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다빈치보단 미켈란젤로를 좋아하는1인입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남성의 아름다움을 찬미한 예술가미켈란젤로와 다빈치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오스카 와일드, 랭보, 차이코프스키, 그리고 베르사체와 앤디 워홀, 이들을 묶는 공통 요소는 무엇일까. 물론 이들은 영역은 달라도 모두가 한 시대를 풍미한 문화 예술가들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을 하나로 묶는 또 다른 단어는 바로 ‘동성애’다. 남성적 아름다움을 빚어낸 신의 손,미켈란젤로미켈란젤로 보나로티는 1475년 3월 카프리스의 투스칸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마을의 촌장이었다. 젖먹이때 어머니를 잃은 그는 열 살때 재혼한 아버지를 따라 플로렌스로 갔다. 예술적 흥취가 가득한 그곳에서 소년은 예술학도들과 친하게 지냈고 한동안 도나첼로, 지오토, 마사씨오, 보티첼리같은 대가들의 작품을 베끼며 지냈다. 1488년 벽화가 기를란다요의 도제가 되면서 지금은 전설이 된 한 예술가가 탄생하게 되었다. 미켈란젤로는 화를 잘 내고 말수가 적으며 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먹고 마시는 일을 자제하고 잠도 거의 안 자면서 검소한 생활을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나 라파엘로 등 동시대의 다른 예술가들은 화려한 생활을 즐겼으나 미켈란젤로는 멋있는 옷을 삼가고 조촐한 작업복과 장화를 즐겨 신었고 그런 차림으로 잠을 자기도 했다. 미켈란젤로는 자신을 조각가로 여겼지만 조각뿐만 아니라 그림이든 건축이든 그가 손을 댄 모든 부분에서 걸출한 천재성을 드러냈다. 그가 쓴 3백여편의 소네트는 대부분 게르라르도 페리니와 페보 디 포기오와 같은 젊은이들에게 보내졌다. 57세가 된 1532년 카발리에리라는 젊고 멋진 귀족을 만난 미켈란젤로는 나머지 생을 그에게 몰두했다. 수많은 사랑의 소네트를 써보냈으며 카발리에리를 상징하는 목동 소년 게니메데를 독수리 모습의 제우스로 변신한 자신이 하늘로 낚아채는 그림을 그려서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 그들의 관계는 미켈란젤로가 흠모하는 연사의 역할을 하고 카발리에리는 사랑받는 젊은이의 역할을 하는 플라토닉한 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우정은 32년 동안 지속되었고 미켈란젤로는 카발리에리의 팔에 안겨 죽었다. 그가 죽고 난 뒤인 1623년 카발리에리에게 보낸 시들을 모아 출판할 때 사람들이 동성애를 담고 있는 그 소네트를 보고 당황할 것이라 여긴 미켈란젤로의 조카가 대명사들을 바꾸어서 출판했다.미켈란젤로의 성애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가 엇갈린다. “그대가 마음이 경건할 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남자 배우자를 멀리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고 쓴 아레티노는 페리리나 카발리에리와의 관계를 남색적이라고 비난했다. 이에 비해 바사리같은 이는 미켈란젤로를 두고 “자신의 예술과 결혼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1544년 루이기 델 리치오가 애지중지한 15살의 조카 체치노가 죽었을 때 미켈란젤로가 쓴 50편의 시는 특히 흥미롭고도 주목할만하다. 그는 “그대에게 한 시간밖에 바치지 못했건만 … 나는 이제 그대를 영원히 죽음에게 넘겨주고 마는구나”라고 소년을 애도한다. 68살 때 체치노를 알게 된 미켈란젤로는 소년의 아저씨인 루이기에게 보낸 편지에서 예사롭지 않은 감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1542년에 보낸 다음의 편지는 체치노에 대한 동성애적 환상을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 “방금 플로렌스로 서정적인 연가를 보냈네. 알맞게 고쳐쓴 거이네. 자네 맘에 든다면 나를 사로잡은 불꽃, 그 사람에게 전해주게나. 한가지 부탁이 더 있네. 어제 밤부터 나를 휩싸고 있는 혼란스러움을 자네가 풀어주었으면 하는 것이네. 자네와 내가 숭배하는 그가 내게 인사를 건네는 꿈을 꾸었는데 그는 웃으면서도 나를 위협하는 모습이었다네. 그가 웃고 있는 건지 겁을 주고 있는 건지 알 길이 없네 그려. 자네가 그에게 알아봐 주었으면 하네. 우리가 내일 거기서 만날 때 자네가 그 의문을 풀어주었으면 하네.” 미켈란젤로는 말할 필요도 없이 역사상 가장 뛰어난 걸작을 남긴 예술가이다. 남자를 사랑한 남자로서의 그의 성적 취향은 그가 남긴 위대한 작품들의 중심적인 요소를 차지하고 있다. 남자의 아름다운 육체는 그를 매혹시켰다. 그가 그린 여성조차도 남자의 몸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는 남자의 육체미에 대한 영웅적인 개념화와 형상화를 통해서 게이의 상상력뿐 아니라 우리의 문화적 집단적 상상력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 그는 남자의 육체를 찬미했다.미켈란젤로가 빚어낸 ‘다비드’의 아름다움을 생각해 보라. 자신만만하면서도 은근하고, 포즈를 취한 듯 하면서도 자연스럽고, 어린 듯하면서도 남성적인 힘찬 근육을 가진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어떤 이들은 미켈란젤로가 동성애자였기에 그토록 아름다운 남성을 조각할 수 있었다고 서슴없이 주장하고 있다. 다빈치가 그린 의 미소 “모나리자가 여성일 리가 없다. 자세히 모나리자를 쳐다보면 느낄 수 있다. 모나리자가 남성이라는 것을. 마치 트랜스젠더(성 전환자)의 감추지 못하는 면도자국처럼.”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남자일 것이라는 음모설은 그가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나온 얘기다. 모나리자는 다빈치가 4년에 걸쳐 그린 그림이지만 결국 완성되지 못한 채로 남았다. 그는 이미 24살 때 17살의 소년 모델 제코포 살타렐리에게 ‘불경스러운 짓’을 저질렀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어 견책을 받은 바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1452년 이탤리 쿠스카니 지방에 있는 빈치에서 태어났다. 플로렌스의 공증인과 시골 소녀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나 조부모의 손에서 자란 그는 14살 때 재능을 인정받아 화가 안드리아 델 베로치치오의 도제가 되었다.1482년 밀란에 있는 루도비코 스포르자아 궁정으로 자리를 옮긴 레오나르도는 그 유명한 ‘비망록’을 썼고 ‘암굴의 성모’‘최후의 만찬’같은 불후의 명작들을 그렸다.그는 카프로치라는 귀엽게 생긴 열살박이 소년을 데리고 살기도 했다. 늘 뭔가를 훔치는 그 소년을 그는 비망록에서 ‘작은 악마’라고 부르면서 노트에 꼼꼼히 적어놓은 그 도둑질을 너그럽게 보아 넘겼다. 다빈치는 20년 동안 그 소년을 모델로 해서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레오나르도는 비밀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노트들은 거울에 비춰봐야 바로 보이게끔 반대로 씌여졌다. 그런 그의 성격 때문에 조수였던 세자르 드 세이토, 볼트라피오, 안드리아 살라이노같이 아름다운 청년들, 그리고 입양해서 상속자로 삼았던 프란체스코 멜찌라는 젊은 귀족을 근사하게 차려입게 하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는 것말고는 그의 사생활에 대해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레오나르도는 1519년 끌루에서 죽었다. 그 옆에는 프란체스코 멜찌가 있었다. 전형적인 만능천재 레오나르도는 대단한 창조성과 능력을 가진 예술가이자 다방면으로 박식한 사상가, 폭넓은 발명가이자 과학자였다. 그가 남긴 8천장이 넘는 노트에는 갖가지 과학적 연구물, 발명, 건축 디자인, 스케치 등이 실려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 대가가 오늘날 게이의 심리상태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은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유명한 논문 「다빈치와 그의 유년시절 기억」(1910)을 통해서였다. 프로이드는 동성애의 원인에 관한 이론을 처음으로 발표한 이 에세이에서 레오나르도가 노트에 기록해 놓았던 어린 시절의 한 기억에 대해서 언급한다.“아주 어렸을 적 기억 중 하나가 떠오른다. 요람에 누워있는 내게 수리 한 마리가 내려앉아 꼬리로 내 임을 벌리고 여러번 입술을 때렸다.” 프로이드는 이 기억은 단순한 기억이 아니라 펠라치오에 대한 나중의 환상이 기억과 자리를 바꾼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또 펠라치오는 “젖먹이 때 엄마 젖꼭지를 빨던 그 안락한 상황을 다른 형태로 반복하는 것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프로이드는 모든 욕망의 소용돌이 속에 ‘모나리자’의 알듯 말듯한 수수께끼같은 미소의 비밀이 놓여있다고 보았다. 강력하지만 의문의 여지 역시 많은 프로이드의 레오나르도 읽기가 수많은 게이들의 삶과 의식에 미친 영향력은 그것이 옳든 그러든 간에 과소평가 할 수는 없다. 프로이드의 분석 도구로써의 레오나르도는 수많은 게이와 레즈비언에게 아직도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하여간 레오나르도는 동성애와 재능이 결합되어 분출되었다고 보여지는 무한한 창조적 에너지와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그리고 한 위대한 예술가의 인간적 면모나 삶과 그가 남긴 예술작품에 대한 가치판단은 궁극에는 이를 감상하는 각자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Q. 미란다 원칙 탄생배경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피의자의 이름에서 유래 했습니다/// 미란다의 원칙은 총 3가지로피의자는 묵비권을 행사할수 있다.피의자의 모든 발언이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수 있으며피의자는 변호인의 조언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다. 1. 미란다 원칙의 유래 미란다 원칙이란 1966년에 선고된 미국 미란다판결에서 선언된 것으로서 수사기관에서 피의자를 구속시에 일정한 사항을 알려 주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우리 헌법과 형사소송법에도 아래와 같은 규정이 있습니다.따라서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법원이나 수사기관에서 피고인이나 피의자를 구속할 때에는 아래 헌법과 형사소송법에 있는 사항을 고지하여야 합니다.이를 고지하지 아니하고 하는 구속은 불법이므로 이런 불법구속을 하는 경찰관에게 폭행하였다고 하여도 공무집행방해죄가 되지 아니하고 단순한 폭행죄가 될 뿐입니다.피의자의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경찰의 가혹행위가 중단되지 않았던 것은 1960년대까지 수정헌법에 의해 보장된 피의자의 권리가 주정부에는 적용이 되지 않고 연방법원과 연방수사국(FBI)에만 적용이 되는 것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60년에 워렌대법원장이 이끄는 연방대법원은 권리장전의 적용범위를 차츰 늘려갔고 이 과정에서 주정부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을 받는 피의자의 인권도 신장될 수 있었다.미란다의 상고심이 열리기까지 미국 법원은 수사기관의 자백 강요를 예방하기 위해 보장한 권리, 즉 묵비권을 행사할 권이나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거부를 항 권리는 경찰의 신문과정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인정했다. 주법원에서 피의자의 자백을 증거로 채택할 지의 여부는 전체적인 신문상황이 강압적이었느냐의 여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관례였다. 예를 들어보면 경찰이 피의자를 회유하거나 압력을 행사했더라도 피의자에게 음식을 제때에 주고 밤에 잠을 자게 하면서 얻어낸 자백이라면 전체적인 상황이 강압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증거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 비추어 보면 미란다의 자백을 증거로 인정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된다. 그의 자백이 강압적인 상황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미란다가 연방대법원에 상고할 당시 연방대법원은 형사피의자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점차 확대하고 있었다. 1958년 Crooker v. California에서 연방대법원은 피의자가 경찰의 신문과정에서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기회를 차단당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자백을 증거로 인정할 수 있다고 판결했지만 1964년 Massiah v. U.S.에서 연방대법원은 일단 기소된 피의자는 변호사가 없는 상태에서 불리한 발언을 하도록 신문받거나 유도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Malloy v. Hogan에서는 변호사를 접견할 권리가 주정부 관할사건에도 적용된다고 하였으며, 같은 해 Escobedo v. Illinois에서도 연방대법원은 경찰이 피의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변호사 접근권이 보장되지 않는 상태에서 얻어낸 자백은 증거능력이 없다고 결정했다. Escobedo사건은 해결할 수 없는 두 가지 문제점을 남겼다.첫 번째는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는 Escobedo사건과 같은 경우 즉 피의자가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고, 경찰서에서 신문을 받고, 피의자가 변호인을 요구하고 있으며 동시에 변호사가 경찰서에 있으며 피의자접견을 요구하는 상황과 같은 유사한 상황에서만이 인정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두 번째로 경찰이 피의자에게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을 고지해 주어야 하는지도 불분명했다. 만약 피의자가 변호사를 선임하고 싶어하지만 재정적 능력이 없는 경우 경찰은 신문을 계속할 수 있는지, 만약 피의작 변호사를 원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지 등도 확실하지 않았다.따라서 하급법원으로부터 Escobedo사건에 대한 각각 다른 해석이 쇄도했으며, 1965년 한해동안 연방대법원은 무려 170여건에 달하는 묵비권과 변호사조력권에 관련된 사건의 상고 허가를 요청받았다. 연방대법원은 1966년 미란다사건 외에 3건의 비슷한 사건을 선택해 상고를 허가하고 병합심리하기로 결정했다. 연방대법원이 미란다 사건과 함께 심리한 나머지 세 사건도 모두 미란다와 같은 강력범들에 의해 상고된 사건으로 피고인들은 각각 무장강도, 은행강도, 강도살인 피의자였다. 이들은 미란다와 마찬가지로 모두 외부와 차단된 상태에서 경찰관, 혹은 검사로부터 신문을 받았다. 이들은 묵비권에 대해 고지를 받지 못하고 변호사의 접근이 차단된 채 얻어낸 자백으로 인해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하급법원의 판결이 무효라고 항변했다.
Q. 바로크시대의 음악의 특징은 머가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 통주저음 바로크 시대의 거의 대부분의 기악곡, 성악곡들은 보다 풍부한 소리를 위해저음부에서 지속적으로베이스 반주를 곁들여 주는데, 이 주법은 '통주저음'이라고 한다.르네상스 시대 음악에 비해 반주의 역활이 매우 중요해진것 역시 특징이며바로크 음악을 '통주저음의 시대'라고도 지칭하기도 한다.2) 대규모 오케스트라의 확립이때 들어 오케스트라에서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사용하는 등대규모 오케스트라로의 발전에 획을 그었으며오케스트라의 필수요소로 현악기와, 화려함을 더하기 위한 금관악기 목관악기를 더하는 등바로크 시대에는 본격적으로 많은 악기각 만들어졌기 때문에바로크 후반에 가서는 현대와 비슷한 대규모 편성을 볼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3) 셈여림, 템포, 박자, 장조 및 단조의 확립바로크 시대에 비로소 음악의 속도, 템포가 처음으로 사용되었으며오늘날과 같은 박자의 개념이 완성하게 되었다.중세 시대와 르세상스 시대의 음체계였던 교회 선법은바로크 시대에서 장조와 단조의 체계로 바뀌어지게 되었고이것은 음악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변화라고 보여진다.4_ 즉흥 연주바로크 시대에서는 즉흥 연주가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졌는데가수나 연주자들에게 악보에 자기 자신만의 장식을 첨가하여 연주하는 것이 당연시 되면서화려한 장식음과 연주법들이 많이 개발되었고악보를 쭉 보고 연주하면서 즉흥적으로 화음을 채워넣는 등실제 악보에 쓰여진 것과 다르게 연주되곤 했다.5) 정서론바로크 시대에는 음악적 표현을 더욱 발전시켜 음악을 통해인간의 관념과 정서, 감정을 표현하려고 했다.이러한 전통 때문에 바르크 시대의 음악은 '정서'를 재현하기 위해서객관적인 인간의 여러 감정의 양상을 나타내고자 했다.그러기 위해 음악가들은 리듬, 선율, 화성으로 정서를 표현하기 위해여러 방법을 찾았으며 바로크 시대에 와서 거의 모든 음악가들이 음악어법과 이론들을 체계화 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