯해 다양한 산업재료들의 물성을 그대로 노출해 마감합니다.현재 상당수의 예술건물이 노출콘크리트 공법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학문 /
역사
23.11.14
0
0
280
281
282
283
284
285
286
287
2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