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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동연 전문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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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연 전문가
보가9 그래픽 디자인 및 영상 편집 총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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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조선시대 대표적인 발명품에 대해서 궁금합니다.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1. 측우기비가 내린 양을 재는 기구. 조선 세종 23년(1441년)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발명했고, 그 뒤 개량에 힘써 세종 24년(1442년)에 측우기라고 이름하였다. 이 측우기는 무쇠를 써서 깊이 42.5cm, 지름 17cm의 둥근 통 모양으로 만든 것인데, 천문 관계 일을 맡아보던 관상감에 대를 만들고, 그 위에 올려놓아 비가 그친 다음에 그 둥근통에 담긴 빗물의 깊이를 재었다. 이 측우기는 이탈리아의 카스텔리가 만든 측우기보다 200년이나 앞선 것으로, 우리 나라의 자연 조건을 통계적으로 파악하여 농업 생산에 이용하는 한편, 자연 재해를 이겨내려고 애쓴 조선시대 과학자들의 노력의 결실이다.2.규표규표는 일년의 길이가 정확히 몇날인가와 24절기를 알아내기 위해 사용하던 도구이다. 수직으로 세운 막대 표의 그림자 길이를 기준으로 동지, 하지, 춘분, 추분이라하고 나머지 20개 절기를 그 사이에 약 15일 간격으로 배열한 것이다.3. 간의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천체 관측 기구이다. 1276년 중국 원나라때 처음 만들어졌으며, 세종 때 원나라의 제도를 본떠 이천, 장영실 등이 대·소 간의를 만들었다.1437년(세종 19년) 오늘날의 천문관측기기와 같은 원리로 개량된 천문기기인데, 행성과 별의 위치를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다.대간의는 간의대에 설치했고, 소간의는 대간의를 작게 하여 갖고 다닐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오늘날 각도기와 비슷하며, 혼천의를 간소화한 것이다. 임진, 정유왜란으로 유실된 후 최초로 복원되었다.4.자격루자격루는 세종 16년(1434년)에 장영실 등이 세종의 명을 받들어 만든 일종의 자동 물시계이다.나무로 만들었는데, 자동 시보 장치는 지렛대의 원리와 경사면을 굴러 떨어지는 공의 운동을 연결한 것으로 2년이나 걸려 완성하였다.이 자격루는 경복궁 남쪽의 보루각에 설치되어 조선 왕조의 표준 시계로 쓰이다가 자동 장치가 고장나 고칠 수 없게 되자, 단종 3년(1455년)에 자동 시보 장치의 사용이 중지되었다. 연산군 때에는 자격루를 창경궁으로 옮겼으며, 자격루가 만들어진 지 100여 년 만인 중종 31년(1536년)에 새로운 자격루가 만들어졌다. 이 자격루는 현재 덕수궁에 간직되어 있으며 1985년에 국보 제229호로 지정되었다.5.양부일구해시계의 한 가지. 세종 19년(1437년)에 정초, 장영실 등의 과학자들이 많은 기술자를 지도하여 만든 것으로, 솥 모양으로 생겼기 때문에 이 이름이 붙여졌다.오석(검은 색깔의 광택이 있는 돌)에 반지름 30cm의 반구를 파고, 그 안에 동지에서 하지에 이르는 24 절기를 새겨 수직으로 시각의 선을 그렸다. 여기에 북극을 가리키는 바늘이 꽂혀 있어 햇빛이 바늘에 닿으면 그 그늘이 오목한 부분에 나타나므로 그 위치로써 시각을 헤아렸다.세종이 그 해시계를 백성을 위한 공중 시계로 삼기 위하여 혜정교(지금의 종로1가)와 종묘 남가(지금의 종로3가)에 설치함으로써 우리 나라 최초의 공중 시계가 되었다6.혼천의천체의 운행과 그 위치를 측정하여 천문시계의 구실을 하였던 기구로서 둥근 하늘의 모형을 하고 있다.혼의, 또는 옥형이라고도 한다. 하늘의 적도· 황도· 자오선 등에 해당되는 여러 개의 둥근 테를 구형으로 짜맞춘 것으로, 기원전 2세기경 중국에서 처음 만들어졌다.우리 나라에서는 1433년(세종 15년)에 이천· 장영실 등이 감독하여 처음 만든 뒤로 천문역법의 표준 시계와 같은 구실을 하게 되어, 물이나 추를 동력으로 한 시계 장치를 갖춘 정교한 작품도 만들어졌다. 7. 거중기정약용이 고안한 기계로 1796년 수원성곽을 쌓는데 이용되었다.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리는 장치이다. 정약용은 정조가 중국에서 들여온 《기기도설(奇器圖說)》이란 책을 참고하여 거중기를 개발하였다.위에 네 개 아래에 네 개의 도르래를 연결하고 아래 도르래 및으로 물체를 달아매고, 뒤 도르래의 양쪽으로 잡아당길 수 있는 끈을 연결하여 이 끈을 물레에 감아 물레를 돌림에 따라 도르래에 연결된 끈을 통해 물체가 위로 들어올려지도록 했다.《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에 완전히 조립된 모습의 전체 그림과 각 부분을 분해한 그림이 실려있다. 이 책에는 수원성(화성) 공사를 위해 제작한 기구의 종류, 수량이 나와있는데, 거중기는 1대가 사용되었으며 왕실에서 직접 제작하여 공사현장에 내려보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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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장인 문화가 발달한 이탈리아의 역사적 배경은 무었인가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이탈리아에서 일반적으로 로마는 문화의 수도, 피렌체를 경제의 수도, 밀라노를 산업의 수도라 부른다. 북쪽에 밀라노, 토리노, 베로나등을 중심으로 자동차, 중-경기계공업이 발달하였으며 공업 국가로써 세계 제 5위이다. 이탈리아 내에서 3대 항구라 하면 베니스, 제노바, 나폴리 항을 들 수 있고 이 항구 도시를 중심으로 조선 중.화학 공업이 발달했다. 이탈리아가 섬유제품이나 가죽이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다는 것은 오랜 전통과 기술이 발달 그리고 장인 정신 때문이라도 볼 수 있다. (고대 로마 제국 시대부터 사람들이 실크와 옷을 입었다는 걸로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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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가위바위보는 어느 나라에서 시작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하는 놀이를 `가위바위보`라 하는데 이 이름이 생기기 전에는 `짱껨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었다. 이 `짱껨뽀`는 본래 중국말 `란쩡펑`에서 나온 것으로 란쩡펑이란 발음이 와전되어 `짱껨뽀`가 된 것이다.​중국에서 들어온 이 놀이는 중국말을 그대로 따서 `짱껨뽀`라 했는데, 윤석중 선생이 순수한 우리말로 된 `가위바위보`란 이름을 지어냈다. 그 덕에 `짱껨뽀`란 말은 지금 중장년층의 기억 속에나 있는 말이 되었고, 그 자리를 `가위바위보`가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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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제사를 언제부터 왜 지내게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예로부터 동양에서는 자연 현상과 천재지변의 발생을 경이와 공포의 눈으로 보았으며 4계절의 운행에 따른 조화로 인간이 생존할 수 있음을 감사하였다. 동시에 하늘과 땅, 해와 달, 성신(星辰)을 비롯하여 산천(山川)에 깃들여 있다고 생각한 신(神) 그리고 선조(先祖)와 선사(先師)의 가호로 재앙이 없는 안락한 생활을 기원하였는데, 이것이 제사의 기원이다.그러나 제사는 인문(人文)의 발달에 따라 대부분의 제사 대상이 의미를 잃게 되었고, 오늘날 제사라고 하면 선조에 대한 의례를 가리키는 것으로 느끼게 되었으며 지내는 절차도 일정한 격식을 갖추게 되었는데 이것이 곧 제례이다.문헌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이미 요(堯), 순(舜) 시대에 천신(天神), 지기(地祇), 5악(嶽), 4독(瀆)을 제사한 기록이 있고, 조상숭배가 크게 성행하여 조상에 대한 제례가 하(夏), 은(殷) 시대를 거쳐 주대(周代)에 확고하게 갖추어졌다.우리나라 제사의 시초로는 부여(夫餘)에서 12월에 하늘에 제사한 영고(迎鼓), 고구려에서 하늘에 제사 지낸 동맹(東盟), 동예(東濊)에서 10월에 하늘에 제사 지낸 무천(舞天) 등을 들 수 있다. 또 마한(馬韓)에는 소도(蘇塗)라는 신역(神域)이 있어 솟대를 세우고 북과 방울을 달아 천군(天君)이 신을 제사 지냈고, 신라에서는 남해왕(南解王) 때에 혁거세묘(赫居世廟)를 세우고 혜공왕(惠恭王) 때에 5묘(廟)의 제도를 정했으며 산천도 제사 지냈다.고려시대에는 원구(窩丘), 방택(方澤), 사직(社稷), 종묘(宗廟), 능침(陵寢), 선농단(先農壇), 선잠단(先蠶壇), 문선왕묘(文宣王廟), 마조단(馬祖壇), 사한단(司寒壇) 등을 설치하고 예를 갖추어 제사 지냈고 명산, 대천, 우사(雨師), 운사(雲師), 뇌사(雷師) 등도 제사 지냈다. 조선시대에도 원구와 방택만을 제외하고 고려의 제도를 그대로 따랐다.오늘날에는 전주 이씨(全州李氏)의 종약원(宗約院)이 거행하는 종묘의 제향, 서울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서 유림(儒林)이 거행하는 문묘(文廟)의 제향, 유림이 거행하는 각 서원의 제향, 사가의 조상 제사 이외의 다른 것은 찾아볼 수 없다.사가(私家)의 제례는 고려시대에는 대부(大夫) 이상은 증조까지 3대, 6품(品) 이상의 벼슬아치는 할아버지까지 2대, 7품 이하의 벼슬아치와 평민은 부모만을 가묘(家廟)를 세워 제사 지내게 했으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주자가례(朱子家禮)에 근거를 두어 신분을 가리지 않고 고조까지 4대를 봉사(奉祀)하게 했다.근래에는 1969년 제정된 가정의례준칙으로 기제는 조부모까지만 봉사한다고 하였으나 1999년 규제개혁철폐에 의하여 가정의례준칙은 폐지되고, 새로 제정된 건전가정의례준칙을 보면 제례는 기제 및 명절차례로 구분되고 봉사는 제주로부터 2대조까지 성묘는 제수를 마련하지 아니하거나 간소하게 한다고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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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칠지도라는 칼이 살상용 무기였나요?
안녕하세요. 김동연 인문·예술전문가입니다.특유의 복잡한 형상 덕분에 한 눈에 봐도 전투용이 아니라 특별한 의미가 있는 보배임을 알 수 있다. 칼자루에서부터 칼날에 이르기까지 형상은 나무 모양인데 이것은 신성한 나무로, 제사의 주관자를 상징한다. 또한 7갈래 가지는 북두칠성을 본 뜬 것으로 한 나라의 화복을 다스리는 군주의 통치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말 그대로 제사와 통치를 모두 주관하는 군주의 증표이자 신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각 나라 군주들 사이에서는 정교하게 제작한 보검을 선물로 보내는 일이 많았는데, 대체적으로 대국의 통치자가 그보다 작은 나라에 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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