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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삽줍는 여인들이 줍고 잇는것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두 여인은 허리를 굽혀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고, 한 여인은 자신이 모은 이삭들을 간수하고 있습니다.이는 곡식이나 과일, 나물 따위를 거둘 때 흘렸거나 빠뜨린 낟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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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23.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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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공무원들도 오늘날처럼 승진하는 제도가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승진을 뜻하는 옛 단어로 이전 을 사용했으며, 승진은 치열한 경쟁이었으므로 공부, 시험, 추천, 뇌물 등의 다양한 방법을 통해 승진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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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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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권신인 한명회의 생애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본관 청주, 자 자준, 호 압구정, 사우당, 시호 충성, 장순왕후, 공혜왕후의 아버지 입니다. 그의 조부는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명나라에 가서 조선 이라는 국호를 받고 돌아온 한상질이며 부친은 한기 입니다. 젊어서 여러번 과거에 응시했지만 낙방하자 나이 40세가 다되어 1452년 음보로 경덕궁직을 얻었으며 친구인 교리 권람의 주선으로 수양대군의 무리에 가담하여 무사 홍달손, 양정 등 30여명을 추천하고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을 도왔습니다. 군기녹사가 되고 정난공신 1등으로 사복시소윤에 오릅니다.1454년 동부승지가 되고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좌부승지에 승진, 그 해 좌익공신 1등으로 우승지가 되었으며 이듬해 사육신의 단종 복위운동을 좌절시키고 그들의 주살에 적극 가담하여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에 올랐습니다.1457년 이조판서가 되고 상당군에 봉해졌으며 이어 병조판서를 거쳐 1459년 황해, 평안, 함길, 강원 4도의 체찰사를 역임, 한명회는 활쏘기에도 능했고 문치보다 병권에 재능을 보였으며 오지였던 북방으로 파견을 나가는 일에도 망설임이 없었고 북방을 견고하게 하는데 남다른 공적을 쌓았으며 이 일로 한명회에 대한 세조의 신임이 더 두터워졌고 1461년 상당부원군에 진봉, 이듬해 우의정이 되고 1463년 좌의정을 거쳐 1466년 영의정이 되어 병으로 한때 물러났습니다.1467년 이시애의 난 때 반역했다고하여 체포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풀려났고 다음해 세조가 죽고 이 해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 1등에 올랐고 1469년 영의정에 복직, 불편한 관계였던 예종이 갑자기 죽고 막내사위인 성종이 즉위하자 어린 왕을 대신해 정무를 맡아보는 원상이 되어 서정을 결재, 이때도 병권에 관심이 높아 병조판서를 겸하였고 그의 세도는 절정에 이릅니다.1471년 좌리공신 1등이 되고, 그 해 춘추관영사에 이르렀으며 평소 몸이 쇠약했던 공혜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한명회의 권세도 추락, 성종 5년 영의정과 병조판서 해임 , 자신의 정자인 압구정에서 명나라 사신을 사사로이 접대한 일로 탄핵되어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었습니다. 세조의 묘정에 배향되고 1504년 갑자사화 때 윤비 사사 사건에 관련되었다 하여 무덤을 파헤치고 시체는 토막내어졌으며 몸을 잘라 한양 네거리에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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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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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사육신들에는 누가 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456년 단종 복위에 목숨을 바친 인물 가운데 남효온의 육신전에 소개된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6명으로, 조선 중기 이후 충절을 상징하는 인물로 여겨집니다.단종 복위 운동에 참여한 성승, 박팽년, 유응부, 성삼문, 이개 등은 처형된 뒤 한강 기슭 노량진에 묻혀졌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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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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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가장 분량이 많았던 책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락대전은 세계에서 가장 긴 책으로 군림하고 있습니다.1408년 제작으로 1만 1095권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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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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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상 김만덕은 어떤 식으로 조선 시대에 업적을 쌓았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양인인 아버지 김응열과 어머니 고씨 사이에서 태어나 12살때 부모를 잃고 두 오빠는 목동이 되어 막일을 하며 외삼촌 집안에 얹혀살다가 은퇴 후 기생에게 수양딸로 맡겨져 기생 수업을 받았으며 이후 제주 관가의 기생이 되었지만 가문에 누가 된다는 친가 쪽의 강요로 그만두게 되며 다시 양인으로 돌아온 뒤 객주 일을 시작, 본토와 제주도 사이의 물자 유통에 수완을 발휘해 제주도에서 알아주는 대부호가 됩니다.1795년 태풍이 제주도를 강타하며 식량 생산이 저조했던 도내 농사에 큰 타격을 입었고, 본토에서 2만섬을 보내지만 가던중 침몰, 이때문에 수많은 아사자가 발생하지만 김만덕은 자신의 재산을 털어 본토에서 쌀 5백섬을 사와 제주도민의 구호에 써달라고 관가에 헌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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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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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판사판은 어디서 유해됐나요? 좋은말인지 안좋은말인지....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불교 승려의 두 부류인 이판승과 사판승을 합쳐 부르는 말로 사판승은 주로 잡역에 종사해 사찰의유지에 힘쓰고, 이판승은 승려 본분을 다해 찬선을 통한 수행에 힘썼습니다.조선의 억불숭유에 의해 천인으로 전락한 승려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막다른 선택으로 여겨진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부정적인 의미의 끝장이라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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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23.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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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서만 등장하는 여왕.. 여왕이 가능했던 역사적 스토리가 알고 싶습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신라에는 골품제도가 있었고 왕족에는 성골과 진골이 있었습니다. 왕을 뽑을 때 이 제도를 따라야했는데 부모가 모두 왕족인 사람을 성골이라 했고 성골만이 왕이 될수 있었습니다.26대 진평왕이 세상을 떠난 후 진평왕에게는 아들이 없고, 형제도 없어 왕위를 이을 성골 남자가 없었고 성골 중 진평왕의 딸 덕만 공주가 있었습니다.성골이 단 한명이라도 있는 한 성골이 왕이 되어야 했기 때문에 결국 덕만 공주가 왕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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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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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여자들은 바지를 아예 입지 않았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조선시대 여자 바지는 대체로 치마 안에 입는 것이 일반적이였고 조선 말기 우리나라의 여자 바지는 속속곳, 바지, 단속곳, 말군, 두루치기 등이있었습니다.속속곳은 단고라고도 표기하며 가장 속에 입는 아래옷으로 대체로 무명으로 만든 치마와 비슷한 형태의 바지였습니다.말군은 양반부녀자들과 궁중의 시녀, 기녀들이 말을 탈때와 예장으로도 입었습니다.여자바지도 저고리와 같이 계절에 따라 여름에 입는 홑바지, 깨끼바지, 봄 , 가을에 입는 겹바지, 누비바지, 겨울에 입는 솜바지 등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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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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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들의 이름은 왜 외자를 사용했나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왕 이름은 함부로 말할수도, 쓸수도 없어 백성들의 말의 사용을 배려하여 잘 사용하지 않는 한자로 외자 이름을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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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23.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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