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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제의 인지발달이론에 대해 알려주세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간의 인지발달은 환경과 상호작용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적응과정이며 이것이 몇가지 단계를 거쳐서 발달한다고 보는 것입니다.여기서 인지란 여러 방법을 거쳐 기억에 저장한 후 이를 사용할 경우 인출하는 정신과정을 의미합니다.인지 발달의 각 단계에 도달하는 데는 개인의 지능이나 사회환경에 따라 개인 간 연령의 차이는 있을 수 있으나 발달 순서는 바뀌지 않는다 가정, 각 단계는 전 단계의 심리적 구조가 통합되어 단계가 높아질수록 복잡성이 증가되며 개인의 인지구조는 유아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느리게 변하며, 그 일정 기간 동안 나타나는 사고양식에는 일관성이 있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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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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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철의 건저사건은 어떠한 사건이였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건저문제는 1591년 왕세자 책봉 문제를 둘러싸고 동서분당 사이에서 일어난 정치적인 사건을 말합니다.건조, 즉 왕세자 책봉문제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선조는 와이비의 소생인 원자가 없었고, 다만 후궁 소생의 왕자만이 있었으므로 왕세자 책립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이때 건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좌의정이었떤 정철이 우의정 유성룡 , 부제학 이성중, 대사헌 이해수 등과 같이 상의하고 선조에게 건저할 것을 주청하려 합니다.또 정철은 이 건저 문제를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산해에게도 상의하고 건저 주청 문제를 최종 결정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하기로 했으나 이들은 두번이나 약속을 어깁니다.한편, 이산해는 당시 선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후궁 김빈의 오빠되는 김공량과 결탁 , 왕의 뜻을 살피면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합니다.이산해는 왕이 김빈의 소생 신성군 후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김빈에게 정철이 장차 건저를 주청한 뒤 모자를 죽이려고 한다고 무고, 김빈이 왕에게 이 사실을 울면서 호소하게 되자 왕은 이에 매우 노하게 됩니다.그 뒤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던 정철은 경연에게 건저 문제를 거론, 이 때문에 왕이 크게 노하자 같은 자리의 이산해, 유성룡 등은 아무 말도 못한 채 침묵을 지켰습니다.이 사건을 계기로 건저 문제를 발설한 서인 정철은 삭탈관직되고 같은 서인이었던 이성중, 이해수 등은 모두 외직으로 강등되었습니다. 이는 군주전제국가에 있어서는 흔히 볼수있는 사건이지만 , 이 문제가 동서분당의 쟁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됩니다.즉, 당쟁의 한 형태라고 볼 수있는 이 사건은 1589년 일어난 기축옥사로 당한 동인들이 서인에 대한 보복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으로 기축옥사는 정여립의 모반 사건이 원인이 된 옥사였습니다.즉, 정철 등 서인들이 당시 정여립을 옹호한 동인들을 정여립과의 공모자로 몰았던 것으로 이에 동인인 이발, 이길, 백유양, 유몽정, 최경영 등은 처형되고 정언신, 정언지, 정개청 등은 귀양가게 되었ㅇ며, 노수신은 파직당했습니다.이 기축옥사로 많은 동인이 희생되었고 또 정권에서 쫓겨나게 되었으며 이 옥사의 보복으로 꾸며진 것이 건저 문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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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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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상 청바지는 언제부터 입기 시작 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는 1950년대 한국전쟁 때 미군이 들어오면서 사복차림일때 청바지를 입었으며 , 1960년대 ~70년대 독재 정부에 반발하는 젊은이들이 거리에서 시위를 하며 부담없이 노상에 앉을 수 있는 편한 옷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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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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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한자인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상서 서, 높을 륭 입니다.높을 륭은 높다, 높이다, 두텁다 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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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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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고분을 릉ㆍ총ㆍ분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차이점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릉- 왕이나 왕후의 무덤총- 무덤의 주인이 누군인지는 알수없으나 다른 무덤과 특별하게 구분될수있는 특징이 있는 무덤발굴된 무덤의 출토 유물로 미루어볼때 왕릉이나 왕비릉이라고 짐작되는 것도 여러 있으나 이걸 릉이라 부르기엔 확실한 증거가 없고 묘라 부르기엔 곤란해 이런 무덤을 통이라 부릅니다.고분- 과거 및 현재의 무덤 중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자료가 될수있는 분묘 분은 성토를 한 묘를 뜻하며, 고분은 과거 우리 조상이 묻힌 무덤을 말하는 것도 있으나 고고학계에서는 일정한 형식을 갖춘 한정된 시대의 지배층의 무덤을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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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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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해예송은 어떠한 논쟁이였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기해예송은 1659년 효종이 사망하자 아버지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효종의 상에 어떤 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 간에 일어난 논쟁입니다.인조 43세 당시 15세 장렬왕후 조씨를 부인으로 맞이했는데 인조가 사망하자 장렬왕후는 자의대비가 됩니다.이 논쟁은 정파의 정치적 생명이 걸린 문제로 조선시대 국가 지배이념이 성리학에 바탕을 둔 예학은 적장자가 사망했을 때 부모는 3년복을 입고 차자가 사망했을 때 1년복을 입었습니다.인조는 첫째아들인 소현세자가 의문사로 죽자 그의 아들 석견 즉, 왕손이 살아있었음에도 차자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해 왕통을 계승, 적장자가 왕위를 승계하는 조선시대 종법에 벗어난 일이었습니다.따라서 자의대비의 상복은 효종이 차자였으므로 1년복을 하는 것이 마땅했는데 송시열, 송준길 등을 중심으로 하는 서인은 1년복으로 결정해 현종에게 간하지만 왕가의 특수성과 왕통을 이었으므로 장자와 같은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주장이 남인들 중심으로 제기되며 이때 남인의 중심적인 인물은 윤휴, 윤선도 등이 현종에게 상소를 올립니다.효종이 사망하자 계비인 자의대비의 상복을 두고 장자의 3년 복을 할것인지 차로 인정하여 1년복을 할것인지를 두고 논쟁이 일어나게 되며 왕위를 이은 특수층의 의례가 종법에 우선할수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관점의 차이가 반영됩니다. 효종의 즉위와 같은 왕위계승에 나타나는 종통의 불일치를 성서탈적이라 표현했는데 기왕의 적통이 끊어지고 새로운 적통에 의해 왕위가 이어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이는 왕위계승이 종법의 원리에 맞지 않더라도 이를 종법 체계 내에서 이해하고자 하는 것으로 왕가의 의례라 할지라도 원칙인 종법으로부터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관념의 표현이었습니다.따라서 이러한 규정에 의거할 경우 효종은 왕통상으로 인조의 적통을 이었으나 종법상으로는 인조의 둘째 아들이므로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는 당연히 종법에 따라 1년상을 입어야 하는 일, 그러나 자의대비가 1년 상복을 입게 되면 효종이 인조의 왕위를 계승한 적장자가 아니라 차자라고 인정한 일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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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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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의료사고를 낸 이형익을 왜 처벌하지 않았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형익은 귀국길에 위중해진 소현세자의 병세가 잡히지 않자 중도에 투입된 인물로, 탕약이 효험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응급조치로 번침을 놓아 일시적으로 증세를 호전시켰으나 소현세자는 한달 뒤 다시 병이 도졌고 이때 다시 침을 맞았을 때는 차도를 보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실록이 승정원 일기 등과 달리 세자가 귀국 전부터 몸이 좋지 않은 상태였고 이형익의 치료로 한달 전엔 증상이 호전된 부분을 기록하지 않고 사망 직전 침을 맞은 기록만 남기는 바람에 이형익에게 침을 맞고 급사했다는 잘못된 인식이 생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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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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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서도 외과형 수술을 보편적으로 한 국가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중국의 화타는 외과수술을 시행했던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화타가 실제 개복 수술 정도의 외과 수술을 수행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으나 마비산을 복용시켜 환자의 정신을 잃게 한 후 복부를 절개해 장기의 일부를 도려내고 실로 봉합해 수술을 마친다는 기록으로 보아 현대의 외과 수술의 방식과 상당히 유사함을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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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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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문화는 한국에 언제 처음 도입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삼국시대 현재의 침대와 유사한 침상을 볼수있는데 원초형의 살림집이 맨바닥이었다가 발전을 거듭하며 돌을 깔거나 자리나 멍석을 까는 방식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공간으로 인해 자연입식의 생활방식이 적용되어 침상이 생기게 됩니다.고구려 고분 벽화를 보면 주인공이 침상에 앉아있는 모습이 있고 고구려 상류사회에서 침상이 있는 그림들을 만나볼수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주택법령에도 이러한 입식생활을 예측할수있는 내용이 수록되어있습니다.고구려 시대 이후 구들이 보편화되고 좌식 생활로 바뀌면서 침상이 줄어들고 조선시대 후기 온돌로 난방해 침상은 왕궁이나 고관대작의 집에서 부분적으로 사용됩니다.1888년 우리나라 최초 호텔인 대불호텔 11개의 침대방에 있던 침대가 우리나라 최초 침대로 볼수있으며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한말에 일본에 의해 침대가 들어온 것으로 기록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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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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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장군 흉상 철거를 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무엇인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표면적인 이유는 홍범도 장군의 소련 공산당 가입 이력때문이며 정치적 배경은 자유민주주의 수호 및 한미일 동맹의 공고한 체제를 구축하기 위함으로 해석됩니다.즉 대한민국의 주적은 북한 공산당이며 우리 국군은 공산 전체주의에 대항해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군대이어야 하므로 홍범도 장군의 흉상은 육사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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