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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형제가 독일의 민담을 수집한 배경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그림 형제는 언어의 변천사를 연구하던 언어학자들이었고 그림동화는 연구 과정에서 모은 민담을 책으로 엮은 것입니다.1803년 그림형제는 마르부르크 대학교에서 만난 독일 낭만주의 작가인 루트비그 아힘 폰 아르니뫄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영향으로 옛 이야기에 관심을 갖게 되고 그림형제는 카셀에서 구전되고 있던 민담을 수집하기 시작하는데 도로세 비에흐만과 위그노였던 하센플루크와 빌트 가정에서 많은 이야기를 수집할수 있었습니다.민화에 가필하는 것이 시인의 권리라고 생각한 브렌타노 등과 의견이 맞지 않았으므로 그림 형제는 협력을 단념하고 스스로의 힘만으로 이 동화집을 간행합니다.그림형제는 민화를 국민생활의 직접적인 표현이며 민족문화의 유산이라 생각해 이를 마음대로 개작하는 것을 반대, 그들의 기술방법은 민중의 이야기투를 충실히 옮겨 쓴 문장이 아닌 줄거리 있는 이야기로서의 인상을 강조하고 비유나 속담, 멋과 농담을 가미해 활기를 불어넣는 것이었습니다. 또 독자가 아동이라는 점에 유념해 종교적 색패를 가미하고 너무 잔혹한 이야기는 피하여 약자와 괴로움을 받는 자에 대한 애정과 정의심을 배우도록 쓰여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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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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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성금 모금은 언제 진행 됬을까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 공동모금은 1970년대 정부 주도하에 실시되어 최초 시행은 수십년이 되었으나 진정한 의미에서의 공동모금은 1998년 개정법에 의해 시행된 것으로 이전 공동모금활동은 정부기관 중 하나로 공동모금회가 조직되어 운영되어 자율성이 제약되고 시민의 참여가 한계가 있었으며 국민을 위해 쓰여야 할 모금이 국가복지사업에 쓰이는 문제가 발생합니다.또한 배분과정의 투명성과 공명성이 제대로 보장되지 않아 기부를 한 개인이 직접적으로 기부의 결과를 느끼지 못해 신뢰도가 떨어지고 모금활동이 줄어들기도 했습니다. 1998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법에서 민간단체에게 많은 자율성을 부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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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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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모양처라는 말과 개념이 생긴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현모양처 사상은 서구에서 18세기 경 자본주의화에 의한 근대 가족이 나타나면서 공사 영역의 분리와 함께 형성, 조선과 일본은 19세기 말 개항과 더불어 서구 사상이 유입되면서 들어왔고 조선은 개화기에 근대화의 일환으로 강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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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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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 살던 인물인 강조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사 반역열전에 그의 이름이 올라와있습니다. 정변을 일으켜 임금을 폐위, 시해했으며 목종에게 멋대로 시호, 묘효, 능호를 올린 것 또한 문제였습니다.유교를 받아들인 조선에서 삼강오륜을 저버린 강조를 위인으로 대우하지 않았고 고려사에서 죽을 때 비로소 목종의 혼령에게 잘못을 빌었다는 식의 서술이 추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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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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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최초로 가축으로 기른 동물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인류가 최초로 동물을 사육한 것은 구석기 시대 말인 약 1만 2000년 전 무렵으로 개가 가장 먼저 가축화되었고 이어 고양이, 염소, 양 등이 사육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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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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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이 미국과 사이가 틀어진 이유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979년 이란혁명으로 인해 친서방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던 팔레비 왕조가 몰락, 혁명을 주도한 호메이니가 종교, 정치적 최고 지도자가 된 이래로 이란은 반미노선을 견지하기 시작, 미 대사관 인질 억류 사태를 계기로 양국의 외교가 단절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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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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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게 된 배경은 무엇때문인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860년 최제우에 의해 동학이 창시 , 동학은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봉건사회를 반대하고 서학과 왜를 배척하는 반외세 사상을 주장하면서 그 교세가 확산됩니다. 이에 조선의 위정자들은 동학을 사교로 금하고 1864년 교조 최제우를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하는 등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계속하게 됩니다.그러나 동학 제 2대 교주 최시형에 의해 동학은 농민들을 중심으로 확산, 조직화되었고 이후 동학의 창시자였던 최제우의 억울함을 해소하고 동학교도들에 대한 탄압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교조신원운동이 전개되기 시작, 그러나 이후에도 정부의 묵살은 계속되었고 여기에 전라도군수 조병갑의 불법착취와 동학교도 탄압에 대한 불만이 최고조에 이르게 됩니다.이에 동학교도들은 1894년 1월 전봉준을 중심으로 전라도, 충청도 일대 농민들을 모아 고부 관아를 습격하는 고부민란을 일으키고, 관아를 점령한 전봉준은 정부에 조병갑의 횡포를 시정할 것, 외국상인의 침투를 금지하라는 등의 요구사항을 제시, 정부로부터 폐정을 시정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해산하나 고부민란을 조사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는 오히려 민란 관련자들을 역적죄로 몰아 탄압합니다동학농민운동은 실패했으나 여기에 참가한 동학농민군은 뒤에 항일의병항쟁의 중심세력이 되고 , 그 맥락은 3.1독립운동으로 계승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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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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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니발이 로마와 싸워서 승리하게 된 전투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칸나이 전투를 말씀하시는거 같은데요칸나이 전투는 제 2차 포에니 전쟁 중인 기원전 216년 이탈리아 중부 아프리아 지방의 칸나이 평원에서 로마 공화정 군과 카타르고 군 사이에서 벌어진 것으로 이 전투에서 한니발이 지휘하는 가르타고군은 완벽한 포위작전으로 로마군을 전멸시켰습니다.로마를 굴복시키기 위해 한니발은 기원전 218년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반도에 침입, 한니발은 연이은 트레비아강 전투, 트라시메네호 전투에서 로마군에게 큰 피해를 줍니다. 로마 원로원은 급히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에 임명, 파비우스는 한비발과의 전투를 교묘히 피하면서 지구전으로 카르타고군을 소모시킬 생각이었으나 한니발에 의해 이탈리아 전역이 약탈당하자 파비우스의 작전을 이해하지 못한 로마 시민들은 그를 겁쟁이라 비난하며 한니발과의 결전을 바라는 목소리를 높이게 됩니다.이를 받아들인 원로원은 파비우스의 임기가 끝나는 동시에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타렌티우스 바로 두 사람의 집정관에 임명, 적극적으로 나가라 요청합니다.두 집정권은 약 8만 군단을 이끌고 한니발과 싸우기 위해 나섰고 파울루스는 한니발과의 정면대결에서 피하자 주장하나 바로는 결전을 바랬습니다. 기원전 216년 8월 2일 남이탈리아 아풀리아 지방의 칸나이 부근에서 당일 최고 지휘관이된 바로와 한니발에 의해 시작됩니다.로마군은 1만의 명력을 야영지 경비를 위해 남기고, 남은 7만 여 명을 전장에 배치, 포진은 주력인 중장보병을 중앙에 , 그 앞쪽에 경장보병을, 우익을 로마기병, 좌익을 동맹군 기병을 배치합니다.로마군의 작전 의도는 중장보병에 의한 중앙돌파였고, 그 때문에 각 중대의 간격을 좁게 해 전투열인 중앙을 두텁게했으며 중앙의 지휘는 전집정관인 세르빌리우스가 담당, 파울루스는 우익기병, 바로는 좌익기병을 지휘합니다.카르타고군의 포진은 중앙에 중장보병, 그 앞쪽에 경장보병, 양 날개에 기병을 배치한 것은 로마군과 동일, 그러나 한니발은 중장보병을 활처럼 휘는 모양으로 배치해 튀어나와있는 중앙부에 병력을 집중시켜 종심을 깊게 합니다. 이런 진형을 짠 한니발의 의도는 중앙에서 적 주력을 붙잡고 있는 사이 양익을 적 양익과 격돌시켜 그들을 격멸하고 돌파해 적 전체를 포위하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맹공격이 예상되는 중앙에 어느 정도 피해를 예상하고 갈리아 보병과 에스파냐 보병을 배치, 그 양익에 숙련된 카르타고 보병을 배치, 거기에 보병 전투열의 우익에 누미디아 기병, 좌익에 에스파냐-갈리아 기병을 배치합니다.카르타고군은 로마군에 비해 전군에서 기병이 차지하는 비율이 높았고 그 질과 수도 로마군의 기병에 비해 매우 높았습니다.전투 개시와 동시에 로마군의 중장보병은 카르타고의 보병 전투 대열을 돌파하며 전진, 에스파냐-갈리아 보병이 겨우 버텨 활의 윈 부분에 다다르자 로마군 중앙의 전진속도가 다소 느려지게 되었고 그 사이 카르타고 군 좌익에 에스파냐-갈리아 기병이 우세한 전력으로 로마군 우익기병을 압도해 이들을 패주시킵니다. 한편 카르타고군 우익의 누미디아 기병과 로마군 좌익의 동맹군 기병은 호각지세로 전투를 벌였고 아군의 전투 대열 중앙이 압도 당하는 것을 본 한니발은 양익의 카르타고 보병을 전진시켜 로마군 전투열의 양익을 압박, 한편 로마군 좌익기병을 패주시킨 하스드루발 지휘하의 에스파냐-갈리아 기병은 바로 방향을 바꿔 누미디아 기병과 교전하는 동맹군 기병을 협공합니다.전력으로 약세였던 동맹군 기병은 얼마안가 패주하기 시작, 카르타고 기병은 도망치는 로마군을 쫓지 않고 로마군 중앙의 후방으로 방향을 돌려 돌입합니다.로마군 중앙 전투 대열은 거의 카르타고군 중앙을 돌파하고 있었으나 전투 대열 양익은 카르타고 보병이 우세함을 보여 그쪽 방면의 로마군은 전진하지 못했고 이 시점에서 로마군 중앙은 v자 형태로 이루어집니다. 이때 양익의 로마군 기병을 패주시킨 카르타고군 기병이 후방에서 공격, 후방을 공격당한 로마군은 패닉상태에 빠져 밀집하기 시작, 이로 중앙의 병사들은 몰려드는 병사들에 압박을 못이기고 압사당합니다.전방을 에스파냐- 갈리아 보병, 측면을 카르타고 보병, 후방을 카르타고, 누미디아 기병에게 완전히 포위당한 로마군은 도망치지 못하고 괴멸당하기에 이르며 이 전투에서 로마군은 거의 6만명에 이르는 사상자, 야영지에 남아있던 1만여명은 포로가 됩니다. 그날 최고지휘관이었던 바로는 도망치나 다른 지휘관인 파울루스는 전사, 중앙을 지휘하던 세르빌리우스와 독재관 미누키우스도 전사, 기타 80여 명의 원로원의원도 전사합니다.당시 원로원은 최대일때도 300명을 넘지 않아 4명 중 1명 이상 꼴로 전사한 것인 반면 카르타고 군의 피해는 6000명정도, 그 대부분은 중앙의 에스파냐-갈리아 병사들이었습니다. 이 전투는 로마 측에게 인적손실로 엄청난 피해를 입혔고 로마 시민들과 원로원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이 전투 후 로마는 한니발과의 정면대결은 피하고 지구전으로 전력을 변경, 파비우스 막시무스,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두 명의 집정관이 공격 대상을 시칠리아와 에스파냐 등 카르타고 주변으로 변경해 바깥에서 붕괴를 노렸습니다.우세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카르타고 해군을 위협해 카르타고 본국으로부터 한니발에 대한 보급을 끊고 전력의 재편성과 칸나에 패전의 원인이었던 기병육성에 노력해 자마 전투에서 승리, 기병의 조달은 상대적으로 어려움이 많아 동맹국의 기병과 누미디아 기병에게 의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한니발은 이 승리로 인해 로마 동맹도시가 배반하길 기대했으나 동맹도시의 약속은 그대로 지켜져 충분한 성과는 올리지 못했고 적지에서 보급에 대한 어려움을 겪던 한니발은 로마를 공격하지 않고 비옥하고 카르타고 본국과도 연락을 취할수 있는 이탈리아 남부로 공격방향을 바꾸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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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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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 칸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몽골어로 칭기스는 위대하다를 뜻합니다.어원에 대해 다양한 설이 존재하는데 라시드 앗 딘은 칭의 의미는 단단하고 강하다는 뜻이며 칭기즈는 칭의 복수려이라 기술했습니다.학자 펠리오에 의하면 몽골어에서 칭 의 복수형이 칭기스가 될수 없고, 호수나 바다를 의미하는 튀르크어인 tangiz에서 온 것이라 추정합니다.이 견해를 받아들이면 칭기즈 칸은 사해의 군주, 세계의 군주 라는 의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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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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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 조직은 무엇을 하는곳이었는지요?
안녕하세요. 최은서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승정원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던 행정기관입니다.왕이 내리는 교서나 신하들이 왕에게 올리는 글 등 모든 문서가 거치게 되어 있어 국왕의 비서기관으로 그 역할이 중대했으며 때로는 다른 기관을 무시하고 권력을 행사하기도 합니다.지금의 대통령비서실의 기능을 수행했다고 보시면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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