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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동연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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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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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이야기는 실화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우리 역사 속에 등장한 설화들은 그 나름대로 시대적 의미를 담고 있다. 특히 온달설화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잘 반영한 내용으로 엮어져 있다. 더욱이 정사인 ‘삼국사기’에 온달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 단순한 설화로 보지 않는 학자들도 있다. 사실 ‘삼국사기’에는 신비스러운 내용을 거의 기록하지 않았다. 역사는 사실에 토대를 두고 괴력난신(怪力亂神)의 이야기를 기록치 않는 유교적 엄숙주의의 기술 방법 때문이었다. 그러니 온달 이야기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는 경향이 있다.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온달 이야기를 설화인지 사실인지를 확실하게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또 바보인 온달이 ‘신데렐라’처럼 하루아침에 공주에게 장가를 들어 벼락출세를 했다거나 평강공주와 깊은 사랑을 나눈 미담쯤으로 보려는 정서가 의식의 기저에 깔려 있다. 이는 잘못된 선입관 탓이었다. 그 당시의 역사적 사실과 결부해 이 주제를 풀어보자.온달은 평양 변두리의 산골에서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고 있는 청년이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겉 모습은 구부정하고 우스꽝스러웠지만 마음속은 환하게 밝았다”고 했고, “집이 매우 가난하여 늘 음식을 구걸해다가 어머니를 봉양했다”고 했으며 “찢어진 적삼과 해진 신발로 저자를 왕래하니 그때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바보 온달이라 했다”고 하였다.-고구려 쇠퇴기…갈등 봉합 영웅 필요-이 이야기를 쓴 사관은 온달을 결코 바보라고 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묵묵히 자기 일만을 하고 눈 먼 어머니를 극진하게 봉양하는 효자임을 이야기 속에 풍기고 있다. 그런데도 ‘바보’라는 세상 사람들의 말에 현혹되어 진짜 바보인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진정 아이큐가 낮은 바보는 결코 명장이 될 수도 없었고 뛰어난 솜씨로 말달리기와 활쏘기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아무튼 평강공주는 어릴 적에 울보여서 부왕인 평강왕(평원왕의 오기)이 늘 ‘바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는 농담을 했다. 공주가 16살이 되어 귀족인 상부 고씨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임금은 허언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온달과 혼인하게 해달라고 떼를 썼다. 부왕은 그를 궁중에서 쫓아냈다.그녀는 산골에 사는 온달을 찾아가서 금팔찌를 팔아 마소를 사는 등 넉넉하게 살림살이를 꾸리고 말부리기와 활쏘기를 연습시켰다. 고구려에서는 3월3일 평양 교외에 있는 낙랑의 언덕에서 사냥대회를 열었는데 온달이 참여해 1등을 했다. 임금이 그의 이름이 온달임을 알고 놀랐다. 요동벌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이 전쟁에 임금이 친정했다. 온달이 앞장서서 큰 전공을 세웠다. 임금은 그를 칭찬하고 대형의 벼슬을 내리고 정식으로 예식을 갖추어 혼례를 올리게 했다. 곧 정식 사위로 맞이했다는 말이다. 그 뒤 그는 임금의 극진한 총애를 입었다고 한다. 온달은 평민으로서 최고의 신분상승을 이룩한 것이다.고구려는 여느 고대국가와 마찬가지로 귀족사회였다. 그러니 귀족이 아니면 높은 벼슬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고구려 귀족사회의 형성은 조금 독특했다. 초기에는 5부 체제로 하여 왕권이 심하게 제약을 받았다. 계루부는 왕위 계승권을 가졌으나 나머지 4부는 왕을 추대하기도 왕을 내쫓기도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으며 각기 군사를 보유하고 별도로 조세를 거두기도 했다.왕실의 왕권강화 노력은 쉴 새 없이 전개되었다. 5세기에 활동을 벌인 광개토태왕과 장수왕은 5부 체제를 무너뜨리고 강력한 왕권을 회복한 군주였다. 그런 뒤에도 새로운 귀족사회가 형성되었다. 다시 귀족들끼리 권력쟁탈전을 격렬하게 벌였다. 장수왕은 이들 귀족을 추군(추群·추잡한 무리) 또는 세군(細群·잔챙이)이라 부르면서 모조리 죽여버렸다. 장수왕은 이들 귀족이, 대제국을 건설하는 대사업에 방해가 된다고 보았던 것이다.그런 속에서도 귀족들은 새로 고개를 내밀었다. 6세기 무렵에는 귀족사회가 다시 개편되었다. 곧 평양 천도 후에 옛 도성에 사는 국내성파와 새 도성에 사는 평양파로 갈라진 것이다. 두 파는 권력을 잡기 위해 서로 심한 갈등을 빚었다.이럴 적에 평민들은 조세를 무는 따위의 국가의무를 지니면서도 높은 벼슬을 얻을 수 없었다. 또 왕실은 귀족들과 혼인을 했고 귀족들은 독점적 특권을 누리기 위해 자기네들끼리 혼인을 하여 끈끈한 혈연관계를 맺었다. 평민들이 등장할 틈새가 없었다. 이런 배경에서 온달 이야기가 등장한 것이 아니겠는가? 결국 연개소문은 다른 귀족과 대결한 탓으로 국력을 소모시켜 고구려를 멸망의 길로 내몰았다.-묵묵하고 성실한 효자가 ‘바보’로 와전-또 평원왕은 장수왕이 죽은 지 70여년 뒤에 왕위를 계승했다. 평원왕 당시 고구려는 국력이 쇠퇴해지기 시작해 한강 주변과 죽령 남쪽의 영역을 잃었다. 요동지방도 중국에서 일어난 후주(後周)가 지경을 침범하고 있었다. 고토 회복의 의지는 불탔으나 귀족들의 갈등과 평민들의 불만으로 일체감이 형성되지 않았다. 귀족을 누르고 평민을 등장시켜야 하는 정략이 요구되었다. 그 방법의 하나가 바로 온달의 등장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아무리 화가 난다고 공주를 산속으로 쫓아낼 수 있겠는가?그리하여 진중하고 성실하며 평민이요 무인(武人)인 온달을 사위감으로 미리 찍고 그 공로를 인정해 대형(大兄)이라는 높은 관직을 내리면서 몇 가지 방법을 동원해 사위로 공식적으로 공포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로부터 온달은 “총애와 영예가 더욱 높아지고 위세와 권위가 날로 융성했다”(삼국사기)고 기록했다. 귀족들은 그 치밀한 구조에 맞설 수 없었을 것이다.-삼국사기에 수록…실존인물 일수도-평원왕의 뒤를 이은 영양왕도 국력의 쇠퇴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지배세력의 한 사람으로 활동하였던 온달은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자청해서 남쪽의 고토를 회복하겠다고 나섰다. 온달이 이 임무를 맡은 것은 귀족 출신 장수의 소외를 의미한다. 그는 죽령을 넘어 충주 단양 일대를 석권하기도 하고 한강 중류의 아차산에서도 정복활동을 벌였다. 그는 전장의 일선에서 죽었다.그가 죽자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해 평강공주를 다시 배역으로 등장시킨 것이 아니겠는가? 평강공주가 와서 관을 어루만지고서야 관이 움직였다고 하니 말이다. 고구려 왕실의 이런 정략은 더욱 평민 또는 민중을 더욱 감동시켰다. 그런 탓으로 민중들은 온달설화를 만들어내고 널리 퍼뜨렸던 것이다.온달은 을지문덕과 연개소문과 함께 고구려 3대 장수로 꼽을 수 있다. 그러나 그만이 평민출신이었고 왕의 사위였다. 그래서인지 민중의 입에서는 그의 이름이 가장 많이 오르내렸다. 오늘날에도 예전 귀족이나 다름없는 기득권 세력이 한번 거머쥔 이권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치면서 사회의 갈등요인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조건에서 신판 온달들도 등장하는 것 같다.〈이이화/ 역사학자〉-온달은 평민 출세의 표상…유적도 많고 전설도 많아-온달과 관련있는 전설은 주로 한강 주변과 충주 주변에 널리 퍼져 있다. 곧 단양의 온달산성 주변과 한강가 아차산 주변으로, 온달이 활동한 지역이다.온달산성의 동북쪽 남한강가에는 작은 산이 자리잡고 있고 그 아래 절벽에는 천연의 동굴이 있다. 길이가 70m 되는 동굴인데 남한강의 물이 불어나면 잠기기도 한다. 사람들은 어느 때부터인지 이 동굴을 온달굴이라 불렀다. 온달이 온달산성에 있을 때 때때로 이 동굴에 찾아와 여러 가지 전략을 구상하기도 하고 심신을 단련하기도 하는 등 수양을 쌓은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진다.온달산성과 가까운 곳에 월악산이 있다. 새재와 이웃한 월악산은 군사요충지여서 산성을 쌓아두었다.산 아래에는 기암괴석들이 널려 있다. 그 가운데 큰 돌 위에 얹혀 있는 ‘온달 공깃돌’도 있다. 크기가 어른의 한 아름쯤 된다. 온달이 이곳에 와서 머물 때 심심풀이로 이 돌을 들고 공기 받기를 했다는 것이다. 힘센 장정이라도 들 수 없는 무거운 돌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았다는 뜻이 담겨 있다.아차산에는 온달샘이라는 약수터가 있다. 온달샘은 온달이 이 산에서 진을 치고 있을 때 마셨다는 우물이다. 온달샘 바로 옆에 석탑이 세워져 있다. 사람들은 온달샘을 기리려고 탑을 세웠다고 말한다. 이 탑은 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또 보루성 아래에는 온달이 주먹을 쥐고 결의를 다지는 형상을 한 ‘주먹바위’가 있다. ‘주먹 바위’ 옆에 평강공주가 통곡한 곳으로 알려진 ‘통곡바위’도 있다. 온달의 관이 움직이지 않았다 한다. 마침내 평강공주가 와서 시체를 부여안고 통곡을 하자 그때서야 관이 움직였다고 한다. 그 이후 평강공주가 통곡하는 모습을 한 바위가 생겨났다고 전한다.민중들이 이런 전설을 만들어낸 의미는 어디에 있었을까? 아련하게 전해오는 온달 설화를 두고 사람들은 평민출신 장군의 영웅적 활동과 함께 숭배하는 관념으로 젖어들었던 것이 아닐까? 그리고 ‘신데렐라’가 아니라 평민출신으로 임금의 사위가 되어 출세한 인물의 표상으로 삼았을 것이다.오늘날 서울 광진구와 구리시에서는 ‘고구려’ ‘온달’ ‘평강공주’의 이름을 단 상호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과 함께 나타난 현상이다. 그런 탓으로 온달과 평강공주의 설화는 더욱 붐을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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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세종대왕은 어떻게 한글을 만들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 한자의 보조수단 조선은 중국에서 유입된 한자를 나랏글로 사용했지만 중국인에게 직접 배울 기회는 없었기 때문에 뜻은 알아도 음을 읽는데엔 어려움이 있었다. 즉 한자를 자유자재로 읽고 쓰는 데 제약이 있었고, 이는 손쉬운 발음기호표의 필요성을 대두시켰다. 한글은 한자를 제대로 읽을 수 있는 보조수단인 '발음기호'의 역할을 수행하게 위해 만들어졌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왜 만드냐고 따지는 최만리에게 "내가 운서를 바로잡지 않으면 누가 바로잡겠는가?" 라고 답한 것이 그 근거가 된다. 실제로 조선왕실은 내내 한자를 나랏글로 사용했으며, 한글은 천한 문자라는 '언문'으로 비하되어 양민 이하의 사람들에게만 통용되었을 뿐이었다. 왕실, 종친, 양반들은 여전히 한자로 소통했다. 2. 백성을 위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이유이다. 조선의 평민들은 어려운 한문을 몰랐기에 나라의 법도를 몰랐고, 그 때문에 자신의 행동이 잘못이라는 것 역시 모른 채로 벌을 받거나 처형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세종대왕이 백성들도 쉽게 배우고 쓸 수 있는 글자를 만들고자 했고 이것이 한글 창제로 이어진 것이다. 훈민정음 헤례본에는 한글은 닭울음소리나 개짖는 소리까지 모두 표현해 쓸 수 있으며 지혜로운 사람은 반나절만에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면 깨칠 수 있다고 나와있다. 그만큼 쉽고 실용적인 문자이다. 독창적이고 과학적인 것은 덤! 한글로 인해 일반 백성들은 글로써 자유롭게 소통하게 되었다. 1968년에 공식나랏글로 지정되어 단기간에 문맹률을 제로 가까이 떨어트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3. 조선왕조의 정당성 홍보 한글은 양반들의 한자 활용에 큰 도움을 주었다. 평민들도 배우기 쉽고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문자를 얻었다. 평민들은 비로소 나라의 법령과 규칙들을 알게 되었고, '무지'로 인한 화를 피할 수 있었다. 또 다양한 교육을 받는데도 한글이 사용되었다. 곧 일반 백성들은 '한글' 이라는 하나의 구심점을 갖게 되었고, 왕실에서는 를 펴내기에 이른다. 는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세운 것은 하늘의 뜻이라는 정당성을 내포하고 있으며, 쉬운 노랫말로 구성되어 일반백성들도 쉽게 따라부를 수 있었다. 왕조가 세워진 지 얼마 안 된 시점에서의 최선이자 가장 강력한 왕조 홍보 방법이었을 것이다. 역성혁명과 고려의 잔존세력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불안정한 민심을 수습하고 왕조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일. 어쩌면 이것이 가장 절실한 이유였을지도 모른다고 다수의 학자들은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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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크리스마스 트리는 어디서 유래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크리스마스 트리로는 주로 전나무나 소나무를 이용합니다7세기경 영국의 성 보나파이스가 독일의 어느 마을에서 설교할때어떤 떡갈나무 (Oak) 를 신성시하던 그 마을사람들에게우상숭배를 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그 떡갈나무를 쓰러뜨렸습니다.그러자 그 떡갈나무가 쓰러지면서 다른 나무들을 모두 쓰러뜨려버렸다고 합니다.그때 오로지 넘어지지 않았던 나무가 전나무 묘목이었고성 보나파이스는 이를 기적이라 칭하면서,전나무를 하느님의 나무라고 부른것에서 유래되었답니다. 트리를 장식하는것은 아주아주 오래전, 크리스마스날을 기념하기도 전에 생긴 관습이랍니다.고대의 영국과 로마에서는 한 겨울 동짓날을 기념하기위해 푸른 상록수 가지를 집에다 장식했다고 해요.춥고 어두운 한겨울에 푸른 나뭇가지를 장식함으로써 다가올 봄을 기다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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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세자와 왕의 복장에 대해??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달라요용포에 용에 숫자도 다르고요뒷부분 끝에 토끼 귀모양이 차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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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영정사진은 언제부터 장례에 등장하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영정사진은 근대사회 서양에서 시작됬고신흥중산층 그니까 부르주아 계층이 생겨나면서 물건적 소유 수단으로 생겨났습죠귀족시대때 특권층만이 누릴수있던 자신의 위대한 업적과 기념을 위해 화가를 고용해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게해 그걸 자신의 후대들에게 알리기 위해 생겨난거죠.신흥부르주아의 경우 족보가 안좋지만 갑부이기에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걸 알리고 싶어서겠죠?ㅋ당시 처음에는 세밀하게 그리는 전문화가를 고용했고 그시대 대부분 초상화들이 세밀화풍이 넘침..결국에 '카레라 루시다' 라는 기계가 만들어져 그걸 이용하게되다가탈보트/다게르라는 사람들이 카메라를 만들어내서 이후엔 사진으로 만들어지게 되었죠.뭐랄까 당시 상위층들이 자신을 남기고싶어한다 자취를 남기고싶어하는 마음에서....현재 유적지가서 자기이름 쳐새겨놓고 오는거랑 개념은 비슷하다 보심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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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우리나라가 일본을 지배한적이 있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일제는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 우리나라 국권을 강탈해 조선 총독부를 설치한 뒤 행정, 입법, 사법 및 군대까지 손에 쥐고 우리 민족을 탄압했습니다.우리가 지배한적은 없으니 이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앞서나갈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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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려장은 실제로 존재했던 풍습이었는지 설화였는지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늙은 부모를 산속의 구덩이에 버려두었다가 죽은 뒤에 장례를 지냈다는 풍습으로 오늘날에도 늙고 쇠약한 부모를 낯선 곳에 유기하는 행위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한다. 고려(高麗)라는 명칭 때문에 우리나라 고려 시대에 있었던 장례 풍습처럼 인식되고 있지만, 이러한 풍습이 있었다는 역사적 자료나 고고학적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풍습과 관련된 설화는 비단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도 나타난다. 설화가 전래되는 과정에서 마치 이러한 풍습이 실재했던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으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고려장(高麗葬)이라는 명칭이 굳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려 시대에는 조부모나 부모가 살아 있는데 그 자손이 호적과 재산을 달리하여 공양을 하지 않거나 부모나 남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슬퍼하지 않고 잡된 놀이를 하는 자는 법으로 엄격히 처벌하는 등 효(孝)를 매우 강조하였다. 장례 풍습은 불교식 의례를 근간으로 하였으나, 국가에서 상복 착용의 기간을 오복(五服) 제도로 법제화할 정도로 유교적 의례도 중시하였다. 또한 화장과 매장이 일반적이었으나 가난한 사람들이 풍장을 하는 경우가 있었을 뿐이다. 노부모를 산에 버렸다는 풍습이 있었다는 역사적 자료는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노부모를 제대로 공양하지 않아도 불효죄로 매우 엄격히 처벌했던 당시의 윤리의식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고려시대 이전 국가들의 장례 풍습을 기록하고 있는 《삼국지(三國志)》 등의 기록에서도 그러한 풍습과 관련된 내용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고고학적으로 뒷받침되는 자료들도 없다.노부모를 산에 버리는 고려장의 풍습에 관해서는 몇몇 설화들만 존재한다. ‘기로전설(棄老傳說)’이라고 불리는 설화는 70살이 된 늙은 아버지를 풍습대로 아들이 지게에 지고 산중에 버리고 돌아오려고 하는데, 함께 갔던 손자가 나중에 아버지가 늙으면 지고 온다며 그 지게를 다시 가져오려고 하자, 아들은 아버지를 다시 집으로 모셔 지성으로 봉양했다. 이후 풍습이 없어졌다는 설화다. 그리고 ‘노모의 지혜’라고 불리는 설화는 한 관리가 늙은 어머니를 풍습대로 산에 버리려 했는데,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가는 길을 잃을까봐 가지를 꺾어 표시를 했고 관리는 차마 어머니를 버리지 못하고 다시 집으로 모시고 왔다. 어느날 중국의 사신이 노새 두 마리를 가져와 어미와 새끼를 알아맞히라고 하여 모두 풀지 못했는데, 관리의 어머니가 굶긴 뒤에 여물을 주어 먼저 먹는 놈이 새끼라고 알려 주어 문제를 풀 수 있었고, 그 뒤로 늙은 부모를 버리는 풍습이 없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지역에 따라서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며, 늙은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로 표현되기도 한다.그러나 늙은 부모를 산에다 버리는 풍습을 소재로 한 설화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아시아 각국에 폭넓게 분포하고 있다. 자식 때문에 깨달음을 얻어 늙은 아버지를 잘 봉양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중국 당(唐) 시대 이후에 전승된 《효자전(孝子傳)》의 원곡(原穀) 이야기와 유사하고, 늙은 부모의 지혜로 나라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된다는 이야기는 인도의 《잡보장경(雜寶藏經)》의 기로국(棄老國) 설화와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일부 학자는 ‘기로(棄老)’가 ‘고려’ 내지는 ‘고구려’로 변화하여 자리를 잡으면서 고려장이라는 명칭이 나타났고, 이러한 풍습이 실재했던 것처럼 여겨지게 되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곧 고려장이라는 명칭은 ‘기로장(棄老葬)’이 전해지는 과정에서 변화한 것으로, 고려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또한, 고려장이라는 명칭은 20세기 초까지 노부모를 유기하는 장례풍습보다는 연고를 확인할 수 없는 ‘고분(古墳)’을 이르는 말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으며, 고려총(高麗塚)·고려산(高麗山)·고려곡(高麗谷)·고려분(高麗墳)이라고도 하였다.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일본인의 도굴 사건과 관련해 ‘고려장 굴총(掘冢)’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으며, 1916∼17년에 조선총독부 식산국에서 조사한 《고적대장(古蹟臺帳)》에도 고려장은 고분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고려장이라는 용어가 노부모를 산에 버리는 장례 풍습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 것이 처음 확인되는 기록은 미국의 그리피스(William Elliot Griffis)가 일본에 머무르며 1882년에 발간한 《은자의 나라 한국(Corea : The Hermit Nation)》이라는 책이다. 이 책에서 그리피스는 한국의 고대 사회에서 노인을 산 채로 묻어 버리는 고려장과 산신이나 해신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인제(人祭)가 성행했다고 서술하였다. 하지만 그리피스는 역사학이 아니라 자연과학을 전공한 학자로 일본 정부의 초빙으로 도쿄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의 전신인 도쿄가이세이학교[東京開成學校]에서 강의했으며, 일본이 주체가 되어 조선에서 미신과 전제왕권을 몰아내고 서구문명과 기독교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는 한국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자료들에만 의존해서 한국의 역사와 풍습에 대해 서술했는데, 한국에 대한 편견에 기초하여 일부 설화의 내용을 마치 역사적 사실인 양 왜곡하여 서술했다.그리고 일제 강점기에 기로(棄老) 설화들이 각종 설화집과 동화책 등에서 소개되면서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마치 역사적 사실인 양 다루어지기 시작했다. 1919년 미와다 다마키[三輪環]가 펴낸 《전설의 조선》과 1924년과 1926년 조선총독부와 나카무라 료헤이[中村亮平]가 펴낸 《조선동화집》 등에서 이 설화들이 수록되었고, 이후 1948에 발간된 이병도(李丙燾)의 《조선사대관(朝鮮史大觀)》, 1963년에 발표된 김기영(金綺泳)의 《고려장》이라는 영화 등을 통해 그러한 인식이 더욱 확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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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시대마다 미의 기준은 변화해왔는데 중세시대의 미의기준은 뭐였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성 욕구가 억제되었던 암흑기의 중세시대. 그때 역시 시대적 분위기가 강하게 작용 했다는걸 느끼실꺼예요. 그때의 미인상이 순결함을 연상시키는 작은 가슴과 히프, 흰 살결, 금발에 넓은 이마를 가진 여성, 즉 성녀처럼 느껴지는 외모를 가진 여성이 최고로 아름다운 미인이었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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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고려시대 음서 제도가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고려 시대 문벌 귀족에게 주어진 정치적 특권. 고려 시대 5품 이상 관리의 자제에게 무시험으로 관리가 되게끔 한 제도. 부모의 음덕을 통해 자제가 덕을 보는 제도로, 공음전 제도와 함께 고려 사회를 귀족 사회로 인식하는 근거가 되었다. 조선 시대는 2품 이상 관리의 자제에게 무시험으로 관리가 되도록 하는 음서 제도가 실시되었다. 이를 통해 고려 시대보다 조선 시대가 더 능력 위주의 과거 제도를 중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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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사람의 영혼과 육체에 대해서.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뭐 틀린말은 아닙니다만, 분리가 된다는 과학적 근거와 실증이 된다면 가능하지 않으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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