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렌르샤토보물과 템플기사단의 서로 어떤 연관성을 가지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렌르샤토의 보물과 템플 기사단의 연관성은 역사적인 사실보다는 전설과 음모 이론 속에서 이어져 온 이야기입니다.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인 렌르샤토는 19세기 후반, 이 지역의 사제였던 베랑제르 소니에르 신부가 교회를 보수하던 중 갑작스레 큰 부를 얻게 되면서 사람들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후 성당과 탑, 별장을 지으며 상당한 자금을 사용했는데, 이러한 부의 출처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자, 사람들은 그가 고대의 숨겨진 보물을 발견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품게 되었습니다.이때부터 렌르샤토는 고대 보물이나 종교적 비밀이 감춰진 장소로 여겨졌고, 이와 함께 자주 거론된 집단이 바로 중세의 종교 군사 조직인 템플 기사단이었습니다. 템플 기사단은 십자군 전쟁 당시 예루살렘을 방어하고 순례자를 보호했던 강력한 기사단으로, 막대한 부와 비밀스러운 지식, 성스러운 유물을 보관하고 있었다는 전설이 전해집니다. 이들은 14세기 초 프랑스 국왕 필리프 4세의 탄압으로 해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보물과 기록들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퍼졌습니다.렌르샤토와 템플 기사단이 연결된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첫째, 템플 기사단이 프랑스 전역에 걸쳐 광범위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렌르샤토 역시 그들의 활동 무대 중 하나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습니다. 둘째, 렌르샤토와 그 주변 지역은 과거 이단으로 몰린 카타리파와 템플 기사단의 연계가 있었다는 전승이 남아 있으며, 이 지역에 성스러운 유물, 예를 들어 성배나 예수의 혈통을 상징하는 비밀이 숨겨졌다는 가설이 제기되었습니다.이러한 전설은 20세기 들어 다양한 저서와 다큐멘터리, 소설을 통해 대중적으로 퍼졌으며, 결국 『다빈치 코드』와 같은 작품을 통해 ‘템플 기사단 – 성배 – 렌르샤토’라는 연결고리는 더욱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소니에르 신부가 발견했다는 고문서나 유물의 실체는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가 사용한 기이한 상징물과 건축 양식 등은 오컬트 및 비밀 조직과의 연관성을 시사하며 템플 기사단의 유산과 연결되어 해석되기도 했습니다.
Q. 고조선과 관련된 유적이나 유물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고조선과 관련된 유적과 유물은 주로 한반도 북부와 만주 지역에서 발견되며, 이를 통해 고조선 사회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대표적인 유물로는 비파형 동검이 있습니다. 이는 고조선의 대표적인 청동 무기로, 칼날이 넓고 모양이 비파를 닮아 붙여진 이름입니다. 비파형 동검은 주로 요령 지방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에서 출토되며, 고조선이 청동기를 제작하고 사용했던 고대 국가였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거친무늬 거울은 복잡하고 정교한 무늬가 새겨진 청동 거울로, 권력자의 상징으로 여겨져 고조선 내에 사회적 위계질서가 존재했음을 나타냅니다.무덤 유적인 고인돌 역시 고조선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입니다. 특히 북방식인 탁자형 고인돌은 정교한 구조와 부장품을 통해, 당시에도 지배층과 피지배층이 구분된 계층 사회였음을 보여줍니다. 후기 고조선 시기에는 철기 유물도 발견되는데, 철제 단검이나 도끼, 농기구 등은 고조선이 단순한 청동기 문명을 넘어서 철기를 도입한 사회였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또한 곡물 저장 항아리나 농기구의 존재는 고조선이 수렵과 채집보다는 농업을 중심으로 한 정착 생활을 했음을 시사합니다. 이러한 유물들은 고조선이 이미 정착 농경 사회의 특징을 갖추고 있었고, 기술적인 측면에서도 상당히 발달한 상태였다는 점을 보여줍니다.유적지로는 고조선의 수도로 여겨지는 왕검성이 있으며, 이 외에도 요령 지방의 고대 유적지에서 고조선 문화와 관련된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고조선의 세력 범위가 한반도 북부를 넘어 만주 지역까지 확장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Q. 스탬포드 레플스 경과 관련되어있다는, 전 세계의 여름을 삭제한 사건이란 뭔가?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스탬포드 레플스(Sir Stamford Raffles) 경이19세기 초 동남아시아에서 근무 중 작성한 보고서가 ‘전 세계의 여름을 없애버린 사건’과 연관되어 있다는 말은 다소 문학적으로 표현된 것이며, 실제로는 다음과 같은 역사적 사건과 연결되어 있습니다.스탬포드 레플스는 당시 자바섬에서 영국 동인도회사를 대표해 통치하고 있었는데, 탐보라 화산 폭발 이후, 수바와 섬과 주변 지역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이 보고서는 1815년 폭발 당시의 피해 규모, 화산재, 기후 이상 등에 대한 최초의 공식 기록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레플스는 생존자들의 증언, 잔해, 기후 변화 등을 기록하며 국제 과학계에 이 전례 없는 재해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또한 레플스의 보고서는 이후에 과학자들이 탐보라 화산 폭발과 1816년 이상기후 사이의 연관성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나아가 이 보고서는 대규모 화산 폭발이 지구 전체의 기후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고, 현대 기후학 발전에도 중요한 토대가 되었습니다.
Q. 우리나라 김치의 유래는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김치는 우리 민족의 식생활에서 빠질 수 없는 대표적인 발효 음식으로, 그 기원은 삼국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고대 한민족은 기후의 영향으로 겨울철 식량을 저장할 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라 채소를 소금에 절여 저장하는 문화가 발달하였습니다. 이러한 저장 방식이 바로 김치의 원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삼국시대 문헌에는 '침채(沈菜)'라는 말이 등장하는데, 이는 채소를 소금물에 담가 저장한 음식을 뜻합니다. 이는 현재의 김치와는 다소 다르지만, 김치의 초기 형태로 볼 수 있습니다. 이때는 고춧가루가 전래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맑은 국물에 절인 백김치류나 물김치류가 주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고추가 우리나라에 전해진 것은 16세기 말 임진왜란 이후입니다. 고추가 김치에 본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부터로, 이때부터 지금과 같은 빨간 고춧가루 김치가 등장하였습니다. 고추는 김치의 맛과 향, 저장성을 크게 높였고,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김치의 형태가 본격적으로 정착되기 시작한 시기입니다.조선 후기에는 다양한 김치 종류가 나타났으며, 계절과 지역에 따라 배추김치, 총각김치, 동치미, 갓김치 등 여러 변형이 생겼습니다. 또한 겨울철에 대량으로 김치를 담그는 김장 문화도 이 시기에 정착되었습니다. 이후 김장은 공동체의 중요한 연례 행사로 자리 잡으며, 김치 문화는 단순한 음식문화를 넘어 사회적, 문화적 전통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Q. 길이를 재는 자는 어디에서 유래가 되었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 가장 초기의 길이 단위는 사람의 신체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예를 들어 고대 이집트에서는 팔꿈치에서 손끝까지의 길이를 기준으로 하는 ‘큐빗(cubit)’이라는 단위를 사용했으며, 실제로 그 길이에 맞춘 돌이나 금속으로 된 자를 제작하여 측량과 건축에 활용하였습니다. 메소포타미아나 고대 중국에서도 신체 부위를 기준으로 한 단위가 사용되었는데, 중국에서는 ‘척(尺)’이라는 단위를 사용했고, 이는 한국에도 전해져 ‘자’로 불렸습니다.하지만 사람마다 신체 길이가 다르기 때문에 정확한 기준이 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표준 단위의 필요성이 점차커졌습니다. 중세 유럽에서도 ‘야드’, ‘피트’ 등의 단위를 왕의 신체 일부를 기준으로 정했으나, 이러한 기준은 일관성부족했습니다. 이에 따라 근대에 들어 국가 차원에서 금속 자를 만들어 표준을 세우려는 시도나타났습니다.길이 단위의 결정적 전환점은 18세기 프랑스 혁명 시기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과학자들은 북극에서 적도까지 지구 반지름 거리의 1천만 분의 1을 1미터로 정의하면서 미터법을 정립하였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백금으로 만든 표준 미터 자가 1799년에 제작되어 파리에 보관되었고, 이후 여러 나라로 확산되면서 세계적으로 통일된 길이 단위 체계가 자리 잡게되었습니다.이처럼 자의 탄생은 신체 기준에서 출발하여 사회적 필요와 과학적 사고의 발전에 따라 점차 객관적이고 정밀한 도구로 발전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Q. 고려시대는 왜 고려말에 많이 혼란스러웠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공민왕 이후 고려가 지속적으로 혼란을 겪고 외세에 휘둘린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우선 공민왕은 원나라의 간섭을 배제하고 자주적인 정치를 추진하며, 권문세족의 권력을 억제하고 전민변정도감 설치 등으로 개혁을 시도했습니다. 또한 원의 쇠퇴를 틈타 쌍성총관부를 수복하고, 몽골풍을 제거하는 등 민족적 자존감을 회복하는 데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은 권문세족의 강한 반발을 불러왔고, 개혁의 뿌리가 제도적으로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민왕 사후 곧바로 후퇴하게 됩니다.공민왕이 암살당한 이후, 왕권은 급속히 약화되었고, 권력을 둘러싼 왕족과 신하들 간의 정쟁이 심화되었습니다. 특히 신흥 사대부 세력과 기득권을 가진 권문세족 간의 충돌, 외척의 개입, 왕위 계승 분쟁 등으로 조정은 끊임없이 내분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로 인해 중앙 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지고, 지방은 다시 문란해졌으며, 국정은 혼란에 빠졌습니다.또한 이 시기에는 외교적으로도 매우 불안정했습니다. 원나라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고려는 자주성을 회복했지만, 곧이어 명나라와의 외교적 마찰이 시작되었습니다. 고려 내부에서는 친명파와 친원파로 나뉘어 외교 노선을 두고 갈등이 격화되었고, 이는 다시 정치적 분열로 이어졌습니다. 외교 노선 문제는 단순한 외교 정책을 넘어서 권력투쟁의 수단으로 활용되었고, 국론은 통일되지 못한 채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습니다.한편 왜구의 침입과 홍건적의 침공 등 외적의 위협도 고려를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왜구는 남부 해안 지방을 지속적으로 약탈했고, 홍건적은 수도 개경까지 침입해 왕이 피난을 가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군사력은 약화되고, 백성의 불만은 극에 달해 농민 봉기와 민심 이반으로 이어졌습니다.이러한 복합적인 내외적 위기 속에서 고려 후기의 국력은 급속도로 쇠퇴했고, 결국 신흥 무장 세력이 부상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이성계로, 그는 왜구를 격퇴하며 명성을 쌓고, 위화도 회군을 통해 정치 권력을 장악한 뒤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하게 됩니다.
Q. 흥선대원군이 안동김씨를 숙청하지 않고 기용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흥선대원군은 철종 말기부터 권력의 중심에 있던 세도 가문, 특히 안동 김씨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지만, 즉위 초부터 이들을 전면적으로 제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안동 김씨가 이미 조정 내 핵심 관직은 물론, 군사와 지방 행정, 인맥 등 국가의 중요한 권력망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한순간에 모두 몰아낸다면 조정 운영에 큰 혼란이 발생하고, 자신에게 돌아올 정치적 반발과 저항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또한 흥선대원군은 정치 기반이 그리 튼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원래 국왕이 아닌 왕족 출신이었으며,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고 섭정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을 뿐, 정치적 뒷배나 강력한 당파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기존 권력층을 어느 정도 포섭하고 타협하지 않으면 안정적인 정국 운영이 어려웠습니다.이에 흥선대원군은 안동 김씨 가운데 정치적 입장이 유연하거나 협조적인 인물들은 정책 수행에 필요에 따라 기용하면서도, 핵심 권력층을 서서히 제거해 나가는 정리 전략을 택했습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이 안동 김씨를 전면적으로 숙청하지 않고 일부 인물을 적극 기용한 것은 자신의 정치 기반이 약한 상황에서 조정의 안정을 유지하고 실질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현실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기존 권력 세력과의 일정한 협조와 타협을 병행하면서, 점진적으로 왕권 중심의 정치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Q.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중국을 쳐들어간 이유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는 한반도뿐 아니라 만주와 요동, 중국 북부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시기 고구려의 남쪽에는 여전히 백제와 신라, 가야 등이 존재했지만, 광개토대왕은 이들 남부 세력을 완전히 정복하지 않고, 오히려 북방과 중국 대륙 쪽으로 진출하는 데 더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이러한 선택을 한 요인은 다음과 같습니다.우선 고구려는 북쪽과 서쪽 국경을 통해 끊임없이 중국계 국가들의 위협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요동과 만주 일대는 고구려의 안전과 자원 확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으며, 후연, 북위, 유연 등 북방 세력과의 충돌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이러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북방 정벌을 단행하고 요동을 장악함으로써 국경 방어를 강화하고 고구려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려 했습니다.반면남쪽 지역에 대해서는 직접 지배보다는 영향력을 확대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신라가 왜와 가야의 침입을 받자 군사적 지원을 보내 도와주었고, 이를 계기로 신라는 고구려에 일정 부분 종속적인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또한 백제에 대해서는 군사적으로 큰 타격을 주어 수도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공물을 바치게 했지만,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않았습니다. 이는 고구려가 남한 지역 전체를 직접 통치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고, 군사적·행정적으로도 큰 부담이 되었기 때문입니다.더불어 고구려는 국가 성립 이래 북방 유목민족이나 중국 세력과의 경쟁을 통해 성장해온 국가였기 때문에, 남쪽보다 북쪽에 더 큰 전략적 관심을 가졌습니다. 고구려의 정체성 자체가 북방 정복과 맞닿아 있었으며, 문화적·경제적 교류 역시 만주와 요동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중국 북방 진출에 더 큰 우선순위를 두게 되었습니다.
Q. 1차 세계 대전 패전국 독일인데요 그런데 독일이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킬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때문인가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독일은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을 통해 가혹한 조건을 부과받았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막대한 전쟁배상금, 식민지와 영토 상실, 라인란트 비무장화, 병력 10만 명 이하로 제한 등 국가적인 굴욕과 경제적 고통을 강요받았습니다. 이로 인해 독일 국민들 사이에는 강한 패전 의식, 분노, 복수심이 자리 잡았고, 정치적으로는 불안정한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가 혼란 속에 출범하게 됩니다.이러한 혼란 속에서 1920년대 초 독일은 하이퍼인플레이션과 극심한 실업, 빈부격차로 인해 국민 생활이 무너졌고,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와 극우 세력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며 사회가 불안정해졌습니다. 미국의 자본 유입으로 잠시 회복되었지만, 1929년 세계 대공황이 발생하면서 독일 경제는 다시 붕괴 상태에 빠졌습니다.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히틀러와 나치당이 급부상하게 됩니다.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은 부당하다”, “독일은 다시 위대해져야 한다”는 민족주의·극우주의·반유대주의를 내세우며 대중의 불만을 정치적 지지로 바꾸어갔고, 1933년 총리로 임명된 뒤 곧 독재 체제를 수립하였습니다.집권 후 히틀러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독일을 재무장시키고 전쟁 준비를 해나갔습니다.우선 히틀러는 병력 제한, 무장 금지 등의 조약 조건을 무시하고 비밀리에 군대를 확장했습니다. 1935년에는 징병제를 다시 도입하고 공공연히 군비를 증강시켰습니다.다음으로 히틀러는 국가 주도 대규모 토목사업, 군수산업 투자 등을 통해 실업률을 낮추고, 국가에 대한 자긍심을 심어주었고, 대중 선전을 통해 민족주의와 히틀러에 대한 충성을 강화했습니다.또한 1930년대 유럽 강대국들, 특히 영국과 프랑스는 히틀러의 도발에 대해 유화정책으로 대응하며 강하게 제지하지 않았는데, 이로 인해 히틀러는 국제적 저항 없이 점점 더 과감한 행동을 하게 되었고, 마침내 1939년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됩니다.결론적으로,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 후 심각한 경제적·사회적 위기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은, 국민의 불만과 분노를 정치적으로 이용한 히틀러의 선동,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복수심, 그리고 국제 사회의 미온적인 대응이 맞물린 결과였습니다. 독일은 공식적으로는 전쟁을 할 능력이 없었지만, 체제를 전쟁 중심으로 개편하고 국가 전체를 동원하는 방식으로 빠르게 재무장하여, 다시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Q. 예전에 개고기를 보신탕이라고 먹게된 유래는 어떻게 되나요?
안녕하세요. 이동광 전문가입니다.우리나라에서 보신탕을 먹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히 명시된 기록은 없지만, 고대부터 개고기를 식용해 온 전통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고조선 이전의 부족국가나 부여, 옥저, 고구려 등의 고대 사회에서는 개고기를 먹었다는 정황이 중국 사서인 『후한서』 동이전 등을 통해 전해지며, 일부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도 사냥한 개를 요리하는 장면으로 해석되는 그림이 발견되기도 합니다.삼국시대에도 개고기는 일부 지역이나 계층에서 보양식이나 특수한 목적의 식품으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며, 전쟁이나 사냥 후 기력을 회복하기 위한 용도로 먹은 흔적이 민속 전승 속에 나타납니다.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고려사』 등에 개고기가 시장에서 거래되었다는 기록이 존재하며, 이 시기에도 식용 문화는 이어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불교의 영향으로 살생을 꺼리는 분위기 속에서도 개고기 식용은 민간에서 꾸준히 이루어졌습니다.조선시대에는 보신탕이 점차 여름철 보양식으로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허준의 『동의보감』과 같은 한의학 서적에서는 개고기가 양기를 보충하고 기력을 회복하는 데 효과적인 음식으로 소개되었고, 조선 후기에는 복날에 보신탕을 끓여 먹는 풍습이 일반적인 전통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시기에는 주로 노인이나 병자, 노동자들 사이에서 보양식으로 개고기를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습니다.근현대에 들어와서도 개고기 식용 문화는 지속되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일시적으로 억제되거나 금지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민간에서는 보신탕이 널리 소비되었습니다. 산업화 이후에도 복날에 보신탕을 먹는 풍습은 계속 이어졌으며, 이는 기력 회복과 건강을 위한 전통 음식으로서의 위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