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중세 유럽판금갑옷기사들이 다른 아시아나 중동군사와 싸울때는 왜이리 무기력했나요
중세 유럽의 판금 갑옷 기사들은 이슬람 군사들과 싸울 때 여러 이유로 무기력했습니다. 우선 유럽 기사들은 무거운 판금 갑옷과 중무장 기병 중심의 전투 방식입니다. 반면 이슬람과 아시아 군사들은 기마 궁수, 경무장 기병, 빠른 기동 전술를 활용했습니다. 또한 멀리서 활이나 화살을 공격하며 접근전을 피했습니다. 게다가 오스만, 몽골, 중앙아시아 군대 등은 일찍부터 화승총 대포 등 화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했고, 강력한 복합궁 등 원거리 무기를 사용해 근접전에 유리한 판금갑옷을 입은 유럽 기사들이 전투에 불리했습니다. 게다가 아시아, 중동군은 넓은 초원과 사막에서 기동성이 뛰어나 유럽 기사들이 적응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중세 유럽의 기사들은 아시아, 중동 병사들과 전투에서 매우 불리하였던 것으로 판단됩니다.
Q. 십자군 전쟁당시 이슬람 갑옷은 어떤 식이었나요
십자군 전쟁 당시 이슬람 군사들의 갑옷은 주로 가죽 갑옷, 러멀레 갑옷, 스케일 아머, 그리고 체인메일을 착용했습니다. 상류층이나 정예병은 철제 러멜러나 체인 메일을 입었지만 일반 병사들은 가족이나 천으로 된 경갑을 더 많이 사용했습니다. 더운 중동 기후 때문에 십자군의 무거운 판금 갑옷보다는 기동성에 유리한 가볍고 움직임이 편한 갑옷을 선호했습니다. 이는 빠른 기동에 유리했습니다. 다만 투구는 철제 또는 가족으로 제작되었으며, 얼굴을 보호하기 위해 사슬코이프가 사용되었습니다. 방패는 주로 원형 가족 방패가 많습니다. 즉 이슬람 병사들은 유럽 기사들보다 가볍고 다양한 재질의 갑옷을 입었으며, 기동성과 더운 기후에 적합하게 무장하였습니다.
Q. 고대 이집트에서의 신도 체계나 급이정해져있나요
고대 이집트의신들은 매우 다양한 체계를 이루었습니다. 고대 이집트 신들은 각 지역과 시대에 따라 중심 신이 달랐지만 대체로 태양신 '라', 오시리스, 이시스, 호루스, 아문 등 주요 신들이 최상위 계층을 형성했습니다. 이들은 신의 창조, 태양, 죽음, 부활, 질서 등 우주적 원리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신들 간에에는 가족 관계나 신화적 계보가 설정되어 있습니다. 각 신전은 특정 신을 모셨으며, 파라오가 신의 대리자로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그 아래는 다양한 계급의 사제들이 존재합니다. 이집트 각 지역(노움)마다 수호신이 있으며, 왕조나 시대에 따라 신이 국가신으로 격상되기도 했습니다.
Q. 조선시대 이전까지 까마귀를 흉조로 여기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인가요
조선시대 이전까지 까마귀를 흉조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고구려에서 까마귀를 형상화한 삼족오는 오히려 태양을 상징하고 하늘과 인간을 연결하는 매개자 역할을 하였습니다. 또한 연오랑, 세오녀, 오작교 설화 등에서도 까마귀는 신성한 존재이자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유교적 가치에서는 까마귀는 자란 뒤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주는 반포보은의 상징으로 효과 보은의 의미도 담고 있습니다. 이처럼 까마귀는 지혜, 신성, 태양, 효 등의 긍정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스니다. 그러나 조선 후기 까치가 길조로 부상하고 까마귀는 점차 흉조로 인식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Q. 이슬람에서는 과거부터 남근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표현했나요
이슬람 문화권에서 남근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하는 전통은 거의 없습니다. 이슬람교의 경전 쿠란과 하디스에 따르면 인간의 신체, 특히 성적인 부분을 노출하거나 묘사하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또한 이슬람 사회에서 남근은 주로 종교적, 의학적 맥락에서 언급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남성 할레는 신체적 정결과 종교적 의무로 강조된 것입니다. 문학에서도 성적 은유나 상징이 제한되었으며, 직접적 표현은 자제되었습니다. 남근은 생식력, 남성성, 가문의 번영 등과 연결되어 관념적으로 중요하게 여겨졌으나, 시각적 이미지나 상징물로 발전하지는 않았습니다.
Q. 역사적으로 드라큘라 백작은 실제 존재인물인가요?
드라큘라 백작의 모델은 15세기 루마니아 왈라키아 공국의 군주 블라드 3세입니다. 그는 오스만 제국과 싸운 용장이자 적과 죄인을 꼬챙이로 꿰어 처형하는 극도로 잔인한 처벌로 악명이 높아 블리드 '체페슈'(꿰뚤른 자'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블라드 3세는 부친 블라드 2세의 별명 '드라쿨'(용) 때문에 즉 드라쿨의 아들이라고 해서 드라큘라로 불리게 된 것입니다. 블라드 3세, 즉 드라큘라 백작은 정치, 외교적으로 오스만제국, 헝가리와 맞서 나라를 지킨 위대한 인물이지만 잔인한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그리고 1897년 브램 스토거가 쓴 소설의 허구적 인물 주인공의 모델로 각색되게 됩니다.